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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라는 징검다리
[박중언의 노후경재학]
[120호] 2020년 04월 01일 (수) 박중언 parkje@hani.co.kr

박중언

   
▲ 코로나19 사태로 외국계 기업들이 일제히 재택근무에 들어간 2020년 2월25일 서울 종로구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 사옥 안이 한산하다.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은 한국 사회의 새 풍속도를 그렸다. 일부 앞서가는 기업에서나 볼 수 있던 재택근무를 상당수 기업에 퍼뜨렸다. 재택근무를 강제적으로 실시한 외국 대도시 정도는 아니지만, P부장이 다니는 중견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회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기간요원이 아니어서 비교적 일찍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정해진 업무를 정해진 시간에 끝내면 되었기에 거의 문제가 없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집에서 일할 때가 드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주말 근무는 집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코로나19는 재택근무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물론 긴급 재난이 지나간 뒤 예전으로 되돌아갈지는 알 수 없다. 재택근무 장단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다수 직원이 집에서 일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 기업에선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 또한 재택근무의 지혜와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출퇴근 교통지옥, 회의를 위한 회의, 상사의 잔소리 등 직장생활의 고달픔에서 좀체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니.

코로나19가 기회?
“아침에 출근할 데가 없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가 막막하다.” 회사를 그만둔 직후 퇴직자에게 곧바로 닥치는 고민거리다. 가기 싫어도 아침마다 집을 나서게 해준 게 직장이다.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겠지만 정해진 곳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돌아올 즈음이면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간다.
출근이 있기에 퇴근이 즐겁고 편안하다. 매주 적어도 5일 동안 규칙적으로 일했기에 주말과 가끔 생기는 휴가가 고맙게 다가온다. 그런 리듬이 사라지면 막막해지거나 안절부절못하기 일쑤다. 아날로그 시절부터 사람과 서류를 주로 대해온 중장년이 더욱 그렇다. 평소에도 갑자기 회사를 나가지 않을 때면 이따금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재택근무는 특히 퇴직이 가시권에 든 P부장 같은 이에겐 아주 소중한 기회다. 오래지 않아 생활의 ‘주전장’이 직장에서 집으로 바뀔 사람들이다. 평일에도 집에서 머무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재택근무는 회사에 나갈 필요가 없는 하루를 짜임새 있게 보내는 노하우를 길러주는 ‘모의고사’인 셈이다.
장소가 집일 뿐, 해야 할 일은 똑같은 게 재택근무다. 무한정 게으름을 피우거나 대책 없이 널브러져 있을 수 없다. 회사처럼 일과 휴식 시간이 또렷이 구분되지는 않지만, 요구되는 시간을 일에 투입해야 한다. 알아서 시간을 나누고 더 유연하게 일하는 자생력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과 집안일 양쪽에 치여 더 피곤해질 수 있다.
집에서도 필요한 것을 해내는 경험과 노하우는 퇴직을 맞이하는 우려를 훨씬 가볍게 해준다. 우선 아침에 갈 곳이 없다는 암담함이 크게 줄어든다. 소속감이 있는 재택근무 때와는 다르겠지만 출근하지 않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집에만 머무는 게 견디기 힘들 만큼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다. 재택근무를 처음 하는 사람은 집이 주는 갑갑함에서 벗어나려 가까운 카페를 찾기도 한다.
시간 관리의 막막함도 덜해진다. 재택근무를 하며 회사 일, 집안일, 휴식 등에 스스로 시간 배분을 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회사 일을 하던 시간만 다른 데 쏟으면 퇴직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급여는 별개 문제이지만. 직장과 집의 성격이 섞인 재택근무가 퇴직에 따른 생활 형태 변화의 충격을 완화해주는 징검다리가 돼준다.
코로나19 사태로 권장되는 ‘자가격리’나 ‘사회적 거리 두기’ 또한 퇴직을 앞둔 이에겐 전혀 부담이 없다. 이들에겐 직장과 직함을 매개로 맺어온 관계가 곧 사라지고, 만남의 횟수와 강도가 크게 줄어든다. 미리 적응 훈련을 해 나쁠 게 없다. P부장은 이번 기회에 기존 관계를 되돌아볼 생각이다. 그가 이따금 하던 페이스북 글쓰기를 잠정 중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면 접촉 대신 디지털 대화를 늘릴 수도 있겠지만 ‘좋아요’나 서로 눌러주는 ‘데면데면한’ 관계라면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된다.

주말의 용도 변경
이런 관점을 확장하면 직장생활과 퇴직 이후의 점이지대를 만들어볼 수도 있다. 지리 용어인 점이지대는 완충 작용을 하는 변화의 경계 또는 중간지대를 말한다. 활동 중심이 회사에서 집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알맞은 업무 또는 생활 형태라는 뜻을 담았다.
P부장은 재택근무는 물론, 주말과 휴가도 퇴직 이후로 가는 징검다리로 생각해왔다. 통상 주말이란 일하느라 쌓인 피로를 풀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때를 말한다. 그런 주말이 P부장에겐 ‘퇴직 후 생활’을 하는 날이다. 자신이 구상하는 정년퇴직 뒤 일정표에 맞춰 주말을 보낸다. 다시 말해 그는 일주일 가운데 닷새는 직장생활, 이틀은 퇴직 후 생활을 한다. 퇴직 이전에도 직장 없는 생활이 30% 정도를 차지하고, 정년퇴직 이후 그 비중이 100%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조삼모사 같은 말장난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노후는 천양지차가 될 수 있다. 출근의 사라짐에 전전긍긍하는 것과, 이미 익숙해 자연스러운 것은 전혀 다르다. 전부터 해오던 것이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충격은 당연히 줄어든다.
P부장은 주말과 휴가에 퇴직 후 생활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한다. 하루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활동에 어느 정도 시간을 쏟는 게 자신에게 맞는지 가늠하기 위해서다. 운동, 등산, 독서, 영화·드라마 관람, 집안일, 친구·친척 만나기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거기에 드는 비용도 따져본다.
그에겐 각종 명절과 경축일, 정기휴가 외에 25일에 이르는 연차휴가가 있다. 퇴직 후 생활 비중을 더 늘려주는 좋은 재료다. 업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법정공휴일 없는 주에 연차를 하루씩 나눠 써볼 생각이다. 그러면 1년(52주)의 절반 이상 주 4일 근무가 가능하다. 퇴직 후 생활을 사흘 동안 하는 주가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되도록 수요일에 휴가를 배치하면 ‘일(2)-휴식(1)-일(2)-휴식(2)’ 주기가 생긴다. 일과 휴식의 균형이 더 잡힌, 퇴직자 친화적 생활리듬이다.

* 한국 베이비붐세대의 막내(1963년생)인 박중언은 노년학(Gerontology)과 함께 고령사회 시스템과 서비스 전략을 연구 중이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편안하게 늙어가기를 지향한다. 블로그 ‘에이지프리’(AgeFree)를 운영했고, 시니어사업에도 몸담았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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