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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은 지구촌 길 위에서
[박중언의 노후경제학]
[107호] 2019년 03월 01일 (금) 박중언 parkje@hani.co.kr
박중언 부편집장
 
   
▲ 미국의 제재 부활로 어려움을 겪는 이란을 최근 방문한 C씨가 이스파한의 카페에서 젊은 여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C씨 제공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퇴직을 앞둔 중년이건, 이미 퇴직한 사람이건 공통적 고민이다. 60살 정년까지 채워 회사를 다녔더라도 이후 이삼십 년을 놀면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도 일의 성격과 종류에 관계없이 뭔가는 해야 무시로 찾아오는 삶의 무의미함과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머릿속으로 많은 것을 떠올려보지만 이거다 하는 확실한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숱한 밤을 뒤척거리고, 문득문득 잠에서 깨기도 한다. 젊은 날에도 꼭 맞는 일을 찾기 쉽지 않았는데 그 문이 훨씬 좁아진 중년에겐 고민의 무게가 한층 클 수밖에 없다. 자녀들 취업난까지 겹쳐 고민은 곱절이 된다. 
 
현재 중년들은 대체로 짜인 틀 안에서 그럭저럭 살아왔다. 대다수가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가정을 꾸리고 애들을 키웠다. 부모와 학교, 사회가 깔아놓은 궤도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당한 결단을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인생 2라운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궤도도 없고, 스스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방향이 먼저다
다급한 마음에 얼마 되지 않는 노인형 일자리를 놓고 이리저리 궁리하기보다는 방향을 먼저 찾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일단 큰 가닥부터 잡아보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좀더 살아가는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영역을 찾는다면 노후는 한결 풍요로워진다. 그 영역을 나는 ‘삶의 주제’라고 부른다.
 
그 주제는 그동안 해온 일의 연장선에 있거나 비슷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거창하고 추상적일 수도 있고, 아주 구체적이며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뜨는 유튜버나 블로거들이 나름의 주제에서 경쟁력과 차별성을 보이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겠다. 꾸준하게 붙들고 있을 만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럿이라면 더욱 좋다.
 
주제가 명확하면 퇴직 이후 설계의 큰 숙제를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주제와 관련된 활동을 하면 무엇을 하면서 살지 덜 고민스럽다. 언론인 P씨에겐 ‘나이듦’이 삶의 주제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죽을 때까지 파보고 싶어 한다. 나이듦에 대해 더 깊이, 많이 아는 것이 즐겁고, 그 앎을 바탕으로 제대로 가치 있게 나이 들고 싶어 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도 건강하고 즐겁게 나이 들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일거리는 여러 가지다. 돈벌이가 되는지는 별개 문제다. 그가 새로 만들어낸 직종인 시니어서비스전략가나 노후설계 컨설턴트,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시니어 산업 종사자, 노후 관련 저술가, 시니어 단체 자원봉사자 등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영역을 망라한다. 자신이 고른 주제의 일인 만큼 업종과 관계없이 더 기꺼운 마음으로 노력과 시간을 바치게 될 것이다. 
 
그가 선택한 또 하나의 주제는 언어다. 우리말과 외국어를 익히고 능숙하게 쓰는 것이다. 언어와 관련된 일거리 또한 다양하다. 그는 이 두 가지 주제와 관련된 뭔가를 하면서 살아가려 한다. 
 
6개의 원
그럼, 이런 삶의 주제는 어떻게 정한 것일까. 개인이든 회사든, 방향을 설정할 때 고려해야 할 기준을 생각해보자. 크게 세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정말 하고 싶은지(열정)를 꼽을 수 있겠다. 머릿속으로 사표를 수십 번 썼다 지우면서도 먹고사느라, 애 키우느라 가지 못한 길을 이제야 가려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 순댓국집 주인에서 시니어 모델로 변신해 최근 화제를 모은 김칠두(64)씨에겐 20대 때부터 관심사였던 패션이라는 주제가 새 인생의 디딤돌이 됐다. 방랑시인을 꿈꾸는 교사 C씨는 벌어놓은 것은 얼마 없어도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남은 생을 보내려 한다. 
 
잘하거나 그럴 자신이 있는지(능력)와 사회적 수요가 많은지(쓰임새) 또한 중요한 잣대다. 꼭 하고 싶지 않더라도 잘하는 영역에서 계속 일하는 것은 부담이 적다. 또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사람 손이 많이 요구되는 영역이라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쓸모가 있다. 취업난 가중에도 사회복지 일자리는 많이 늘어나는 것이 대표 사례다. 
 
이런 세 영역을 원으로 그려 자신이 생각하는 주제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확인해보자. 어느 하나의 원에만 들어가도 괜찮은 주제라고 하겠다. 두 개의 원이 겹치거나 세 원의 공통 영역에 포함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P씨에게 나이듦이란 주제는 삼박자를 동시에 갖춘 것이다. 그가 몹시 해보고 싶은 동시에 잘할 수 있고, 갈수록 수요가 커지는 영역에 해당한다. 
 
선택한 주제의 구체적 일을 찾을 때도 세 개의 원을 적용해볼 수 있다. 보람이 있는가, 즐거움을 주는가, 아니면 돈벌이가 되는가. 효용 측면에서 하나의 원 안에라도 들어간다면 반길 만한 일이다. 세 원이 겹치는 영역의 일은 최선이다. 많은 사람이 ‘보람+수입’의 조합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물론 생활고에 쫓기는 중년에겐 이런 얘기조차 사치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절박한 처지가 아닌데도 돈벌이에 내몰리면 한 번뿐인 인생의 남은 절반이 몹시 팍팍하고 건조해질 수밖에 없다.
 
의무에서 선택으로 
무슨 일이든 시작이 가장 힘든 법이다. 되는대로 살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지 않으면 발걸음을 떼기가 어렵다. 더욱이 지나온 삶과 하던 일, 이리저리 얽힌 관계, 벌어놓은 재산 정도 등으로 인생 후반부 설계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정리해놓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구체적 여건이 제각각이어서 누구에게나 꼭 맞는 하나의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지침은 있다. 내 삶의 주제 정하기는 체계적 노후 준비의 첫 번째 관문이다.
 
“인생의 전반기(의 일)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적인 것이라면, 후반기는 선택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비즈니스스쿨에서 ‘후반기 인생 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쇼사나 주보프의 말이다. 먹고사는 것이 너무 절실하지만 않다면 참으로, 참으로, 그러고도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보라. 어느 정도 나이 든 지금 인생을 살찌울 바로 그 기회가 현관문 앞에 와 있다.  
 
* 한국 베이비붐세대의 막내(1963년생)인 박중언은 노년학(Gerontology)과 함께 고령사회 시스템과 서비스 전략을 연구 중이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편안하게 늙어가기를 지향한다. 블로그 ‘에이지프리’(AgeFree)를 운영했고, 시니어사업에도 몸담았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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