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한겨레> 사회부문 법조팀 기자
　
 이명박 정부의 ‘공정사회’ 담론이 국정의 주요 이슈로 확산되면서 검찰이 바빠지고 있다. 한화와 태광그룹 총수 일가와 이명박 대통령의 막역지간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수사를 통해 공정한 법 집행기관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태세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 권력인 이건희 삼성회장 앞에서는,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공정사회 담론도 검찰에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이 회장의 공정사회와 걸맞지 않은 행동에 대해 검찰은 언제나 그렇듯 관대하기만 하다. 최근 서울중앙지검은 증거인멸과 배임죄 등으로 경제개혁연대가 고발한 이 회장 관련 사건들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이건희 회장의 ‘법원 기망 행위’는 2008년 7월1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은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의 비상장 주식을 헐값에 발행해 두 회사에 손실을 끼친 혐의(배임)로 특검이 기소한 이 회장의 1심 판결을 닷새 앞둔 때였다. 이 회장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에 “오랫동안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회사의 손실 여부를 떠나 공소장에 피해액으로 기재돼 있는 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양형 참고 자료’를 제출했다. 유죄든 무죄든 재판 결과를 떠나, 특검이 주장하는 피해액 2509억원(삼성SDS 1539억원, 삼성에버랜드 970억원)을 모두 내놓겠으니 선처해달라는 것이었다.
 반성의 의미로 피해액 전부를 변제하겠다는 이 회장의 ‘약속’은 미담 사례일 수도 있겠으나, 이 사실은 1년 뒤 세상에 알려졌다. 이 회장이 재판부에 낸 ‘양형 참고 자료’가 2009년 7월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채 경제개혁연대에 우편으로 전달된 것이다. 이 회장이 법원에 한 약속대로라면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는 각각 1539억원, 970억원을 이미 회사 수입으로 잡아 회계 처리해야 했지만 당시 두 회사의 감사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었다. 변제 금액의 행방을 둘러싼 궁금증이 커지는 가운데, 이 회장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삼성SDS 건만 유죄로 인정됐고, 그 피해액은 227억원으로 줄어들었다.

▲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특검 사무실로 출석하고 있다.

본전 생각이 난 이건희 회장

 본전 생각이 난 걸까. 판결이 확정되자 이 회장은 애초 기소된 피해액수 2509억원 가운데 유죄로 인정된 227억원을 제외한 2282억원을 두 회사에서 돌려받았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4월 “(이 회장에게 돈을 돌려줌으로써) 삼성SDS와 에버랜드에 손실을 끼쳤다”며 두 회사의 대표이사를 배임과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수사 과정에서 삼성 쪽은, 재판이 끝난 뒤 사후 정산을 하자는 ‘세부약정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법원에는 “공소장 기재 금액 전부를 변제하겠다”고 해놓고, 자기들끼리는 “재판 끝나고 정산하자”는 ‘밀약’이 있었다는 얘기다. 법원을 속이기로 작정하고 ‘이면계약서’를 작성한 셈이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부장 이석환)은 “이건희 회장 쪽이 세부약정서를 첨부하지 않고, ‘공소장 기재 금원 지급 관련’ 서면만 재판부에 제출함으로써 법원으로부터 유리한 양형 판단을 받는 자료로 사용되도록 한 것은 사실”이라며 이 회장의 법원 기망 행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장 기재 금원 지급 관련) 서면은 이 회장 쪽이 법원에 양형 참고 자료로 제출한 것에 불과하고, 피해금의 지급과 사후 정산에 관하여는 별도로 이 회장 쪽과 두 회사가 작성한 세부약정서를 기초로 판단함이 상당하다”는 희한한 논리로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이 회장이 공소장에 기재된 피해액 전부를 변제한다면 ‘사후 정산’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은 법원에 낸 ‘양형 참고 자료’의 효력을 부정하는 이 회장과 두 회사 간의 이면 약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삼성이 아예 새로운 법률 규정을 만들어내는 사례도 있다.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과정에서 대표적인 증거인멸 행위로 꼽힌 삼성증권의 계좌개설신청서 무단 폐기 사건이 그것이다. 지난 2007년 11월14일, 삼성증권 본사 총무부서의 간부 이아무개씨는 전 지점에 “긴급·엄명”이라며 ‘10년 지난 계좌개설신청서는 폐기하라’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폭로에 이어 비자금 수사를 위한 검찰의 특별감찰수사본부가 구성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본사의 ‘엄명’에 따라 전국의 삼성증권 지점에서는 이날 상당수의 계좌개설신청서가 폐기됐다. 이는 ‘증권업감독규정’에 있는 ‘계좌 폐쇄일로부터 3년’이라는 보존 연한을 어긴 것이다. 그 뒤 구성된 조준웅 특검팀은 삼성증권에 대해 “증권거래법을 위반한 소지가 있다”며 2008년 2월 금융감독원에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에 착수한 금감원은 삼성증권이 계좌개설신청서 43만 장을 무단으로 폐기한 사실을 확인하고 삼성증권에 ‘기관 경고’, 배호원 사장에게 ‘문책 경고’, 간부 이아무개씨에게 ‘감봉 3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은 전·현직 임직원의 명의가 도용된 차명계좌에서 관리됐다. 이 때문에 신청인의 자필 서명이 담긴 계좌개설신청서를 분석하면 어느 것이 차명계좌인지를 특정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건희 비자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청서 자체가 유력한 수사 단서인데, 삼성 특검이 수사를 통해 확인한 이 회장의 903개 차명계좌 중 이날 폐기된 차명 계좌개설신청서는 무려 214개에 이르렀다. 경제개혁연대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배호원 당시 삼성증권 사장을 증거인멸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도 두려워하는 삼성의 힘

 그러나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 차경환)는 “증거를 인멸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금감원이 불법성을 인정하고 징계까지 내린 ‘무단폐기’를 검찰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은 옛 증권업감독규정의 단서 조항에 착안해 고객의 일반 정보 기록을 ‘영업에 관한 중요서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영업에 관한 중요서류의 경우 10년간 보존한다’는 상법의 규정을 따랐다”고 주장했다. 또 삼성증권 쪽은 10년 계산 시점(기산일)을 “내부 규정에 따라 계좌 폐쇄일이 아닌 개설일로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삼성증권 쪽은 ‘우리 회사에서도 계좌 개설일로부터 10년 뒤에 개설신청서를 폐기한다’는 다른 증권사들의 사실확인서도 제출했다. 결국 검찰은 “연말이 지나기 전 계좌개설신청서 폐기를 독려했을 뿐, 특검 수사와 관련된 증거를 인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이 여전히 삼성 앞에만 서면 꼬리를 내리는 이유는 뭘까. 수사 경력 15년의 한 중견 검사는 “삼성 쪽의 논리가 치밀하다”며 두려움을 나타냈다. 그는 “만약 검찰이 삼성 관련 사건에 특별수사팀을 꾸린다면 검사가 3명 정도 배치되는데, 삼성 쪽은 유능한 변호사가 10명 넘게 붙는다”면서 “그렇게 준비해서 만들어낸 논리는 깨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삼성은 법원과 검찰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엘리트 판·검사를 정기적으로 영입하고 상시적으로 법률 조언을 받는다. 여기에 사건이 터지면 국내 최대 변호사 집단인 ‘김앤장’까지 가세한다. 검찰 고위직 출신의 한 변호사는 “예전에 정몽구 회장이 구속된 현대차 사건이나 현재 수사 진행 중인 한화 수사에도 김앤장 변호사들이 투입되었지만, 지급 비용에서는 삼성과 차이가 많이 난다”고 말했다. 종합해보면, 삼성 법무팀과 김앤장을 이용한 법률적 대응 방식이 질적·양적 측면에서 다른 기업은 물론 검찰도 능가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 의지 부족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검찰이 삼성 쪽이 낸 자료 외에 별도의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한 게 있었느냐”며 “더 중요한 건 검찰의 엄정한 수사 의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