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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은 꽃이 아니라 나무다!
[CULTURE & BIZ] ‘승리 게이트’로 본 케이팝 산업 ③
[117호] 2020년 01월 01일 (수)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걸그룹 에이오에이(AOA)가 엠넷 프로그램 <퀸덤>의 제작 발표회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케이팝(K-Pop) 점검 시리즈 마지막 회다. 이제까지 케이팝 기업의 자금조달, 기업운영, 기획사형 케이팝의 탄생과 명암 등 외형적 측면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콘텐츠의 진정성 문제다. 케이팝 가사와 퍼포먼스에 담긴 상업성과 외모지상주의, 성적 대상화 등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지만, 논쟁의 장으로 올리는 순간 많은 모순과 부딪쳐야 해 선뜻 내놓지 못하고 묻어두고 싶었던 주제다.
케이팝은 오래전부터 성차별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걸그룹 노출 의상, 살인적 다이어트의 결과물인 깡마른 몸매, 섹시한 춤, 성형수술 관행 등은 아이돌 산업의 발흥과 함께 논란거리가 돼왔다. 특정 ‘스타’ 상품에 팬덤을 조성해 이익을 거두는 사업모델 특성에 비춰 ‘소녀’를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소비를 부추기는 일은 기본이었다. 허벅지를 드러낸 노출 의상을 입고 성적 연상으로 가득한 춤을 추는 걸그룹을 보며 즐거워하는 ‘삼촌 팬’들을 양산하기 위해 케이팝 산업은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미디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콘텐츠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특정 가치를 각인하는 특성이 있다. 성적 대상이 된 걸그룹, 강한 남성성으로 가득 찬 아이돌 모습은 고정된 성역할에 기반을 둔 가부장제 가치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예컨대 걸그룹은 종종 섹시하거나 순진하거나, 전위적이거나 복고적인 콘셉트로 변화한다. 이 과정에서 청순한 요정, 짧은 교복을 입은 소녀 등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모습이 반드시 포함된다.
못생긴 걸그룹이란 존재할 수 없고, 성형으로 얼굴뿐 아니라 몸매까지 완벽하게 변신해야 데뷔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애교’를 보이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던져야 진정한 대한민국 걸그룹이다. 하지만 이런 케이팝 스타 모습에 푹 빠져 즐기다보면 여성 차별적 이미지가 고착될 수밖에 없다.

케이팝과 성차별
실제 고려대 국제대학원 로버트 루돌프 교수 연구팀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케이팝에 친화적일수록 성평등 인식이 낮았다. 이 조사는 100개국 케이팝 팬 6317명을 대상으로 했다. 콘서트, 음원, 굿즈(기획 상품) 같은 케이팝 상품에 지출하는 금액과 성평등 인식 태도의 상관관계를 살폈다.
연구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케이팝에 호의적일수록 관련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것이므로 소비액으로 케이팝 친화성을 가늠했다. 성평등 인식은 고정 성역할을 나타내는 문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로 측정했다. “집안일이나 아이 돌보기는 여성이 남성보다 잘한다” “남편이 아내보다 돈을 덜 버는 것은 당황스럽다” “일할 때 남성이 주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같은 문장을 제시했다.
두 데이터를 연결해 분석한 결과, 케이팝 상품 소비액이 클수록 성평등 인식이 낮았다. 특히 성 불평등이 심한 나라에서 이런 상관관계가 더 뚜렷했다. 케이팝이 성차별 문화와 가부장적 성역할을 강화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때문에 ‘버닝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외국 언론이 케이팝 섹스 스캔들이 한국의 취약한 여성 현실과 관련 깊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케이팝으로 보여준 성차별 인식이 켜켜이 쌓여 성매매, 불법촬영, 성접대가 자연스러운 사회가 됐다는 분석이다. 요컨대 한국이 2013~2019년 7년 동안 줄곧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유리천장 지수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데는 케이팝 문화도 기여하고 있다는 논리다. 유리천장 지수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OECD 주요 회원국을 평가해 발표하는 성평등 지수다.

자본(Kapital)의 K?
한편에선 케이팝이 ‘문화산업’이라는 점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고도 이야기한다. 케이팝은 국외시장에 진출하고 수출을 늘리는 ‘산업’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문화’라는 가치도 담는다. 휴대전화와 자동차라면 제품이 튼튼한지, 가격경쟁력이 있는지, 디자인이 우수한지만 고민하면 될 터다. 하지만 문화상품은 산업·경제적 측면 외에 바람직한 가치를 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케이팝의 ‘진정성’이라고 일컫는 부분이다. 문제는 진정성과 산업적 가치가 병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엄하고 조신한 발라드 음악으로는 케이팝의 현재를 달성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국인 출신 사회학자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존 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석좌교수는 “적나라한 상업주의 산물인 케이팝에서 문화나 미학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차갑게 평가한다. 리 교수는 저서 <케이팝>에서 “케이팝에 붙은 ‘K’는 한국 문화나 전통보다 오히려 ‘Das Kapital’(자본론)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단언한다.
2015년 발간된 <케이팝>은 국내 문화사회학이나 대중음악 연구자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을 빚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과 문화 기억상실증과 경제혁신’이라는 책 부제에서 드러나듯, 존 리 석좌교수는 케이팝을 철저한 ‘수출 상품’으로만 평가한다. 그 안에 한국의 독창적 문화나 가치관은 없고, 오로지 이익을 향한 ‘문화 기술’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품에서 가치와 진정성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휴대전화, 자동차 같은 상품에서 진정성을 따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리 교수가 이처럼 냉정하게 평가한 것은 적어도 그의 시각에선 케이팝 안에 우리 정체성을 고민한 흔적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대중음악 전통을 훑어보아도 우리에겐 그런 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과거를 끊임없이 잊고 새 음악으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수출용 상품 케이팝이 탄생했다. 문화는 없고 오로지 산업적 접근만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많은 대중음악 연구자는 최근 방탄소년단(BTS) 성공에서 나타나듯, 단순히 상업적 목적으로 케이팝이 성과를 이룬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춤과 가사든, 팬과 교감하는 방식이든, 케이팝은 동시대인을 사로잡는 가치를 찾아내 성과를 이뤄냈다고 반박했다. 특히 새로운 유행을 발 빠르게 받아들여 기존 것과 섞는 능력이 케이팝의 진정한 장점이라고 했다. 케이팝 안에 우리 시대 가치관을 담아내고 이것을 세계인과 공감하도록 만드는 내용과 형식, 즉 ‘진정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 필요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 과정에서 공감을 저해하는 가치관이나 성차별 시선이 있다면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옳지 않은 편향과도 이별해야 한다. 어린 소녀의 허벅지와 눈웃음, 젊은 소년의 초콜릿 복근만으로는 계속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충분히 예견된다. 이미 세상도 저만치 변화하고 있다.

“요정은 지겹다”
최근 케이팝 프로그램 엠넷의 <퀸덤>을 인상 깊게 보았다. 마마무, 에이오에이(AOA), 아이들, 러블리즈, 오마이걸, 투애니원 출신 박봄 등 걸출한 걸그룹 여섯 팀이 경연해 순위를 다투는 프로그램이다.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걸그룹이 계급장 떼고 경연한다는 형태가 독특했다. 데뷔를 위한 서바이벌 경연과 달리, 각자 팬덤을 가진 팀이 자존심을 걸고 참가해야 한다. 예컨대 과거 문화방송 <나는 가수다>의 걸그룹 버전인 셈이다.
무엇보다 경연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모습이 새로웠다. 각 팀에 드리워진 고정 이미지에서 벗어나 과거 시도하지 않던 스타일에 도전했다. 경연에 참여한 팀은 무대를 구성하는 논의 과정에서 “이제 요정은 지겹다, 좀 다른 걸 해보자”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요정’과 ‘소녀’라는 천편일률적 걸그룹 이미지가 적어도 이들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는 게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런 노력 덕택에 멤버 설현의 미모가 전부인 것 같았던 에이오에이의 <너나 해> 같은 센세이션한 공연이 탄생하기도 했다. 고정적인 남녀 역할을 바꾼 무대 구성,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나는 나무야”라고 외치는 래퍼의 모습은 너무 통쾌했다. 다른 팀도 주술사, 군인, 무사 등 걸그룹에 금기로 여겨지던 강렬한 콘셉트를 선택하며 도전을 이어갔다. 신인이었다면, 혹은 수익과 바로 연결된다면 보여주기 힘든 장면이었다. 팬들도 그런 무대에서 어설프게 윙크하는 모습에 혹평하고, 고정 이미지를 크게 뛰어넘을수록 찬사를 보내며 달라지는 팬덤의 모습을 보여줬다.
어쩌면 세상을 등진 설리나 구하라 같은 걸그룹 멤버에게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제화된 여성상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는 그런 모습만 요구받는 이들이 가장 강하게 느꼈을 터다. 그들은 다르게 보일 기회를 끝내 얻지 못했거나 다른 선택을 하려다 조롱만 받고 슬픈 선택을 했을 수 있다. 세계적인 콘텐츠 그룹 디즈니는 순종적이고 인형 같은 여성이 아니라 역동적인 여성이 더 매력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를 변화시켰다. 콘텐츠 수익에서 가장 큰 원천은 ‘동시대의 공감’이라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20년 1월호

* 김윤지 연구위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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