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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함과 기술, 여행의 재발견
[Culture & Biz] 영상으로 진화하는 ‘디지털 여행기’
[100호] 2018년 08월 01일 (수)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제주살이의 일상과 맞물린 소소한 여행의 즐거움으로 시청자의 관심을 끈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 홍보 사진. JTBC 홈페이지
안식처를 떠나 어딘가로 향하는 순간 여행은 시작된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환경과 사람, 문화를 마주할 때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새로운 것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고 왔던 익숙한 것을 돌아볼 때 그제야 소중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 작가 앤드루 매튜스는 목적지에 닿아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여행으로 자극된 다양한 감정이 창작 의욕을 왕성하게 불러일으킨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당시 그리스와 이집트 등을 여행하며 남긴 일종의 여행기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부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까지 많은 사람이 ‘여행’이라는 일탈의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여행기’라는 콘텐츠로 만들었다. 여행기는 ‘대리 경험’을 안겨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요즘에도 여행은 여전히 많은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주요 원천이다. 특히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의 주류를 이루는 ‘여행예능’도 마찬가지다. 글이 영상으로 바뀌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과 표현이 연예인들의 왁자지껄 웃음으로 바뀐 것을 빼면 과거 우리 선조가 낯선 여행지에서 적은 수많은 기행문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행예능’은 방송계에선 꽤 오래전부터 유행한 코드였다. 2007년부터 시작한 <해피선데이-1박2일>(KBS)이 원조 격이다. ‘가족예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일밤-아빠! 어디가?>(MBC)와 나이 든 배우들의 여행 이야기 <꽃보다 할배>(tvN)로 2013년 정점을 찍었다. ‘먹방’이나 가족예능에 눌려 잠시 주춤했다가 2017년부터 다시 TV 예능을 장악하고 있다. 가족예능 에피소드의 하나로 여행이 등장하더니 점점 여행이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TV 예능을 장악한 먹방이나 가족예능에서 보이던 ‘일상’이라는 트렌드가 ‘일상에서 벗어나기’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2018년 여행예능 프로그램들은 몇 년 전과 비교할 때 화면이나 내용 면에선 큰 차이가 없지만 조금 다른 점이 보인다. ‘소소함’이다.
 
‘여행예능’의 재부상
소소함이라고 하면 최근 널리 인용되는 ‘소확행’이라는 유행어가 빠질 수 없다. 1986년 유명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펴낸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는 이런 대목들이 나온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반듯하게 접힌 속옷이 서랍 가득히 들어 있는 것” 등.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소확행’은 2017년부터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으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순식간에 시대를 관통하는 트렌드 키워드가 됐다.
 
최근 인기를 얻은 TV 여행예능을 보면 소확행의 소소함이 한껏 묻어난다. <효리네 민박>(JTBC)부터 최근 방영된 <숲속의 작은 집>(tvN)까지 좋은 반응을 얻은 프로그램 대부분은 소소한 행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간접경험이나 대리만족을 염두에 둔 전통적 여행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소소함은 빠지지 않는다.
 
하루키가 소확행을 처음 이야기한 1980년대 초·중반 일본은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하던 시기였다.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처럼 지금의 한국도 저성장 기조에서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며 소소함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과거와 비교해 지금의 여행예능이 조금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로 갈 수밖에 없는 데는 이런 시대적 환경이 작용한다. 여행예능이 다시 주류로 올라선 이유는 또 있다. 여행의 산업적 배경과 변화하고 발전하는 미디어 기술이다.
 
협찬과 기술 발전
현대사회에서 여행은 복합 서비스 산업이다. 여가활동에서도 비용이 높은 편이고, 일단 출발하면 선택을 되돌릴 수 없는 일회성 서비스다. 그래서 일반 소비재 구입 때보다 신중하게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여행 안내 같은 정보성 콘텐츠가 주를 이뤘다. 여행 콘텐츠는 대부분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됐고, 많은 사람이 여행지 선정에 참고했던 블로그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모바일 영상의 확대와 영상 플랫폼의 대중화로 여행 콘텐츠의 영상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텍스트나 이미지에 비해 영상 정보가 더 직관적이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TV 여행예능이 인기를 끌면서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관광지나 여행 코스를 따라가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꽃보다 할배> 후속작 <꽃보다 누나>에서 소개된 크로아티아는 방송 이후 한국사람들의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한 호텔예약 서비스업체가 20~50대 남녀 6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7%가 “여행예능이 여행지 선정에 큰 영향을 준다”고 대답했다. TV 여행예능이 여행산업에 끼치는 영향을 잘 보여준다.
 
여행예능이 소비자의 여행지 선정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뒤 이른바 간접광고(PPL)나 협찬 등이 늘어났다. 일본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한국의 TV 여행예능에 많은 예산을 지원한다. 국내 지자체들도 마찬가지고, 대형 여행사들의 제작 지원도 빠뜨릴 수 없다.
 
그래서 방송 관계자들은 프로그램 마지막 크레디트를 보면 협찬 여부를 쉽게 알 수 있다고 얘기한다. 협찬이 껴 있으면 프로그램의 객관성을 100%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행예능이 늘어난 또 다른 이유는, 미디어 기술 발달에 따른 제작 환경의 변화다. 시청자는 잘 모르겠지만, 이전보다 제작비가 훨씬 적게 들어간다. 가볍고 작은 촬영장비들 덕에 과거에는 엄두를 내기 힘들었던 지역에 가기 쉬워졌다. 예전에는 외국 촬영에 들어간 장비가 어마어마했다. 그만큼 많은 인원과 제작비가 필요했다.
 
요즘은 적은 인원과 장비로도 질 높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더 높은 해상도를 제공하는 드론을 통한 항공촬영이나 성능 좋은 카메라로 ‘예쁜’ 영상을 만들기 쉬워졌다. 이렇게 ‘볼거리’가 많아진 것도 여행예능 인기의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방송 못지않은 개인 영상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일반인도 방송용에 뒤지지 않는 영상을 만들고 있다. 휴대전화도 방송용 장비에 버금갈 정도로 고성능화되고, 드론과 개인용 짐벌(카메라의 흔들림을 억제해 안정적 촬영을 가능케 하는 도구)도 널리 쓰인다. 그래서 TV 여행예능과 별도로 개인이나 작은 스튜디오가 만든 여행 콘텐츠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에서는 여행정보와 여행기를 담은 개인이나 여행작가의 멋진 영상이 많은 구독자를 확보해 새로운 미디어 채널로 떠오르고 있다.
 
여행채널은 TV 여행예능 못지않은 파급력을 지녔다. 유명 여행채널은 TV처럼 관광청이나 지자체, 여행사들의 제작 지원을 받기도 한다. 이런 추세에 맞춰 여행사들도 사진과 글로만 채웠던 여행상품 페이지에 영상을 붙이기 시작했다. 여행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1~2년 안에 여행정보와 여행기가 글과 사진에서 영상으로 빠르게 바뀔 것으로 예상한다.
 
지친 일상에서의 탈출과 힐링을 위해 여행을 선택하는 흐름과 함께 미디어 기술의 발달은 여행예능을 포함한 여행 콘텐츠 전반의 영상화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일부 용감한 선조들이 낯선 곳을 여행하며 남긴 기행문을 통해 넓은 세상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여행예능을 포함해 많은 사람의 ‘디지털 기행문’이 현실감 있게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첨단 기술도 한몫한다. 가상현실(VR) 콘텐츠 제작사는 마치 현장에 있는 느낌을 주는 가상현실 여행 콘텐츠를 잇달아 개발하고 있다. 증강현실(AR)이나 혼합현실 같은 기술도 여행 콘텐츠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여행을 가려는 사람, 다녀온 사람, 가지 않고도 여행 기분을 느끼고 싶은 사람을 위한 여행 콘텐츠는 기술 진보와 맞물려 더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것이다. 여기에는 관광이라는 산업적 요구와 함께 수많은 여행 영상을 재구성해 여행코스를 구현해주는 기술과 인공지능(AI) 편집 기술 등도 기여할 것이다.
 
* 문동열은 영상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 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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