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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가 빚어낸 아이돌의 빛과 그림자
[CULTURE & BIZ] ‘승리 게이트’로 본 케이팝 산업 ②
[115호] 2019년 11월 01일 (금)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그룹 빅뱅의 멤버들. YG는 소속 아이돌 그룹의 차별화를 위해 멤버들의 작곡 역량 등을 부각해왔다. 한겨레 자료
케이팝(K-Pop)에 쏟아지는 비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획사가 찍어내는 아이돌 공산품’이라는 평가다. 케이팝 성공요인으로 흔히 △‘칼군무’로 대표되는 역동적인 무대 구성 △춤·보컬·랩 등 필요한 역할을 각기 소화하는 멤버 시스템 △완벽한 외모 △발 빠른 세계 음악 흐름 반영 등을 꼽는다. 이들 요소는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기획사의 세심한 기획과 훈련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다.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가 H.O.T.로 아이돌 그룹의 원형을 만들어낸 뒤 많은 기획사가 믿고 따라온 공식이다.
성과는 좋았다. 덕분에 성공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공식을 답습하다보니 천편일률적 복제품이 넘쳐난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노래를 잘하는 메인 보컬 한두 명, 화려한 댄스를 보여주는 댄서 한두 명, 현란한 랩을 하는 래퍼 한두 명, 완벽한 외모 주자 1명, 방송용 재롱둥이 1명으로 구성해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군무를 추며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케이팝 퍼포먼스의 기원
여기서 잠깐, 왜 이런 ‘댄스’ 중심 그룹 음악이 케이팝 원형이 되었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을까. 케이팝이란 용어가 등장하기 전, 한국 가요계를 떠올려보면 댄스음악은 중심에서 살짝 비켜나 있었다. 저 멀리 최희준·패티김을 비롯해 1980년대를 주름잡은 ‘가왕’ 조용필, 발라드 시대를 연 이문세와 변진섭 등까지 한번 생각해보자. 가요계 대세는 곱게 서서 가창력을 뽐내는 가수들이 주도하는 멜로디 중심 음악이었다.
댄스 위주 음악이 한국 가요계 대세로 자리잡은 것은 1990년대 초반 ‘신세대 댄스가요’가 등장한 이후다. 음악을 전달하는 중심 매체가 라디오에서 TV로 넘어가면서 세계적으로도 ‘비디오형’ 음악이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안무는 대부분 노래를 뒷받침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안무가 중심이 되는 퍼포먼스형 음악이 가요계 대세로 자리잡았다. 그 강력한 전통이 케이팝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케이팝의 시대> 저자인 한국조지메이슨대학교 이규탁 교수는 한국 가요계의 수익 구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가수 수입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음원과 공연 수익이다. 외국 밴드는 공연 수익을 높이기 위해 음원을 무료로 배포할 정도로 공연 수익 비중이 크다. 반면 한국에서는 콘서트 등 유료 공연 시장이 크지 않다. 공연 수익이 많지 않은 것이다. 이를 대체하는 게 ‘행사’다. 학교 축제, 지역 축제, 기업 행사, 문화 행사 등에 출동해 외국 밴드들의 공연 수익만큼 거둬들인다.
한국 가요 시장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기를 계기로 크게 달라졌다. 이전에는 레코드나 테이프를 제작하는 음반사가 업계 중심이었다. 음반사에 소속된 가수는 밤무대나 나이트클럽 공연으로 모자라는 수입을 보전했다. 구제금융기를 거치면서 기존 음반사가 대거 몰락하고 기획사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기획사는 밤무대 수익을 줄여나갔다. 밤무대나 나이트클럽 공연은 수입도 많지 않고 불미스러운 일에도 연루되곤 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1990년대 중반부터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행사가 늘어났다. 기획사들은 밤무대 대신 각종 축제와 행사장을 돌며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연주나 음향 시설이 변변치 않은 행사 무대가 많다는 것이었다. 관객도 가수 중심으로 모인 게 아니어서 집중도가 떨어졌다. 무대에 오르는 가수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온 관객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빈약하고 산만한 환경에서 무대 장악력을 높이고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화려한 춤과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즉, 행사 의존도가 높은 구조에서 열악한 무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화려한 군무 중심의 케이팝이다. 특정 음악 장르가 부상한 배경에 경제와 정치제도적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퍼포먼스 중심 음악이 자리잡으면서 기획사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이전에는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수가 됐다. 하지만 퍼포먼스 중심으로 팀을 편성하려니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만큼 모으기 어려웠다. 더구나 10대 시장이 커지면서 더 어린 스타도 필요했다.
 
기획사 시스템 부산물
기획사들은 가능성 있는 청소년을 ‘연습생’ 형태로 선발한 뒤, 강도 높은 훈련을 거쳐 아이돌 그룹으로 거듭나게 했다. 훈련은 이전 세대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1990년대 등장한 많은 아이돌 그룹은 춤과 퍼포먼스에만 중심을 두다보니 노래 실력이 형편없었다. 노래도 못하면서 춤만 잘 추면 가수냐 하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기획사들은 한층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놓기 위해 더 많은 연습과 훈련을 하는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돌 실력도 크게 향상됐고, 현재 케이팝 경쟁력의 근간이 됐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노예계약’ 문제다. 연습생 기간은 짧으면 2~3년, 길면 5~6년이 넘곤 한다. 그 기간에 기획사는 연습생에게 레슨, 숙식, 성형수술 등을 제공하며 ‘훈육’에 들어간다. 제조업으로 치면 상품 기획·개발 기간인 셈이다. 이 과정에 가혹한 사생활 관리, 다이어트 관리도 더해진다. 한창 놀고 싶을 10대인 연습생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다. 최근 자주 거론되는 케이팝 연습생 인권침해 논란은 대부분 이 과정에서 비롯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 투자했기에 기획사로선 되도록 장기간 투자비 회수를 하려고 한다. 소속 가수와 계약 기간을 10년 이상으로 하거나 부당한 수익금 분배 비율을 담은 불평등 전속계약 등 노예계약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기획사는 본전 생각이 간절하고, 나이 어린 연습생과 데뷔 이전에 맺는 계약이라 불공정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노예계약 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돼온 탓에 많이 고쳐졌다. 계약 기간을 7년 이내로 제한하는 표준계약서가 도입됐다. 데뷔 뒤 수익에서 과거 투자 비용을 정산하지 못하게 하는 등 개선책도 생겼다. 하지만 오랜 연습 기간이 필수불가결한 현재 기획사 시스템에선 언제든 문제가 터져나올 수 있다.
기획사 시스템이 낳은 또 다른 부작용은 ‘천재 집착’ 현상이다. 고만고만한 청소년을 모아 그룹을 만들다보니 차별화가 쉽지 않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기획사 시스템은 실력이 다소 부족한 멤버라도 기획력과 안무, 디지털 기기의 힘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하지만 기획사 힘이 더해져 아이돌 그룹이 비슷비슷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트 매대에 제조사 이름만 다른 빵들이 진열된 셈이다. 제과회사 마케팅 기획자라면 어떤 점을 차별 포인트로 잡을 수 있을까? 아마도 더 좋은 재료, 예컨대 유기농 제품임을 내걸 수 있다. 기획사도 비슷했다. 자사 아이돌 경쟁력을 선전하려 멤버의 ‘천재성’을 부각했다. 작사·작곡 실력을 갖췄다거나 프로듀싱을 직접 했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아이돌이 아님을 강조했다.
 
차별화 전략의 그늘
이런 움직임은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에 맞춰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치열한 경쟁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사는 10대 팬에게는, 운이 좋아 기획사에 발탁돼 ‘만들어진’ 아이돌보다 타고난 음악성이 있는 ‘원석’ 아이돌이 주효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 선호와 청소년의 ‘공정’ 감수성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기획사가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였다. YG는 소속 가수를 ‘아티스트’라고 부르며 재능을 부각했다. 다른 기획사가 아이돌 멤버 외모와 퍼포먼스에 치중할 때, 모두 자작곡을 만드는 실력 있는 뮤지션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차별화를 했다. 시장 반응도 좋았다.
그에 따라 아이돌 멤버들 부담도 늘어났다. 예전에는 외모나 노래, 춤이 뛰어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젠 작곡 실력, 프로듀싱 능력, 음악성까지 요구한다. 천재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천재를 향한 갈망이 커졌다. 특출한 스타가 되고 싶은 아이들은 도움이 될 편법을 찾다 마약까지 손대는 일도 생겼다. 기획사가 찍어내는 공산품 아이돌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력과 천재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낳은 결과인 셈이다.
지난 10여 년간 케이팝은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압축성장 과정에서 여러 문제를 안았듯, 케이팝도 빠르게 성장하다보니 많은 부작용이 생겼다. 성공으로 가는 하나의 틀에 갇혀 다른 가능성을 버리고 한 스타일로만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이 갈망하는 직업군인 이들을 보호할 울타리가 튼튼한지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그사이 많은 문제가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 김윤지 연구위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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