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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불신의 시대’
[FINANCE] 미·일 주도 무역분쟁의 의미
[113호] 2019년 09월 01일 (일)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8월13일 펜실베이니아주 모나카의 셸 석유화학단지를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세계무역기구(WTO)가 개선되지 않으면 회원국에서 탈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REUTERS
세계사적 사건의 원인을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많은 요인이 섞여 생긴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분명히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경제적 곤경이었다. 당시 세계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후유증으로 매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국가가 개입하는 경제정책을 펼쳤고,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블록경제 정책을 택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안정적 글로벌 통화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모든 거래에서 매개체인 통화의 안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세계는 그런 통화를 갖지 못했다. 1930년대에 관세 부과와 무역장벽을 세우는 보호무역주의 일반화로 귀결됐다. 결과는 파멸이었다. 대공황은 불가피했다. 

역사의 교훈
대공황은 ‘불신’의 결과물이었다. 단순히 1929년 미국 주식시장 붕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1차 대전 뒤 각국 영토는 경제적 고려를 무시한 채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분할됐다. 기존 경제관계가 단절되고 새 무역장벽이 생겨났다. 전쟁 기간 이루어졌던 연합국 간 신용 제공 시스템이 중단된 것도 국제경제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외채는 주로 미국에서 영국을 거쳐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 공급됐다. 미국의 금융 지원이 중단되자 채무국의 경제 재건이 어려워졌다. 대대적인 신뢰, 신용시스템 붕괴는 전후 국제경제 질서에 큰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대공황 시기인 1930년 미국은 2만 개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실행했다. 점차 근대화하는 세계에 불만을 가졌던 농부를 보호한다는 게 명분이었다. 하지만 신뢰와 협력 대신 불신과 불화를 택해 세계를 공멸로 몰고 간 주범이었다. 모두가 패배자였다. 
 
미국 무역은 수년 뒤 반토막이 났고 국제 무역은 그보다 더 위축됐다. “상품이 국경을 넘지 않으면 군대가 넘는다”는 19세기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 말은 현실이 됐다. 불신은 긴 침체를 불러왔고, 신뢰와 회복은 폭력적인 2차 대전을 겪은 뒤에야 겨우 가능해졌다.
 
신용이란 말의 기원은 신뢰를 뜻하는 라틴어다. 신뢰와 신용은 그 뿌리가 같다. 신용처럼 신뢰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나,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20세기 세계는 신용과 신뢰가 정점을 찍었다가 붕괴하는 몇 번의 사이클을 겪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비롯해, 1970년대와 1990년대 말에 신뢰 정점은 마침내 무너졌다. 이 기간에 많은 국가가 ‘국가부도’(디폴트)에 처했다. 이는 모두 신뢰 대신 불신, 협력 대신 불화가 깊어지면서 발생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신뢰와 불신의 사이클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불고 있는 국가이기주의, 보호무역주의는 불신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기승을 부리고 마침내 세계는 과거로 퇴행할 위기에 놓였다. 최소한 앞으로 몇 년, 우린 지난 반세기와 다른 세계에서 살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세계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 혹은 그 이전에 선대가 경험했다. 바로 ‘불신의 시대’다. 안타깝지만 ‘신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노동자가 오하이오주 톨레도의 GM 공장에서 자동차 변속기를 조립하고 있다. GM은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관세 인상 등으로 2019년 10억달러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REUTERS
브레턴우즈 체제와 신뢰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세계는 불신을 거두고 신뢰를 쌓으려는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무너진 세계경제를 재건하려는 계획이 시작됐다. 미국 브레턴우즈에 44개 연합국 730명의 대표가 모였다. 국제금융 질서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1930년 이래 지속된 각국 통화가치의 불안정, 평가절하 경쟁, 무역거래 제한 등을 시정해 국제 무역을 확대하고 외환시장을 안정시키며, 동시에 국제수지 균형을 이루려 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는, 달러를 금과 연계하고 다른 나라 통화는 금이 아닌 달러 시세로 가치가 결정되는 금환본위제 도입이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제시한 초국가적 준비통화인 ‘방코르’ 도입은 무산됐지만 통화가치 안정, 무역 진흥, 개발도상국 개발, 환율 안정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진 것이다.
 
달러의 기축통화화가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케인스의 방코르가 이상적 해법일 수 있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미국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인류에겐 불행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 현실화하는 건 아니다. 최선도 아니었고, 가장 공정한 안도 아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목표가 완벽이 아닌 개선에 있었다는 점, 협력을 강화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진보였다. 이후 수십 년 세계는 브레턴우즈 체제 덕분에 번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약 20년 동안 잘 작동했다. 하지만 모든 체제가 그렇듯 균열은 불가피했다. 브레턴우즈 체제 역시 1960년대에 분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하면서 종말을 고한다. 이로써 2차 대전 뒤 세계 신뢰의 상징이었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막을 내린다. 고정환율제 시대가 저물고 변동환율제 시대가 시작된다. 
 
이는 진보였을까? 진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44년 이후 세계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브레턴우즈 체제를 고집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늘 세계는 그에 어울리는 새 시스템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시스템을 만들 ‘의지’와 ‘신뢰’가 있느냐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1950년대를 황금시대로 회상한다. 당시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율배반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번영의 시대를 원하지만 그 토대가 됐던 국경을 뛰어넘는 협력은 원하지 않는다. 자유무역으로 세계는 지속적 성장을 해왔고 인류는 굶주림에서 어느 정도 해방됐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더 이상 협력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국경 안에서 독립적으로 경제를 운영하려 한다. 
 
자국 국경 안에서 경제를 운용하려는 시도는 언제든 가능하다. 게다가 21세기 눈부신 기술혁신은 그 시도를 과거보다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한다. 기술은 소비자 근접 생산을 가능케 한다. 심지어 자원 빈국에서도 어느 정도 에너지 생산이 가능한 시대다. 지붕에 태양전지 패널만 설치하면 소비자가 에너지를 직접 생산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 이런 지역화는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생각보다 빨리 그런 시대가 올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 때문이다. 이들은 관세와 다른 무역장벽으로 변화를 앞당기고 있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지역화에 있지 않다. 철저한 자국우선주의, 아니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른바 패권국들의 이런 행태는 결국 지역화 속도를 높일 게 분명하다. 이들은 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했던 협력의 시대를 애써 외면한다. 해법을 찾기보다 조건을 정해 상대방이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그것이 강한 경제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다. 

자유무역의 적들
역사적으로 그런 방식은 정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엔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최근 금융위기를 그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던 힘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은 협력이었다. 그런데 2016년이 지나면서 신뢰 사이클은 깊은 골로 추락하고 있다. 트럼프의 승리는 불신이 승리한 것을 뜻한다. 심각한 점은, 자유무역 지지가 확고해지는 시기에 트럼프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승리와 브렉시트 결정 전까지만 해도 다자간 상호무역과 자유무역은 세계 곳곳에서 지지받았다. 트럼프 당선으로 이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자국우선주의를 토대로 하는 자유무역에 대한 적개심은 소리 없이 세계로 전염되고 있다. 유럽에선 보호무역을 옹호하는 극우정당들이 여전히 발호하고, 일본마저 한국에 수출규제를 단행하면서 자유무역 틀에서 이탈했다.
 
이제 세계는 증가하는 무역장벽과 보복성 무역전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세계경제에 중대한 리스크다. 인구고령화와 기술혁신으로 일자리 감소에 더해 보호무역주의 심화는 글로벌 성장을 악화할 게 틀림없다. 성장만 느려진다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자칫 세계는 대공황 때와 비슷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불황 중에도 물가가 계속 오르는 현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트럼프와 아베 정책은 자국은 물론 세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신뢰 대신 불신을, 협력보다 불화를 택한 결과는 모두의 공멸을 불러올 수 있다. 
 
분명한 건, 이 흐름이 일단 진행되면 당분간 지속된다는 점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인류 역사는 가끔 퇴행을 보인다. 오늘이 그렇다. 준비를 해야 한다. 격변기를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신뢰와 협력을 강화하는 길뿐이다. 불신과 단절에서 벗어나 신뢰와 협력을 하루라도 빨리 재건해내야 한다. 최소한 나라 안에서만이라도 이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고통스러운 시대가 끝났을 때 주인공이 될 수 있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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