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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소외'에 베팅하는 국가
[In-depth]
[8호] 2010년 12월 01일 (수) 페터 슬로터다이크 economyinsight@hani.co.kr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철학자·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조형전문대 총장

정치가와 정치학자는, 현대 국가의 상황에 대해 걱정할 때면 고대 로마 시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기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이 자신이 보기에 과잉 복지국가인 조국을 비판하기 위해, 지금 상황을 로마 시대 데카당스(퇴폐주의)의 몰락과 비교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검투사 경기로 평민을 통제한 로마 황제 시대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을지 모른다. 아니면 당시 실업자들을 위한 의례적인 곡물 기부에 대해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두 가지 모두 1961년생(베스터벨레 외무장관도 61년생) 독일 인문계 고등학생 대다수가 배웠던 조잡한 역사 교육의 메아리다. 당시 역사 교육에는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독일 정치가의 입에서 나온 로마의 퇴폐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교육 부족에 대한 증거 이상의 의미가 있다. 또 특정 집단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내뱉는 무모한 언행으로만 볼 일도 아니다. 만약 제대로 인식했다면 의심할 바 없이 언급을 피했을 위험한 뜻이 포함됐다.

고대 유럽에서 ‘공공’(公共)은 특이한 열정의 폭풍과 함께 시작됐다. 로마 에트루리아 왕조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퍼부스 주니어는, 젊은 로마 여성 ‘루크레티아’의 남편이 아내의 아름다움과 정숙함을 자랑하는 것을 들은 뒤 루크레티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신하가 왕인 자신보다 더 행복한 성생활을 누리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머지 이야기는 리비우스에 의해 세계사가 되었고, 셰익스피어를 통해 세계문학이 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루크레티아의 방에 침입해 그녀를 겁탈한다. 루크레티아는 친척을 불러모아 이 사실을 고백한 뒤 이들 앞에서 가슴에 비수를 꽂아 자결한다. 이에 경악한 로마의 순박한 목동과 농부들은 혁명 군중으로 돌변했다. 타르퀴니우스 수퍼부스는 추방됐고, 에트루리아 왕조는 막을 내렸다. 왕정 시대가 가고 공화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 

   
<루크레티아의 죽음>, 제롬 프뢰돔, 1784.

시민의 분노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상이 만들어졌다. 오직 로마 시민에 의해 실용적이고 비종교적으로 통치되는 것이다. 두 명의 집정관은 서로를 견제하고 연례 선거를 통해 직위와 그 직위에 있는 사람을 혼동하는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한다. 이에 따라 기원전 509년 인류 역사상 가장 현명하게 조직된 공화적 기구가 출범했다. 그 뒤 호민관 제도가 추가돼 이 기구는 최고의 효율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 성공 스토리는 500년 뒤 로마 권력 구조의 확대가 신군주적 상태로 변질될 때까지 이어졌다.

“정치는 시민의 자존심에서 기원”
루크레티아 전설은 분개의 정신에서 탄생한 공화국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나중에 사람들이 ‘공공’이라고 칭하게 되는 것은 처음엔 시민의 분노에서 시작됐다. 군중의 불만으로 최초의 집회가 생겨났다. 첫째 의제는 단 한 가지, 불명예에 대한 거부였다. 권력자의 끝없는 교만에 대한 분노를 통해 민중은 그들이 앞으로 ‘시민’이라고 칭해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공적 생활’이라고 일컫는 모든 것은, 예의를 짓밟는 행위에 대한 시민의 분노였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날 ‘정치’라고 칭하는 것은 명예심, 즉 평범한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인한 움직임에서 시작됐다. 자존심과 관련된 흥분을 표현하는 말로 유럽의 오래된 전통적 개념인 ‘티모스’(Thymos)가 있다. 티모스에 속하는 인간 감성은 즐거움·선의·관용에서부터 자존심·야망·도전, 그리고 불쾌함·분노·원한·증오·멸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정치 공동체가 자존심으로 움직이는 동안엔 명예와 위신의 문제가 대중의 주요 관심사다. 시민의 존엄에 대한 불가침성은 최고의 가치다.

이제 우리 시대를 로마시대의 퇴폐와 비교하는 것이 왜 그리 좋지 못한 생각인지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프랑스 혁명의 분노로 탄생한 현대의 공화국에도 언젠가는 포스트 공화국 시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공포에 동의한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포스트 공화국 역시 전형적인 빵과 유희의 공존이라는, 다시 말해 복지국가와 선정적 산업의 시너지 효과로 운영되는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조짐이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행정과 엔터테인먼트의 공공성 쇠퇴를 말해주는 징조를 읽고 있지 않았던가? 영국에서 탄생한 ‘포스트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 그러니까 정치 엘리트의 뛰어난 능력을 통해 시민 참여를 생략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 은근슬쩍 사회학 세미나를 이미 정복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포스트 민주주의 성향이 이미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2의 포스트 공화국’ 상태의 시민 소외가 고대 로마에서 황제 정권이 설립된 이후처럼 아무런 문제 없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판이다. 자신감 넘치고, 정보에 밝으며, 함께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시민이 다시 무대 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 정치체제가 자신의 관심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한다.

수동적 시민을 짝사랑하는 정치가
분개할 줄 아는 시민, 그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리비도(인간의 본능적 욕구, 성욕) 덩어리로 치부하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 자기 주장을 지켜내고, 공공장소에서 논쟁을 벌인다. 이 ‘불편한’ 시민들은 ‘정치적 잡식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헌법 제2조 제2항 ‘국가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가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생각을 한다.

   
'슈투트가르트 21'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독일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대중은 왜 주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고 나선 것일까? 그들이 갑자기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일까? 대표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다. 이 때문에 시민은 긴 간격을 두고 선거권을 행사하도록 초대받는다. 선거 이외의 기간에는 수동적이어야 쓸모가 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침묵을 통해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뢰가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전문가들은 정치인에게 필요한 ‘대중의 탈정치화’가 거의 실패했다는 가혹한 진단을 내리는 걸 꺼린다. 황제 시대의 로마는 포스트 퇴폐주의의 확실한 징후가 보였음에도 제국의 엘리트들이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대중의 탈정치화’라는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비교한다면 독일 정치집단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시민들이 자신의 비참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다. 여론 전문가들은 정부 활동에 대한 시민의 반응을 ‘경멸’이라는 단어로 자주 말한다. 이 표현이 티모스 분석의 기본 어휘에 속한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단어가 지금처럼 자주 격렬하게 사용되고 있다면, 공동체의 정치심리학적 조정이 매우 잘못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통치자들이 시민의 경멸에 경멸로 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갑지 않은 반체제 시민들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는 거대한 경찰 병력과 모욕으로 맞섰다. “직업 데모꾼, 취미 무정부주의자, 기분파 민주주의자, 노인성 이기주의자, 복지 부랑자!” 이런 말로 국가 주도의 거대 프로젝트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수만 명의 사람을 모욕했다. 쇼크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니 용서해줘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이런 정치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 덕에 우리는 그들이 시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이상하게도 일부 언론은 궁지에 몰린 정치가들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 이들 언론은 새로운 저항세력을 ‘분노시민’이라고 명명했다. 만일 분노와 공화국의 원초적 관계를 생각하고 만든 것이라면 현명한 칭호였겠지만, 불행히도 이 명칭은 귀찮은 ‘반체제 파리’들을 쫓아버리기 위해서만 사용하고 있다.

슈투트가르트의 새 기차역 건설 계획의 모순을 발견하고 결연하게 나선 시민들에게 겁먹은 정부는 타격봉과 최루가스로 답했다. 독일 이민정책의 모순을 비판하고 유전적 요소를 내세운 차별 시도를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한 당원에게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제명으로 대응했다.

채권자를 채무자로 만든 정치인이여… 
독일 정계의 이런 둔감함은 정치 시스템과 그 모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로마 황제들은 시민을 소외시킴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을  쉽게 해냈지만, 현대의 대표민주주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현대의 정치가들이 시민을 소외시키는 방법은 딱 두 가지가 있다. 경제적 파산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선물을 줘서 침묵하게 만드는 방법과, 정치를 포기하게 만들어 시민사회를 마비시키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선물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현재 진행되는 국가 지급 양육비에 관한 논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런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좋은 정부 아래에서 표출되는 만족감과 비슷하게 보인다. 차이점이라면 “저 위에 있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다 똑같다”는 불평 정도다.

실망감을 불러일으켜 시민을 소외시키는 방법은 불장난과 같다. 의도와는 달리 이는 언제라도 공개적인 분노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분노는 쉽게 가라앉힐 수 없다. 현대의 정치집단이 시민 ‘소외’를 시민 ‘참여’로 치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일 시민들은 납세자의 권리에서 소외돼 있다. 시민들이 국가재정을 위해 돈을 내놓는 순간 현대 국가는 그들을 공공재정의 엄청난 빚을 평생에 걸쳐 나눠서 갚아야 하는 채무자로 만들어버렸다. 집단적 채무자가 된 이들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빚을 갚아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시민에게 지우는 짐이다.

공동체를 위한 유토피아가 아직 하나 남아 있긴 하다. 만일 우리에게 행운이 깃들고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면 마지막에는 국가 파산을 피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투기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가장 위험한 투기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민의 수동성에 도박을 걸고 있는 국가적 투기다. 정치인들은 민중이 알고 있는 것을 대변하라는 요구를 지속적으로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지금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가 실패로 끝난 뒤에도 유럽 시민들은 정치보다는 크리스마스 쇼핑에 더 관심을 둔다.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온 ‘대표자’를 상징적으로라도 처벌하는 대신에 자신의 쇼핑백을 채우는 데 몰두했다.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도박이 언젠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지털 문화 시대에 어떤 정부도 시민의 분노 앞에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노가 역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면 새로운 정치 참여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니체와 하이데거에 이어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불린다. 지난 2004년 방한해 세계화를 주제로 강연한 바 있다. 저서로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1999), <당신의 삶을 바꿔야 한다>(2009) 등이 있다.

ⓒ Der Spiegel
번역 황수경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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