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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이 사라진 이유
[FINANCE] ‘일본화’한 선진국 경제
[111호] 2019년 07월 01일 (월) 윤석천 maporiver@gmail.com
윤석천 경제평론가
 
   
▲ 2019년 6월9일 후쿠오카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한 아소 다로 일본 재무상(왼쪽)과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유럽 등 선진국의 일본화(Japanification)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현대 경제학을 낳은 서구가 일본화해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초저금리나 양적완화 등 오늘날 통화정책의 원산지는 모두 일본이다. 일본 경제는 지난 30여 년간 지속적인 침체나 저성장, 낮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겪어왔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쓴 방법이 완화적 통화정책, 팽창적 재정정책이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총체적 붕괴를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서구는 일본 통화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급속히 일본화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서구가 일본을 따라한 것은 통화정책만이 아니다. 일본 신용팽창을 통한 부동산 거품 역시 그대로 추종했다. 전후 일본 경제는 신화적 성장을 했다. 서구 리더에겐 충격적인 이벤트였다. 그들은 일본 경제 거품을 주의해야 할 경고등이 아니라 신경제로 인식했다. 결과는 뻔했다. 일본이 그랬듯 서구 또한 실패했다. 그것이 2008년 글로벌 신용위기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서구는 여전히 일본을 지향한다. 적어도 일본의 거대한 통화정책 실험이 아직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기초로, 또는 자신들은 일본보다 뛰어나기에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상 유례없는 완화적 통화정책에도 서구의 성장은 더디기만 하다.
 
일본과 서구 선진국이 마음껏 돈을 풀고 재정을 확대할 수 있는 근거는 인플레이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과도한 정부 지출과 그로 인한 부채 확대는 결국 인플레이션이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장기간 저금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당시 거시경제 이론은 인플레이션 방어에 집중됐다. 중앙은행의 강경한 매파적 자세가 당연시됐고, 때로는 금본위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인플레 심리 실종
오늘날은 어떤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정부 부채는 꾸준히 늘었다. 게다가 금융위기 이후 10년 이상 초저금리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분명히 인플레이션은 있었다. 일반 소비재가 아닌 자산시장에서 일어났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부동산과 주식시장 폭등세는 인플레이션이다. 그렇지만 완화적 통화·재정 정책으로 나타났던 전통적 의미의 인플레이션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소비 위축과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기술 발전이 생산원가를 내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럴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 억제의 주요 변수는 아니다.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먼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사라졌다. 금리와 인플레이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금리란 돈 혹은 유동성의 원가를 말한다. 그 원가는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즉 화폐가치 하락 리스크에 크게 영향받는다. 쉽게 설명하면,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높은 인플레이션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면 돈을 돌려받는 시점에선 그 가치는 하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당연히 화폐가치 하락을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는 높은 금리를 요구할 것이다. 이처럼 인플레이션은 금리를 높인다. 반면 낮은 인플레이션은 금리를 낮춘다. 이것이 2008년 이후 우리가 목격한 현실이다. 인플레이션이 좀처럼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금리를 낮추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허약해진 걸까. 바로 재정 확대나 저금리 체제가 완연한 성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정 확대를 통한 정부 부채 증가는 경제에 일시적 충격만 줄 뿐이라는 사실은 2008년 이후 일반화됐다. 예외적 통화팽창이 동시에 진행됐지만 비즈니스 환경이 약화하기만 해 결국 느린 성장으로 연결됐다. 그것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낮췄고, 장기금리가 하락한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도 주요 선진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가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해 재정을 확대하면 민간금융과 자본시장 자금이 국채로 쏠리게 된다. 이에 따라 시중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민간 자금조달이 힘들어진다. 결국 시장금리가 오른다. 간단히 말해, 신용도가 가장 높은 국가가 자본을 싹쓸이함으로써 민간 차입자가 쓸 수 있는 돈이 적어져 더 높은 금리를 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런데 이 효과는 과거 유물이 됐다. 적어도 최근 수십 년 동안 선진국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제대로 돌지 않는 돈
미국, 일본, 유로존, 영국에선 정부 부채가 늘었지만 국채 금리는 내렸다. 이것은 전통적 케인스학파 이론이나 거시경제 이론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부채를 토대로 한 재정 확대는 금리를 올린다는 이론이 들어맞지 않고 있다. 경제에 현금을 추가 투입했을 때 승수효과가 나타나고 성장이 가시화해야 마침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금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일단 현재 선진국에서 발행하는 신규 정부 부채는 민간이 매수하지만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로 다시 사들여 민간에 자금을 지원한다. 정부 부채를 추가 발행함으로써 민간 자금이 쪼그라드는 구축효과가 생기지 않는다. 또, 이미 부채 규모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에 추가로 돈을 투입해 재정을 확대해도 돈이 돌지 않는다. 한마디로, 부채로 인한 성장 유발 효과가 과거보다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어빙 피셔 교환방정식에 따르면, 통화량에 통화 유통속도를 곱하면 그 자체가 국내총생산(GDP)이 된다. 이 방정식에서 통화량은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지만 통화 유통속도는 그렇지 않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게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은 통화를 공급할 수는 있지만 유통속도를 조절할 수는 없다. 
 
중앙은행은 모든 거시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도구를 갖고 있지 않다. 경제가 새롭게 투입된 유동성을 생산적 활동에 이용하지 않으면 금융조건 완화는 별다른 기능을 못한다. 연준 통계에 따르면, 1953~83년 통화 유통속도는 평균 1.74였다. 2018년 4분기에는 1.4598이었다. 이는 194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중앙은행이 공급한 통화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 속도는 2000년 이후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이번에는 다를까
일시적 반등 국면이 있었으나 단기간에 그쳤고 지난 18년 동안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그 속도가 계속 떨어진다면, 어떤 종류의 중앙은행 자극책도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불어 통화 유통속도가 느려지면서 금리는 더욱 낮아진다. 돈을 공급하는 쪽에서는 어떻게든 통화 유통속도를 높이려 금리를 낮춘다. 하지만 그 돈은 소비와 미래의 투자에 쓰이는 대신 은행으로 되돌아간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로고프와 라인하트는 <이번엔 다르다>는 저서에서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모든 부채와 통화위기 결과는 동일했으며 앞으로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빠르게 늘어난 부채는 항상 금융위기로 연결됐다”는 게 책 결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이 주장과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미국, 영국, 유럽 등은 역사적으로 인정했던 수준 이상으로 정부 부채를 팽창시켰다. 금리는 제로를 넘어 마이너스 영역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이들 국가의 통화가치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수준이다. 
 
특정 통화와 통화표시 부채에 대한 국제적 수요가 가장 큰 원인이다. 글로벌화한 경제에서 잉여저축은 안전자산을 찾아 몰린다. 위기가 깊어질수록 이른바 기축통화와 해당국 부채에 돈이 집중된다. 이들 안전 통화는 엄청난 재정 적자에도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린다. 천문학적인 통화량 공급에 더해 부채 급증에도 안정적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고 로고프와 라인하트가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런 안정세가 언제까지 지속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일본 사례를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 안정세가 유지될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언제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라는 게 현실이 될까. 그것은 국가와 통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대중 혹은 투자자가 부채 증가는 영원히 지속할 수 없고 그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 ‘법화’가 무분별하게 발행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법화 남발은 더는 축복이 아닌 고통이 된다. 모든 특권은 영원할 수 없다. 돈을 마음껏 찍어낼 수 있는 특권 또한 마찬가지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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