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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미국 없이 개혁·개방하나?
[북한 경제]
[8호] 2010년 12월 01일 (수) 김보근 economyinsight@hani.co.kr

김보근 <한겨레> 스페셜콘텐츠부장·경제학 박사(북한 경제)

“북한은 미국 없이 개혁·개방에 나설 수 있을까?”
지난 9월 말 열린 북한 노동당 대표자대회에서 후계자가 된 김정은이 과연 개혁·개방에 나설 것인지를 논의하다 보면 마지막에 닿게 되는 질문이다. 지금까지는 북한의 개혁·개방 정책을 논의할 때 그 필수 전제조건으로 꼽히던 것이 ‘북-미 관계 개선’이다. 요지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유지하는 상황에서는 북한이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최근 정세를 보면 이런 ‘상식’과 ‘전망’이 흔들리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급속하게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면서 ‘미국 없는 북한의 개혁·개방’이 가능하게 된 것 아니냐는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다.

대규모 사회·계급 변화 가능성
먼저 지금까지 북-미 관계 개선이 북한의 개혁·개방에서 왜 중요하게 평가됐는지 검토해보자. 이는 무엇보다 북한의 개혁·개방 정책이 거대한 사회·계급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점과 관련 있다.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시장을 허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미 시장을 기반으로 한 중산층이 형성되는 등 상당한 사회·계급 변화를 겪고 있다. 말하자면 제한된 시장용인 정책에도 북한 사회가 들썩인 것이다.
이들은 북한 정부가 2005년 이후 시장규제 정책을 취하자 이에 반대하는 집단적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시장 견제를 강화했다가 반발에 부닥치면 다시 풀어주는 정책을 되풀이해왔다. 2009년 11월 말에 시행된 ‘화폐 개혁’은 북한 당·군·정의 관료들이나 전통적 노동자계급 등 ‘견제파’의 가장 큰 반격이었지만, 곧 시장을 다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장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람들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난 8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 창춘에서 만나고 있다.

시장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는데 이 정도라면, 북한이 본격적으로 시장을 허용하면 더 큰 사회·계급 변화가 발생할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때 북한 경제의 공급 측면에서 제약 요인이 발생한다면, 북한 사회 내부의 사회·계급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내부 재원이 약한 북한의 현 상황에서 ‘공급 측면의 제약 요인’이 주로 외부로부터의 투자 제약 등에 기인한다고 할 때, 지금까지 그 키를 잡고 있던 것은 미국이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가 미국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단적인 예다. 따라서 미국이 계속 대북 적대정책을 펴는 한 북한이 쉽사리 전면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적 측면이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그랬듯이, 북한 체제를 ‘한 방에 날려보낼’ 수 있는 군사력을 지녔다. 실제로 1994년 1차 핵위기 때 북한을 폭격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해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요약하면 미국과의 관계를 풀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미국에 의한 경제적·군사적 위험이 상존한 상태에서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북한으로서는 너무나 큰 모험이다. 그런데 현재 북-중 관계를 살펴보면 서서히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얻으려 했던 군사·경제적 효과를 모두 중국과 밀접하게 결합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중국 통해 경제적 효과 얻을 수 있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은 ‘중국이 있는 한 미국이 자신을 쉽게 공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점차 믿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두 번이나 한반도 서해에 들어오려다가, 남한 정부에 의해 거부된 일이었다. 애초 조지워싱턴호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한 쪽은 남한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월24일 강력한 대북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천안함이 북한 소형 잠수정이 발사한 중어뢰에 의해 격침됐다”고 5월20일 결론을 내린 지 나흘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남한 정부는 천안함 조사 결과에 대한 의혹이 잇따르고 유엔 안보리에서의 외교전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게 되자, 미국에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의 파견을 요청한다. 군사평론가인 김종대 <디앤디포커스> 편집장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는 애초 어렵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6월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해 파견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천안함 이슈가 약해지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등이 다가오면서 남한의 태도는 바뀌었다. 조지워싱턴호는 지난 7월 부산항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서해에까지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미국은 지난 9월 초와 10월 중순 조지워싱턴호를 서해에 보내겠다고 남한 쪽에 알렸으나 남한 정부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천안함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실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으며, 남한 당국이 북한을 포함한 국제사회와 공조해서 재조사를 벌여야 할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 뒤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볼 때, 북한이 충분히 ‘미국의 공격에 대한 중국의 방어막이 훨씬 강해졌다’고 느낄 만하다.
더욱이 북한에 중국과의 경제협력도 점차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 중국은 2002년부터 ‘동북진흥정책’을 펴왔는데, 이의 성공에는 북한을 원자재 및 노동력 공급을 위한 ‘하위 파트너’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동북진흥정책이란 동북쪽에 있는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지역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정책을 뜻한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때 중화학공업지대였던 이 지역은 당시 소득수준이 중국 최고였지만, 상하이 등 남부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현재는 중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개혁·개방이 아니라 ‘중국 종속’이 이슈
북한은 애초 대미 관계 개선, 남한과의 경협 확대 등 여러 카드를 가지고 있었던 탓에 중국과의 협력을 여러 개의 카드 중 하나로 인식해왔지만, 점차 중국 카드를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른 카드의 유용성이 떨어진 것도 한 이유지만, 그것에 더해 중국 경제가 날로 성장해가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중국 경제가 미국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성장하면서 중국이 북한 관리 차원에서 꽤 큰 자금을 우호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중국이 전략적 차원에서 대북 지원에 나선다면 미국이 없어도 개혁·개방 때 공급 측면에서 제약 요인이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아직까지 ‘북-미 관계 개선 없는 북한의 전면적 개혁·개방’은 많이 검토되고 다듬어져야 할 ‘가설’이다. 하지만 징후들은 점차 뚜렷해지는 듯하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임을출 경남대 연구교수는 “대북사업을 하는 중국 쪽 담당자들이 대북 경협의 장래에 굉장히 낙관하고 있었고, 협력 내용도 구체적이었다”며 “그 모습을 보면서 북한이 중국에 기대어 개혁·개방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변화하면 이론이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북한 경제를 다룰 때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느냐 여부가 중심 화두였다. 중국에의 경제 종속이 차츰 부각되고 있지만, 그것이 핵심 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 없는 개혁·개방’이라는 ‘가설’이 검증돼 ‘이론’으로 정착하는 단계가 되면 국내 북한 학계의 연구 주제도 크게 바뀔 것이다. 따라서 몇 년 뒤 우리 앞에 펼쳐질 북한 경제와 관련한 핵심 이슈는 개혁·개방이 아니라, ‘중국에의 종속’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상당히 늦어버렸지만,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가설’과 ‘이론’에 대비해야 한다. 한반도의 전환기는 북한 관련 이론에도 전환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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