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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시대의 지상명령 ‘생존하라!’
[CULTURE & BIZ] 좀비 블록버스터의 인기 비결
[110호] 2019년 06월 01일 (토)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중국 대표 블록버스터 영화 <유랑지구>의 티저 포스터

역사적으로 ‘종말’은 사람의 흥미를 끄는 요소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멸망한다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최고의 재앙이 될 것이다. 또 나는 과연 그 종말의 시기를 어떻게 맞이할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생존은 인류를 떠나 모든 생물종이 공통적으로 지닌 본능이다.

종말의 시대
많은 콘텐츠 제작자는 이런 사람들의 본능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영화와 드라마 같은 콘텐츠가 나온 20세기 들어서는 일상이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파괴되는 것을 사람들이 ‘즐기기’ 시작했다. 실제가 아닌 대중문화로 다양한 형태의 재난이 인류와 지구를 덮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938년 영화 <시민 케인>으로 유명한 오슨 웰스의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에서 화성인의 지구 침공을 실제 상황으로 착각해 공황이 일어났고, 거대한 유인원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기어올라가 아름다운 도시 뉴욕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이후 허리케인·토네이도·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좀비까지 다양한 종류의 재난이 대중문화를 통해 세상을 쉴 새 없이 ‘멸망’시켜왔다. 이렇게 일상을 파괴하는 재난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화나 텔레비전(TV)의 역사와 맥을 함께하며 재난물 장르로 발전했다. 이런 영상물은 흔히 아포칼립스(Apocalypse) 장르로 분류된다.

아포칼립스란 그리스어로 ‘계시’를 뜻한다. 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을 지칭하는 단어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 예수 재림 시기에 펼쳐질 인류의 종말과 구원에 대한 미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아포칼립스는 ‘종말’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은 대부분 내용이 비유적인 계시와 환상 묘사로 가득해,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주류 종교로 2천 년 넘게 세계의 한 축을 지탱해오는 동안 종말의 각종 상징은 사람들 상상력과 결합해 우리 문화에 녹아들었다.

대중문화가 번성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는 종교 관점을 벗어나 콘텐츠 관점에서 차용됐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암울한 주제는 종교적 경고와 깨우침을 떠나 대중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포칼립스는 수많은 장르문학과 대중문화의 인기 주제가 됐다.

과거 아포칼립스 장르 콘텐츠에서 종말의 원인은 다양했다. 재미있는 점은, 종말의 원인이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냉전 시대 가장 인기 있던 종말 시나리오는 핵전쟁으로 인한 지구 멸망이었다. 당시에는 핵전쟁 공포가 세계를 지배했기에 관객 몰입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20세기 말 냉전이 끝나자 나타난 것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이다. 에볼라바이러스 공포가 세계를 휩쓸 무렵 나타나기 시작한 치료할 수 없는 미지의 괴사 바이러스 시나리오도 대중을 끌어들였다. 20세기 중·후반, 초기 아포칼립스 장르는 제작 기술의 한계로 대부분 특정 지역에 국한됐다. 그래픽 기술이 발달해 실감 나는 재난의 구현이 가능해지면서 재난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더 큰 자극을 원하는 대중 욕구에 맞춰 최근에는 빙하기와 모든 게 얼어붙는 범지구적 재난뿐 아니라 우주 생물체의 반을 소멸시키는 범우주적 재난까지 확대됐다. 그러다보니 이제 종말 자체는 식상해졌다. 새 콘텐츠는 종말 이후 인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다.

   
▲ 사극 좀비물을 표방한 넷플릭스의 <킹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인기
종말 이후 세계를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최근 영화, 게임, 드라마를 막론하고 인기를 끄는 장르 중 하나다. <매드맥스> <혹성탈출> <워터월드> 같은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 이어 <워킹데드> <원헌드레드> 같은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얻어 새로운 시즌을 제작하고 있다.

게임에서도 <폴아웃> 시리즈나 <데이즈>(DayZ)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팔렸다. 이런 게임은 게이머가 종말 이후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방사능으로 변이된 괴물이나 좀비로부터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생존게임’이라는 하위 장르로도 발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개봉해 역대 2위 흥행 성적을 거두고 공상과학(SF) 영화의 본고장인 북미에서도 기록적 흥행을 이어간 중국 영화 <유랑지구>도 이 장르에 해당한다. 태양이 기능을 잃고 그 때문에 인류가 멸망한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근 이 장르의 인기를 이끄는 것은 좀비물이다. 애초 부두교 전설에서 유래한 괴물인 좀비는 주술로 움직이는 시체를 뜻한다. 반쯤 썩은 육신에 인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괴물이다. 1970년대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B급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B급 문화의 상징이던 좀비가 2000년대 이후 블록버스터 자본과 결합하면서 일약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주류로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은 좀비가 되고, 좀비에게 물린 사람도 좀비가 된다. 결국 세계는 좀비로 가득 찬다는 좀비 콘텐츠의 클리셰는 영화 <28일 후> <새벽의 저주>, TV 드라마 <워킹데드> <Z네이션>을 관통한다. 한국에서도 천만 관객을 모은 <부산행>이나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킹덤>, 게임 <바이오해저드> <라이프애프터>까지 좀비물이 좀비떼처럼 대중문화 시장을 휩쓸고 있다.

미국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좀비 아포칼립스 콘텐츠의 인기몰이에 대해 2001년에 일어난 9·11 동시다발 테러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의 아침에 TV에서 미국의 상징이던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돌진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 미국민은 더는 자신의 일상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람이 테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이 이슬람포비아 같은 특정 집단에 대한 공포감으로 나타났다. 이런 공포감이 좀비떼 출현이라는 재앙에 투영됐다는 것이다. 실제 좀비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번성한 것이 2001년 이후였던 것을 보면 이런 분석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을까 싶다.

9·11 테러부터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현재의 세계적 불황을 거치는 동안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는 대중문화 주류로 떠올랐다. 좀비물이 B급 공포물에서 블록버스터로 진화하고 흥행몰이를 계속하자 좀비 아포칼립스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나왔다. 좀비를 단순히 공상 속 괴물이 아니라, 현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경향이 투영된 사회학적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보며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걷는 사람을 ‘스마트폰 좀비’라고 부른다. 또 금융 시스템에 장악당해 막대한 집 대출금을 갚으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가득한 현대사회를 ‘좀비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인다. 이처럼 살아 있지만 사는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하루를 보내거나,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을 좀비에 투영하고 있다.

초기 좀비 콘텐츠에서는 미지의 부두교 주술에 대한 원시적 공포를 다뤘다. 무차별적으로 감염되고 이후 다시 인간을 공격해 확산되는 좀비의 공포감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최근 좀비 콘텐츠에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요소가 더욱 결합돼 있다. 좀비 자체보다 좀비가 만들어낸 ‘종말 이후’ 세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서로에 대한 공포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최근 인기를 끄는 좀비 게임의 광고 문구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좀비도 무섭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살아남은 당신과 같은 인간입니다.”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피로감과 힘든 현실로 인한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좀비물을 포함해 최근 인기를 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작품은 이런 불안한 시대의 산물이다. 사람들이 이런 장르를 즐기는 배경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무력한’ 좀비를 무차별 폭력으로 죽이는 장면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정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장르가 주는 한결같은 메시지도 그 인기에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떻게든 무엇을 해서든 살아남아라! 그것이 좀비물을 포함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작품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주제다. ‘생존하라’는 짧고 단순한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 문동열은 영상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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