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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뛰어넘는 더 ‘독한’ 것이 온다
[Life] HMD 매개로 진일보한 가상현실
[99호] 2018년 07월 01일 (일) 힐마어 슈문트 economyinsight@hani.co.kr

HMD 기술 발달로 실제처럼 만지고 느끼는 것 가능… 가상과 현실 경계 없어져

가상현실(VR)이 대중시장을 정복할 기세다. 가상현실이라는 돌파구가 열릴 때가 머잖았다는 말이 나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흘렀다. 실리콘밸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신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펼쳐진 것처럼 디지털 드림월드에 베팅하고 있다. 가상현실 기술은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

힐마어 슈문트 Hilmar Schmundt <슈피겔> 기자
 
   
▲ 가상·증강 현실 성능을 시험 중인 HMD(머리 착용 디스플레이). 글로벌 가상현실 연구의 50%가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다. REUTERS
소년 파르치팔의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시궁창 같다. 그럼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고아인 파르치팔은 이동용 주택이 끝없이 늘어선 빈민촌에 산다. 그에게 디지털 세계 ‘오아시스’는 유일한 탈출구다.
 
이 가상의 우주 오아시스도 위험에 놓였다. 독점 지위를 가진 데이터 대기업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용병을 투입해 오아시스를 지배하려 한다. 파르치팔은 네트워크에서 킹콩과 공룡, 데이터 대기업 임원에게 맞서 싸운다. 파르치팔은 혁명가로 변모하고 권력, 돈, 인생의 여인을 결국 쟁취한다.
 
팬과 투자자는 <레디 플레이어 원> (2018) 개봉을 애타게 기다려왔다. 거실, 사무실, 학교 등 일상 영역에 가상현실(VR)이 들어서기를 누구보다 원하기 때문이다. 파르치팔과 그의 여인이 안 죽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후속편도 제작했을 것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삼성, 소니, HTC 등 대기업은 현재 새로운 디지털 세계인 가상현실에 깃발을 꽂고 있다. 최고 수준 칩과 HMD(머리 착용 디스플레이·Head Mounted Display), 개발자 확보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페이스북은 4년 전 가상현실 제조업체 오큘러스를 20억달러(약 2조2천억원)에 합병하는 등 선제공격에 나섰다. 2012년 설립 당시 오큘러스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하지만 시장 전문가들은 가상현실 기업 매출액이 2020년에는 4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스틸 사진
현실도피 욕구 자극하는 가상현실
가상현실 돌풍은 무엇을 의미하나? 가상현실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현실에 존재하는 일종의 오아시스인 ‘세컨드라이프’(secondlife.com)를 방문했다.
 
가상현실 사이트 세컨드라이프를 만든 필립 로즈데일이 자작나무, 나무 다리, 계곡 등 자신이 ‘하이파이’(High Fidelity)라고 부르는 신세계 시뮬레이션 풍경에서 게임 캐릭터를 산책시키고 있다. “우리는 실제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공원을 만들 수 있다”며 흡족해했다. 클릭 한 번으로 로즈데일은 클럽에서 춤을 춘다. 한 번 더 클릭하면, 그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성으로 변신해 백화점에서 유유자적 쇼핑을 즐긴다.
 
로즈데일은 앞머리를 강조한 카리스마 넘치는 40대 후반 남성이다. 머리에 HMD를 써서 외모가 가려 있다. 이어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햇빛 좋은 사무실에서 HMD를 쓴 채 허공에 손짓을 했다.
 
로즈데일은 가상현실을 대표하는 선구자에 속한다. 어린 시절 조종사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끊임없이 이사를 다녔다. 수줍음 많은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를 꿈꿨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20대 후반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얻은 로즈데일이 세컨드라이프를 개발한 것은 2003년이다. 이 회사는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시뮬레이션 사이트로 꼽힌다.
 
세컨드라이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이용해 클럽과 쇼핑몰을 이용한다. 집을 사고, 물건을 만들어 팔고, 반려동물을 키우며, 쇼핑 등 경제활동을 한다. (세컨드라이프 서비스는 사람들의 일탈 욕구를 자극했다. 설립 4년 만인 2007년 가입자가 870만 명이 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편집자)
 
가상현실을 둘러싼 대중의 열광은 마치 파도와 흡사하다. 환호와 좌절이 약 10년 주기로 번갈아 나타난다. 2007년 언론의 뭇매를 맞은 ‘세컨드라이프 가상현실’ 현상은 이제 잠잠해졌다. 그러나 200만 명의 사용자는 자신의 세컨드라이프인 가상현실에 여전히 변함없는 지지를 보낸다. 가상현실에서 국내총생산은 5억달러(약 5400억원)에 이른다. 이는 작은 국가의 국내총생산을 뛰어넘는다.
 
로즈데일에게 세컨드라이프는 가상현실 ‘맛보기’에 불과하다. “사용자가 100만 명에서 10억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지금의 가상현실은 1990년대 초반 웹에 비교할 만하다.”
 
로즈데일은 머잖아 사용자들이 마우스로 사이트를 클릭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앱에 들어가는 대신, HMD를 쓴 채 가상의 사무실과 쇼핑몰, 바깥 풍경을 느끼며 돌아다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뮬레이션을 위해 전세계 최고 교수들과 함께 내가 가상의 물리실험실에 들어갈 수도 있다. 전세계 어느 대학도 이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로즈데일이 꼽는 강력한 경쟁자는 그가 8여 년 전에 떠난 세컨드라이프의 모회사다. 이 회사의 직원 70여 명은 ‘산사’(Sansar)라는 새로운 가상세계 게임을 만들고 있다. ‘산사’에선 아바타들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처럼 암울하고 초현실적인 도심을 미끄러지듯 다닌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아폴로’ 착륙선이 나타나기도 한다.
 
세컨드라이프는 ‘하이파이’와 더불어 열린 기준을 토대로 한다. 각 사용자가 독자적으로 가상현실을 만들어야 한다. 반면 ‘산사’는 완벽주의와 중앙통제가 원칙이다.
 
로즈데일은 “가상현실이 제2의 인터넷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예언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가상현실의 새로운 돌파구는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다. 그것도 50년 전부터 말이다.
 
이반 서덜랜드 미국 하버드대학 공대 교수는 1960년대 ‘가상현실 시스템’이라는 자신의 꿈을 “궁극의 디스플레이”로 지칭했다. 이제 가상현실 시스템이 단순히 주위를 둘러보거나 만져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실에서처럼 실제 만지고 느끼는 것이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가상현실인 ‘꿈의 세계’에서 사용자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총알이 날아온다면, “수갑이 진짜 손목에 채워지고 총알이 실제 살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덜랜드 교수의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는 현실과 가상의 구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서덜랜드 교수는 1968년 케이블과 모니터로 구성된 HMD 시제품을 만들었다. 샹들리에처럼 보이는 시제품은 너무 무거워 사용자가 다치지 않도록 천장에 고정됐다. 그것은 ‘다모클레스의 칼’로 불렸다.
 
산업계와 군대는 비행 시뮬레이션 때 초기 HMD 콘셉트를 일부 차용했다. HMD 콘셉트는 자동차 설계에도 도움을 준다. 건축사무소와 엔지니어링사무소에서도 사용한다. 이외에 일부 호텔과 부동산중개업체, 컴퓨터 게이머도 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디지털컨설팅 업체 딜로이트(Deloitte) 시장전문가들은 2017년 “이런 틈새시장을 제외하고 가상현실의 새 돌파구는 대중에게 아직 생소하다”고 발표했다. 독일에서 HMD 대중화는 3%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는 디테일 한 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이 봤을 때, HMD의 효용 가치는 거의 없었다. 실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셀카 제외) 같은 ‘킬러앱’이 지금까지 전무하다.
 
2018년 3월 말 20여 개국 전문가 500여 명이 가상현실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 슈바벤 지역의 소도시 로이트링겐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가상현실 콘퍼런스 ‘IEEE VR(Virtual Reality)’다.
 
글로벌 가상현실 연구의 50%가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 정보학자이자 콘퍼런스 선임담당자인 베티몰러는 “프랑스와 독일, 자동차산업에서 가상현실이 집중적으로 연구된다”고 말했다. 베티몰러는 다름슈타트 공과대학에서 가상현실을 바탕으로 신체 인지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중이다. 한 예로, 실험에서 여성에게 겁을 주면 기억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반면 여성에게 남성 게임 캐릭터를 맡기면 기억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 뇌졸중 등 환자들의 치료에도 HMD를 활용한다. HMD를 쓴 환자들은 정원이나 숲 등을 거닐며 통증이 완화되는 것도 느낀다. REUTERS
가상현실 응용 기술 발전… 현실과 경계 모호
미국 유타주 박사 출신인 베티몰러는 독일의 탄탄한 가상현실 기초 연구에 매력을 느껴 독일행을 결심했다. 그는 독일 대학도시 튀빙겐에 있는 막스플랑크 생물학적인공두뇌학연구소 내 가상현실 연구소인 ‘사이버네움’(Cyberneum)을 선택했다.
 
튀빙겐의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산업전당. 이곳에는 천장 높이와 맞먹는 길이의 로봇 팔이 피실험자가 어지럼증을 느낄 때까지 허공에서 휙휙 돌고 있다. 이렇게 피실험자를 괴롭히는 이유는 균형 감각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 실험은 가상현실의 최대 미해결 문제 중 하나인 이른바 ‘컴퓨터병’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다. 수많은 HMD 이용자가 약 20분이 지나면 어지럼증을 느낀다. 눈과 귀 내부의 균형 감각이 자동차 멀미를 느낄 때처럼 모순되는 신호를 받기 때문이다. HMD를 이용하는 동안 어지럼증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처럼 HMD 초기 시제품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쟁 트라우마는 영혼을 파괴시킬 수도 있다. 이런 군인들에게 치료법의 하나로 가상현실을 활용한다. “환자의 아픈 기억을 몰아내는 데 상담 치료보다 가상현실이 더 효과적”이라고 앨버트 리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 교수가 말했다.
 
리조 교수는 기계가 아닌 인간 감각을 조작하는, 가상현실을 응용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뇌졸중 환자에게 HMD를 통해 팔이 움직인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때 환자 두뇌는 움직이는 팔을 자신의 신체 일부로 받아들인다. 환자 치료를 돕는 선의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말과 사진, 영상에 익숙하고 이것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리조 교수의 설명이다. “HMD를 쓴 채 가상현실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움직이면 그 경험이 곧 자신의 신체로 인식(인지)된다. 특히 아이들은 디지털 ‘몰입’ 상태가 실제 경험인지 가상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가상현실 콘퍼런스 ‘IEEE VR’는 관련 업계가 지난 50년 동안 서덜랜드 교수의 ‘궁극의 디스플레이’를 열심히 뒤좇아왔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이파이’나 ‘산사’ 등 고도로 발전된 형태의 가상현실조차 사용자의 손과 발을 제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하물며 촉각, 후각, 미각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가상현실의 강점은 기술적 무오류가 아닌 인간의 인지 오류를 탐색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아주 일상적인 오류, 즉 가상 같은 현실에서 말이다. “가상현실은 수년간 수요 이상으로 판매됐고, 사람들은 과도한 기대치를 갖게 됐다.” 콘퍼런스에서 기업인 짐 뤼게베르크가 지적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 학생들, 자신의 형과 함께 ‘홀로데크’(Holodeck)를 제작하고 있다. 홀로데크는 컨트롤러로 탐색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가상세계를 말한다.
 
뤼게베르크는 2018년 5월 시험용 가상현실 테마공간 ‘일루전워크’(Illusion Walk)를 열었다. 이와 유사한 가상현실 테마공간이 미국 뉴욕, 캐나다 토론토, 영국 런던, 두바이에 ‘더 보이드’(The Void)라는 이름으로 이미 존재한다. 그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사무실에 자신의 가상현실 테마공간을 재현해놓았다. 게이머 4명이 특수한 가상현실 컴퓨터를 마치 배낭처럼 어깨에 메고 HMD를 쓴 뒤 우주선의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헤집고 다니도록 만들었다. 게이머들이 실제 존재하는 이들이기에 주의하지 않으면 다른 게이머들과 부딪치게 된다. 이때 가상현실에서의 충격이 그대로 온몸에 전달된다.
 
직접 체험해보기로 했다. 우주선 문은 실제 사무실 문이다. 우주선 문은 만질 수도 있다. 이를 ‘혼합현실’이라 한다. ‘일루전워크’ 체험은 끝없는 심연에서 균형을 잡는 것으로 끝난다. 머리로는 가상현실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벌벌 떨면서 직접 체험해보니, 적어도 꿈의 세계에서는 이 가상현실에 실존한다고 느꼈다. 이 상태를 ‘림보’(Limbo)라 하는데, 절반은 현실이고 절반은 초현실인 일종의 자각몽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HMD를 벗고 숨을 폐 깊숙이 들이마신다. 갑자기 바닥과 벽이 현실에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내가 바닥과 벽을 통과해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불과 몇 분이었지만 몸의 모든 감각이 뼛속까지 뒤흔들렸다.
 
최신 가상현실 기술은 이마누엘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 동굴에 벽화를 그렸던 구석기인이 제기했던 아주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실제란 대체 무엇인가?’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나니, 가상현실에서의 불편함이 사라졌다. 원자와 일상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얼마나 고화질로 선명한지, 디테일로 가득한지를 알게 된 순간 놀라움이 생겼다. 역광 덕분에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이는 보푸라기 먼지, 튤립과 마루광택제의 향기가 나는 거대한 영화관. 이것이야말로 극강의 디스플레이다.

ⓒ Der Spiegel 2018년 14호
Idyll hinter der Brille
번역 김태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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