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완 국내편집장

<스티글리츠 보고서>, 조지프 스티글리츠+세계 통화와 금융체제 개혁을 위한 유엔총회 전문가위원회 지음, 박형준 옮김, 동녘 | 2010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인 지난 2008년 11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미 컬럼비아대학)의 주도 아래 유엔총회 전문가위원회가 출범했다. 유엔총회 의장의 한시적 직속 기구로 ‘국제 금융·통화 체제 개혁’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모든 나라를 한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으면서 정당성을 갖춘 국제기구는 ‘유엔’밖에 없다. 스티글리츠는 전세계의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포괄하기 위해 선진국은 물론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에 걸쳐 전문가 패널을 구성했다.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들 간에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더 민주적인 체제를 갖춘 새로운 세계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새로운 체제에서만이 더욱 안정되고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고 성장의 열매가 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다.” 이런 공통적인 생각 아래 참여한 수십 명의 전문가들은 4개 연구그룹을 구성해 수차례에 걸쳐 생동적이고 격렬한 토론을 거쳤다. 그 결과물이 <스티글리츠 보고서>(the Stiglitz Report)다.
이 보고서는 전편에 걸쳐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세계 차원의 강력한 공동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글로벌 공공재’와 ‘지역적 공공재’로서 경제·금융·생태계 안정 대책을 보고서 의제로 설정하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위기는 세계적 차원의 부양(글로벌 공공재)을 요구한다. “이번 위기는 경제위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기다. 지금까지 있던 모든 경제위기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위기가 끝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결과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어린아이들은 평생 동안 감내해야 할 발육 부진을 겪고,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아이들은 재교육을 받기 힘들어져 잠재능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소기업들도 파산을 겪으면서 미래의 성장과 고용 동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지금 지구 세계는 국내 수준의 양극화, 국가 간 빈부격차 심화, 그리고 총체적인 기후변화라는 위협에 직면해 있다. ‘세계경제의 통합’(경제적 세계화)은 한 국가의 행동이 다른 국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세계적 외부효과’에 대응하면서 글로벌 공공재를 준비하고 공급하기 위한 공동 행동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이번 금융위기가 갑작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그동안 세계경제가 빈번하게 겪은 위기 중 최악의 형태라고 진단한다. “금융 부문의 시장 실패는 실물 생산과 고용에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끼친다. 전 지구적으로 통합된 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행동이 다른 나라에 파급효과를 가질 수밖에 없다.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는 이런 외부성이 잘 고려되지 않는다. 선진국들은 특히 외부성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상호 연관된 행동에서 일어나는 외부효과를 고려할 때 이제 반드시 ‘규제’가 필요해진다.
오랫동안 주류 경제학 비판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스티글리츠는 본질적으로 주류 경제학파에 속하며, 다만 주류 경제학적 설명 틀 안에서 주류 경제학의 믿음에 대한 비판을 제출하는 경제학자다. 스티글리츠는 보호주의보다는 자유무역을, 산업정책보다는 시장경쟁을 옹호한다. 21세기 벽두부터 ‘세계화와 그 불만’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있지만 세계화 반대론자라기보다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규제가 이뤄진, 더 나은 대안적 세계화’를 제기한다. ‘대안적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스티글리츠의 시각은 선진국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에 항상 맞춰져 있는데, 이 보고서가 주목하는 것도 개도국이다. 즉, 위기가 신흥국에 미치는 영향에 중점을 두고 그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2008년 선진국에서 시작된 대불황과 위기는 심지어 건전한 거시경제 정책과 규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개도국들까지도 무너뜨리고 말았다. 오늘날 세계가 겪는 문제는 경제위기나 금융위기만이 아니다. 국제사회는 지금 세계 금융 시스템의 붕괴와 전세계 경제침체 외에도 전례 없는 규모의 복합적이고 상호 연관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앞서 식량 위기와 에너지 위기가 발생했고, 이 때문에 많은 개도국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보고서는 ‘개도국 친화적 세계경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세계화’가 필요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선택’을 통해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국제통화 시스템은 개도국이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나라에 낮은 이자율로 자원을 이전시키도록 만들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특히 달러 보유고가 쌓인다는 것은 미국에 낮은 이자율로 대출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개도국들이 화폐와 무역의 극심한 불안정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대규모 외환 보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런 이전은 점점 더 증가해왔다. 2007년 기준으로 개도국들은 실질적으로 선진국들에게 3조7천억달러라는 거액의 돈을 낮은 이자율에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도국들이 선진국으로부터 대출받은 후 지불하는 대출 이자율과 그들이 지불받는 이자율의 차이가 자원을 개도국에서 기축통화 국가 쪽으로 이전시킨다. 그 액수가 선진국에서 개도국이 받은 해외 원조의 가치를 초과한다.” 이런 진단에 따르면, 이제 미국은 자신의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그것이 세계 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세계 각국의 걱정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그동안 탈규제를 지지해온 정치 지도자들의 관점은 대부분 오점투성이 경제모델에 바탕을 두었다. 근원적으로 위기를 일으킨 규제 실패는 구조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에서 기인했다. “특정한 이념 체계는 위기의 원인이 된 탈규제와 여타의 정책들을 만들어냈다. 정책과 경제이론 모두 이번 경제위기 발생에 일조했다. 문제투성이의 정책들은 위기를 만들고, 세계 전체로 퍼지게 가속화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오류들의 근저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지난 25년간 유행한(종종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근본주의’라 부르는) 경제철학이 놓여 있다. 이 철학은 각종 의사결정을 왜곡했으며 이번 위기의 원인이 된 많은 정책을 양산했다. 국제기구들은 결함이 있는 규제 철학, 문제성이 다분한 제도적 실천을 양산한 나라들을 다른 국가가 따라야 할 본보기라 주장하며 세계 여기저기로 퍼뜨렸다.”
그렇다면 올바른 제도적 체계와 장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대답을 보면 ‘먼저 경제 이념과 철학을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지만, 주류 경제학의 틀 속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그는 그동안 펴낸 여러 책을 통해 “시장 내부에서 발생하는 인센티브 왜곡을 적절하게 잘 고치면 된다”고 말한다. 정보 불완전(및 비대칭)이나 외부 경제효과로 인해 시장에서는 인센티브 왜곡 문제가 발생하기 쉬운데, 정부의 적절한 규제와 개입, 효과적인 제도 설계 등을 통해 시장 참여자들의 행동 유인을 변화시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접근인 셈이다.
잘못된 탈규제가 파국적인 결과를 낳은 대표적인 시장이 바로 금융시장이다. 그런데 ‘금융시장 탈규제’ 주장의 배경에는 사리사욕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최근 실물경제와 비교해 금융시장 활동의 크기와 규모가 너무 비대해졌다. 고삐 풀린 자유시장은 금융이, 원래 주인이던 경제와 더 나아가 사회에 제대로 이바지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했다. 많은 나라에서 금융시장은 생산적 경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많은 국가에서 금융시장은 그들이 했어야 할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더 생산적인 영역에 갔어야 할 희소한 자원을 다른 영역으로 유용하면서, 여기저기서 사회문제들을 발생시켰다.”
경제 행위에 관한 법칙들이 언제,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사회보장은 사회정의의 수단일 뿐 아니라, 경제적 안정화의 주요 수단이기도 하다. 잘 설계된 사회보장 체제는 자동안정화 장치의 규모를 확대함으로써 경제가 충격에 더욱 잘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사회적 이동성, 즉 내 아이들이 나보다는 더 나은 사회적 진출의 기회를 갖는 것은 성장과 번영의 주요한 엔진 중 하나다. 세대가 전환될 때마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출발점의 수정이 이뤄져야만 사회적 이동성이 훨씬 더 좋아진다. 자원의 배분을 조정해 각각의 세대가 초기 조건에서 가지고 있는 불평등 수준을 줄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적 보장 체계의 역할 중 하나다.” 보고서는 우리가 지구라는 곳에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함께 살려 한다면 세계 시민들 사이에 사회정의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경제적 안정과 정의를 위해 “정치적 공동 행동과 연대에 나서자”, 이것이 보고서가 제출하는 “세계경제의 대안”(제6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