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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에고이스트
[People] 샤넬의 전설, 카를 라거펠트- ① 업적
[108호] 2019년 04월 01일 (월) 토비아스 베커 등 economyinsight@hani.co.kr

그는 스스로를 창조하고, 허구의 인물로 만들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다. 시대의 기념비, 모순의 기념탑. 세인의 주목을 받는 것을 즐기면서도, 고양이 한 마리하고만 동거한 남자. 알 수 없는 사람. 바로 카를 라거펠트다. 


토비아스 베커 Tobias Becker 울리히 피히트너 Ullrich Fichtner 로타르 고리스 Lothar Gorris 알렉산더 퀸 Alexander Kühn 브리타 잔트베르크 Britta Sandberg 클라우디아 포크트 Claudia Voigt <슈피겔> 기자

 

 

▲ 독일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2018년 11월22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진행된 크리스마스 조명 점등식에 참석했다.REUTERS

 

그가 마지막으로 파리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8년 11월 말 샹젤리제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조명 점등식이 있을 때였다. 파리의 첫 여성 시장 안 이달고도 참가한 이 행사는 프랑스 수도에서 열리는 오래된 작은 이벤트다. 파리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이 행사의 스폰서는 샤넬이었다.

이날 밤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슬픈 사진이다. 언제나처럼 옷깃이 높은 흰색 셔츠, 검은색 넥타이, 선글라스, 손가락 없는 장갑, 뒤로 묶은 흰머리 차림의 라거펠트는 약간 늙고, 살이 찐데다 하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몇몇 사진에서는 군데군데 빠지고 일부 망가진 그의 치열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정말 라거펠트인가? 완벽한 모습의 그가 부랑자 같은 치아를 하고 있다니.

그 사진은 사실 말기 암 환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라거펠트가 사망한 직후 프랑스 언론은 그가 췌장암을 앓고 있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췌장암은 희생자에게 시간과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무자비한 살인자다. 라거펠트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날 밤 라거펠트의 등장은 일종의 발표이자 이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봐라. 나는 아프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 

라거펠트는 평생 완벽과 초탈의 가면 뒤에 숨어 지냈다. 이 가면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고, 그를 우연히 록그룹에 끼어든 18세기 귀족으로 변신시켜주었다. 언젠가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캐리커처다. 나에게는 1년 내내 축제 기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샹젤리제 거리에서 죽음을 직면한 그는 “이제 바보짓은 그만”이라며 스스로 가면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의 삶은 훗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수없이 많은 해석이 나올 것이다. 2018년 10월 샤넬 쇼에서 라거펠트는 흔들리는 다리와 갑자기 늙어 보이는 얼굴에도,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박수를 받았다. 이 또한 라거펠트가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장면으로 판단된다. 샤넬 소유주인 베르트하이머 가족이 쇼에 나타난 것도 그 맥락으로 인식된다. 

 

나는 아주 심플하다

2019년 초 샤넬의 오트쿠튀르(Haute Couture·매년 1월과 7월 파리에서 열리는 고급 맞춤복 박람회) 쇼를 위해 그랑팔레가 할리우드 영화 같은 무대로 바뀌고, 라거펠트가 다른 패션쇼와 마찬가지로 패션의 제례의식을 올리던 날, 그는 예고와 달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5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다. 거대한 부재였다.

올해 85살이 된 전설적인 뉴욕 패션 평론가 수지 멘키스는 1970년대 후반부터 라거펠트와 알고 지냈다. 그녀는 이날 저녁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 라거펠트 집을 방문했다. “내가 가려고 하자, 그가 걷기가 힘들어서 배웅을 못한다며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녀는 라거펠트가 집에서 쇼를 지휘했고, 쇼가 열리기 직전까지 재봉사들에게 전화해 바꿔야 할 사항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대중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중에야 라거펠트가 너무 지쳐 쇼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2015년 <슈피겔>과 마지막으로 한 인터뷰에서 당시 81살이던 그는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질문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수십 년을 보냈어도 젊은 시절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 전형적이고 기묘한 코맹맹이 소리 나는 독일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주 심플하다. 내 인생은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그리고 그는 구스타프 말러가 곡을 붙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구를 읊었다. “나는 세상에서 잊혔네.”(Ich bin der Welt abhandengekommen.)

1990년 샤넬에서 선보인 남성 향수에 라거펠트는 ‘에고이스트’(Égoïste)라는 매우 자전적인 이름을 붙였다. 그는 자주 자신이 책임을 피하고 싶어 하는 에고이스트라고 말했다. 이 말도 라거펠트가 무슨 말을 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진지하지 않았다.

 

▲ 2003년 10월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4년 봄 여성의류 컬렉션의 피날레 무대에서 라거펠트가 모델들과 함께 무대를 걸어나오고 있다.REUTERS

삶의 중추였던 패션 디자인

이제 그는 영원히 떠났다. ‘카를 대제 마지막 황제, 자유의 천재, 프랑스의 신, 천사들은 이제 샤넬을 입는다.’ 일간지 기자들이 그가 별세한 날 쓴 헤드라인이었다. 약간 거리감이 느껴진다. 존경심이 가득하지만 어딘지 소원하다. 어떤 의미에서 사진과 영상, 음향과 텍스트로 그의 삶이 잘 기록돼 있지만 여전히 파악하기 힘들고, 위대하지만 그만큼 수수께끼 같은 사람, 저 헤드라인은 카를 라거펠트에 대한 일종의 항복이다. 라거펠트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드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슈피겔> 인터뷰에서 “그것이 패션업계”라고 말했다. “우리는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정반대 소리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좋다. 현실이야말로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바람을 판매할 뿐이다. 내가 한 말 중에서 6개월 이상 유효한 것은 없다.” 

에고이스트, 아웃사이더, 원맨쇼 광인이자 창조적 천재, 무엇이든 아는 척하는 사람,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 혐오자, 가면, 만화 주인공, 몽상가, 돈과 뮤즈의 남자, 그에게 가해지는 모든 빠르고 작은 모욕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세상 지식을 탐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남자. 18세기 휴머니즘을 좋아하면서 현대 PC(정치적 공정함)를 경멸했던 독일인답지 않은 독일인 니체를 읽고, 히잡을 증오한 늙은 백발의 동성애자. 공개적으로 수영하는 것을 즐기고, 아파트에 고양이 한 마리하고만 삶을 공유했던 남자.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때로는 조금 미워했던 아들. 

시대의 기념비, 모순의 기념탑. 20세기의 번쩍거리고, 무례하고, 불공평하고, 감성적이고, 흥미로웠던 사람. 그의 화폐는 아이디어와 직감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을 가진 시대정신의 극단적인 탐미주의자였고, 평생 아이디어에서 아이디어로 돌진했다. 일에서 그의 헌신은 끝이 없었다. 일이야말로 그의 삶에서 중추였다.  

무엇보다 이것은 그를 고용한 패션하우스와 회사의 성공을 위한 연료였다. 샤넬 소유주인 베르트하이머 형제는 매년 라거펠트의 쇼를 위해 수백만유로 비용을 치렀지만, 참을성 있게 견뎠다. 65년간 카를 라거펠트는 패션업계에 헌신했다.  

 

발망 견습 디자이너로 입문

그는 1950년대 중반 발망에서 견습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 뒤 여기저기서 일하다가 클로에 수석디자이너가 됐고, 이후 펜디와 샤넬 수석디자이너로 부임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브랜드를 위해 일했다. 2017년까지 그는 총 14회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14회 컬렉션은 수천 개의 아이디어가 묶여 탄생했다. 또한 일찍부터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개발했다. 그 때문에 각종 라거펠트 컬렉션과 회사 구조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아마 라거펠트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 이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은 항상 동일했다. 그는 아이디어를 내고, 생산·유통 같은 귀찮고 지루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라거펠트는 소수의 믿을 수 있는 직원과 함께 자기 소유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을 했다. 이들은 직원이라기보다 지인에 가까웠다. 그는 큰돈을 주면 빌릴 수 있는 ‘고용할 수 있는 총잡이’(용병)였다. 그다지 까다롭게 고르지 않고 오펠, 푸마, H&M 등의 회사를 위해 일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협업이 대부분 성공했다는 것이다. 2018년 샤넬에서 공개한 통계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매출 840억유로(약 107조790억원). 순수익 160억유로. 그전 몇 년간 샤넬 사정이 어려웠다고 한다. 샤넬 소유주 알랭 베르트하이머와 제라드 베르트하이머는 프랑스 10대 부자에 포함돼 있다. 

라거펠트가 돈 버는 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버는 것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의 재산은 약 4억유로(약 5천억원)로 추정된다. 그는 프랑스 브르타뉴에 성이 있었고, 모나코 휴양도시 몬테카를로와 로마에 거처를 마련해두었으며, 미국 버몬트주의 한 섬에 도피처를 갖고 있었다. 2012년, 2년6개월에 걸친 개조 공사가 끝난 뒤 파리에 있는 아파트에 입주했을 때, 그는 유명 건축잡지 <아키텍추얼 다이제스트>에 아파트 내부 사진을 공개했다. 흰색, 회색, 은회색으로 꾸며진 아파트는 최고의 아름다움이 담긴 냉장고처럼 보였다. 

 

▲ 2018년 3월6일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 기간 그랑팔레에서 열린 샤넬 패션쇼. 카를 라거펠트의 작품이다.REUTERS

탈세 의혹 있기도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의 브랜드를 계속 팔았다. 1992년 던힐그룹은 카를 라거펠트와 KL 라인에 4700만마르크를 지급했다. 3년 전 한 프랑스 잡지에서 라거펠트의 탈세 의혹을 보도했다. 그가 프랑스 세무 당국 눈을 피해 아일랜드, 영국,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미국 등에서 복잡한 거래를 하며 2천만유로 이상 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로 그가 찍은 사진으로 거둔 수익이었다. 당시 한 독일 일간지 기자가 이것에 대해 묻자, 그는 걱정 없는 태도를 보였다. “어떤 이유로든 추가 납부할 세금이 있다면 낼 것이다. 어차피 매년 수백만유로 세금을 내고 있다.”

그의 패션 자체만 보자면 코코 샤넬, 이브 생로랑과 달리 클래식 아이템을 남기지 못했다. 블랙 미니드레스(코코 샤넬 작품)도, 여성을 위한 턱시도 슈트(르스모킹, 이브 생로랑 걸작, 두 작품은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미침)도 없었다. 라거펠트는 패션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현대적 감각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모더나이저(Modernizr)에 가까웠다. 특히 샤넬에서 그는 코코 샤넬이 세운 전통을 이어나갔다. 현대화·고급화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숙련된 솜씨로 만든 최고 제품을 선보였지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은 드물다.  

1980년대 초 명품 브랜드 샤넬은 과거의 신전으로 여겨졌다. 19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코코 샤넬은 87살 나이로 샤넬 디자인을 책임졌다. 이후 샤넬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10년 이상 잠들어 있었다. 라거펠트는 샤넬 브랜드를 망치지 않으면서 경신하는 데 필요한 전통 의식, 현대성과 넘치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었다. 코코 샤넬 같은 패션 창조자를 넘어서려 하지 않고, 그녀의 작품을 존중하고 받아들인 뒤, 자신의 아이디어를 접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려면 어느 정도 성숙함이 필요하다. 

 

▲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와 실비아 벤투리니가 2018년 7월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펜디의 오트쿠튀르 컬렉션 쇼 마지막에 나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REUTERS

그 자신이 위대한 디자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감지하고 정의하는 것은 오래된 가족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옷깃 크기, 치마 모양, 블라우스 소재, 자수 사용이나 생략, 가장자리 장식, 무늬, 색상, 신발. 이는 한 세대와 그 시절 생활 감성을 보여주는 표시물이다. 디자이너는 수천 개 소스와 문헌, 행인 관찰, 무대 의상 제작자 작품, 그들의 역사적 토대, 인스타그램 사진, 인플루언서(영향력 있는 사람) 사이트의 흐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오트쿠튀르에서 라거펠트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총감독이었다. 이브 생로랑은 죽었고, 존 갈리아노는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추락했다. 톰 포드는 항상 무언가 부족했고, 크리스티앙 라크루아는 일관성이 없었다. 결국 패션업계는 라거펠트와 그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는 샤넬의 오트쿠튀르를 위해 유행에 관한 기초 연구를 했다. 결론적으로 샤넬 전통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흑과 백이 선택됐다. 색상 없이 패션을 디자인하려면 디자이너는 재단과 소재, 선과 프레임, 포인트에 집중해야 한다. 명품 패션이 추상 예술이 되는 것이다.

2018년 샤넬 패션쇼가 열리기 직전 준비 기간 7일을 촬영한 다큐멘터리가 있다. 일종의 카운트다운이다. 내용 중에 모델들이 라거펠트에게 새 의상을 보여주고 그가 최종 감수하는 장면이 있다. 테이블 뒤에 자리잡은 그의 옆에는 여성 기자가 앉아 있고, 주변에선 조수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끊임없이 코멘트가 이어졌다. “훌륭해요. 환상적이에요. 나는 그걸 이미 사랑하고 있어. 꿈 같아요. 색상이 정말 아름다워요. 저 옷 가격을 생각하면 특별한 것이어야지.” 모두 옳은 말이다. 하지만 라거펠트의 가장 위대한 디자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 2019년 4월호 종이잡지 24쪽에 실렸습니다.

ⓒ Der Spiegel 2019년 9호

L’Égoïste

번역 황수경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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