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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인접국 반대 집요했다
[In-depth]
[7호] 2010년 11월 01일 (월) 클라우스 비그레페 economyinsight@hani.co.kr

클라우스 비그레페 Klaus Wiegrefe <슈피겔> 기자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을 때 동독과 서독의 주민들은 환성을 질렀지만 다른 강대국에는 경고의 알람이 울렸다. 그들은 통일을 막거나 적어도 최대한 미루려고 시도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문서들이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6주 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는 노회한 두 명의 정치가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영국 중부 그랜트햄의 잡화상점 딸인 63살의 마거릿 대처는 한때 젊은 화학자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발명한 연구그룹의 일원이었다. 결혼 뒤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정치가가 되었고, 지금은 영국 총리가 됐다.

   
▲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서독과 동독의 시민들이 브란덴브루크 개선문 앞의 무너진 장벽 위에 올라 통일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크렘린궁의 주인인 그보다 6살 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남러시아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한때 수확기계 기술자로 일하다 정치에 입문해 소련 공산당 안에서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 소련의 국가 수뇌가 되어 크렘린궁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독일과의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가졌다는 것이다. 독일 전투기들이 12번에 걸쳐 대처의 고향을 폭격했을 때 어린 소녀이던 대처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손에 들고 식탁 밑에 숨어 있었다. 고르바초프 역시 침략군이 할머니를 심문하던 광경과 집단 총살의 화약 냄새, 그리고 그가 숨어 있던 외양간의 냄새를 잊지 못했다.
 
서방세계, 독일 통일에 반대하다

 1989년 가을에는 매주 월요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라이프치히 시내를 행진했고,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는 6천 명이 넘는 동독 시민이 서독 여행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서독 대사관에서 캠핑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찍은 사진들이 세계로 퍼져나갔고, 대처와 고르바초프도 두 개의 독일이 합쳐지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독일 통일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꺼냈을까? 소련 공산당과 영국 보수당은 대처와 고르바초프의 대담을 일절 기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양쪽 모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대처가 “저는 독일 통일에 절대로 반대합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처는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을 암시하면서 “한 서방세계의 지도자 역시 나와 같은 의견”이라고 덧붙였다. 소련 쪽의 기록에 따르면, 대처는 심지어 서유럽 전체가 자신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공식 발표는 독일 통일을 환영한다고 나오겠지만, 부디 고르바초프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고르바초프도 그에 동의했다. 대처가 이 안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잘한 일이며, 이제 양쪽이 ‘민감한 문제’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알게 된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그는 소련도 “영국만큼이나 독일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명백한 반독일 동맹이었다.
 그 뒤 몇 주간 동독의 붕괴가 진행됨에 따라 반독일 동맹도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나 동구와 서구가 맞서는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에 불안해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4개국뿐만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가 한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은 “또다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것처럼 공개적으로 독일 통일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나토와 유럽공동체(EC) 회의실의 닫힌 문 뒤에서 서독의 동맹이 실제로는 동독의 몰락을 바라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6번째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새로운 ‘범게르만주의’가 대두할 가능성을 경고했고, 네덜란드 총리 루드 루버스는 독일에 통일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에 의문을 품었으며, 프랑스의 미테랑은 유럽이 아직 독일 통일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여겼다. 이후에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동맹 국가들의 분위기가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회고했다. 물론 폴란드도 독일 통일을 환영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아무리 빨라도 1995년에나 생각해볼 여지가 있고, 그것도 되도록 늦으면 좋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맨 오른쪽)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오른쪽 두 번째),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왼쪽 두 번째) 등이 199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제거 10주년 행사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서독과 동독은 냉전시대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가장 중요한 전선 국가였다. 9개 국가에서 파견된 약 150만 명의 군인이 핵무기로 무장한 채 대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된 적이 없다. 평화조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엔헌장에는 독일에서 ‘공격적 정치’가 이뤄질 경우,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독일 땅에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허가했다.
 동독과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4개 국가의 동의 없이 그들의 국경을 변경할 수 없 었고, 연합국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통일 독일을 건국할 수도 없었으며, 승전국의 찬성 없이 베를린을 독일 수도로 지정할 수도 없었다. 소련은 심지어 필요할 경우 국제 외교는 물론 대서독 외교에서도 동독을 대신해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한마디로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의 속국이던 동독

 또 서독 총리가 미국 대통령에게 분단된 베를린을 보여주고 싶을 때는 원하는 대로 미 정부 수장과 함께 서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그 도시에서 손님이던 것은 미국 대통령이 아닌 서독 총리였다. 서독 시민이 베를린으로 여행할 때도 서방 강대국 소속의 비행기, 즉 팬암이나 브리티시에어웨이, 에어프랑스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연합국은 독일 소속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의 비행기가 함부르크나 쾰른, 뮌헨 등지에서 출발해 베를린에 도착하는 노선을 운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테랑 대통령은 독일에 대처 총리를 조심하라고 경고했고, 대처 총리에게는 독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보수파인 대처는 소련의 독재를 혐오했지만 모스크바 군대는 되도록 오래 동독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필요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미국 역시 냉철한 눈으로 그들의 국가 이익을 좇았고 나토 안에 통일 독일이 포함되기를 바란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토 주재 독일 대사가 미국 대사에게 그 의미를 묻자, 그는 미국의 요구에는 독일이 중립국이 되기를 바라는 모든 독일인에게 ‘경고하는 요소’가 포함돼 있다고 대답했다.
 
속고 속였던 외교 전쟁

 독일 외교관들도 속임수를 썼다. 1990년 4월9일 한 독일 정부 대리인은 모스크바에서 절대로 소련에 불이익이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아주 중요한 결의, 즉 모든 나토 동맹국의 동의하에 나토의 경계선을 동쪽으로 이동시키지 않는 내용의 결의가 이미 있었다”라고 말했다. 물론 다른 서방 동맹에 이런 결의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게임’에 참여한 것은 수백 명의 정치가, 외교관, 군 장성, 국제법 전문가, 비밀첩보원, 공무원 그리고 각 국가의 수장과 외무장관이었다. 헬무트 콜과 한스 디트리히 겐셔, 부시와 제임스 베이커,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트 셰바르트나제, 대처와 더글러스 허드, 미테랑과 롤랑 듀마, 그리고 여기에 동독 최후의 총리였던 로타르 드 메셰르와 역시 동독의 마지막 외무장관이던 마르쿠스 메켈이 참여했다. 동시에 나중에 미국 외무장관이 된 소련 전문가 콘돌리자 라이스나 오늘날 세계은행 총재가 된 미국 전문가 로버트 졸릭 같은 젊은 외교관들이 등장해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독일 외무장관은 통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이 역시 문서에 기록됐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 전에 이미 콜 총리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자유 민주당원 겐셔가 다음 총선이 있기 전에 세상을 떠날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겐셔는 여행 중에 심장리듬장애와 싸워야 했고, 한번은 협상을 중단해야 한 적도 있었다. 군의관이 옆방에서 그를 진찰하고 응급치료를 했다. 드라마틱한 나날이었다.
 독일을 건 거대한 포커 게임은 1989년 11월21일 춥고 축축한 화요일 아침에 소련이 내놓은 첫 번째 카드로 시작됐다. 니콜라이 포르투갈로프는 총리 관저에서 콜 총리의 안보보좌관 호르스트 텔칙과 면담할 예정이었다. 포르투갈로프는 소비에트 중앙위원회의 독일문제 담당 고문으로 매번 크렘린의 말을 은밀하게 전달했다. 커다란 안경을 낀 골초 포르투갈로프가 이번에 가져온 것은 7장 분량의 손으로 쓴 참고용 문서로, 문서에는 “그저 한번 생각해봤을 뿐, 알다시피 꼭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 콜 총리를 위한 ‘조언’이 적혀 있었다.
 베를린장벽은 이미 무너졌지만 동독은 아직 호네커 정권의 관료이던 에곤 크렌츠가 지배했고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동독의 헌법도 남아 있었다. 시위대들은 동독의 개혁을 요구했지 동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포르투갈로프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통에 따라 서방 국가들 사이에 약간의 분란을 발생시키려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그가 건네준 문서에 적힌 내용은 그런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고, 포르투갈로프의 이름은 특수임무장교로서 KGB의 급료지급명세서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바닥을 기고 있던 콜의 지지율

 포르투갈로프의 메시지는 “서독 정부는 독일 문제에 관한 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토에서 탈퇴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건 어떻겠는가? 공개적인 탈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모든 서방 국가의 핵무기가 독일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방식의 독일 연맹도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콜의 안보보좌관은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장벽이 붕괴된 지 2주 만에 소련 수뇌부가 독일 통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믿게 되었고 콜에게도 같은 의견을 전달했다.
 독일 총선이 약 1년 남은 시점에서 기민당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포르투갈로프의 ‘조언’을 접한 콜은 재집권을 위한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콜 총리는 곧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종합해 그 유명한 ‘독일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 방안’을 작성했다. 콜의 부인 한넬로레가 예전에 남편이 박사 논문을 쓸 때 사용한 올림피아 여행용 타자기로 문서를 타이핑했다. 콜은 이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할 생각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연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콜의 돌발 행동은 대부분의 동맹국을 화나게 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 겨우 3주가 지났고, 장벽 붕괴 직후에 독일 총리는 “안정 유지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의무이며, 독일 정부가 절대로 혼자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12월 초 유럽의 국가 수장들은 1970년대에 지은 콘크리트 건물인 스트라스부르 콘퍼런스 센터에 모여 앉았다. 콜은 자신의 회고록에 쓴 것처럼, “그토록 긴장에 가득 차 있고 불편한 분위기”였던 적을 그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했다. 아주 특이한 모임이었다. 마피아와의 연루설을 아직 전부 해명하지 못한 이탈리아 총리 안드레오티, 나중에 성희롱 파문으로 유엔에서 축출당한 네덜란드 총리 루버스, 정치적 경쟁자를 비밀정보국을 시켜 염탐하게 한 속을 알 수 없는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 등등.
 그들은 모두 역사의 반복을 두려워했지만, 통일된 독일의 경제적 힘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믿던 것처럼, 그들도 동독 경제는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아서 서독의 관리 아래 곧 찬란한 빛을 내뿜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첫 번째 회담에서 대처가 공격을 시작했다. “우리는 두 번 독일을 이겼습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독일 정부의 서방 동맹들은 지난 몇십 년간 독일 재통일을 환영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대처는 “그것은 재통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한 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페라가모 핸드백 속의 독일 지도 

  콜이 게임의 첫 번째 라운드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독일의 편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대처와 미테랑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회동의 주제는 독일이었다. 프랑스 대통령이 말하듯이, 이 민족은 단 한 번도 진정한 국경선을 가진 적이 없었다. 대처는 검은색 페라가모 핸드백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해온 독일의 국경선을 표시한 지도를 꺼냈다. 두 사람은 이제 행동을 취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동독은 그 사이 개혁주의자인 한스 모드로가 총리 자리에 올랐지만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SED)에서는 당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동독 시민들이 점점 더 많은 진실을 발견하게 됐기 때문이다. 시민에게 검소한 사회주의를 설교하던 SED의 늙은이들이 개인적으로는 서독에서 밀레 세탁기를 주문했고, 비밀경찰 슈타지는 양심의 가책 앞에서도 첩보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동독의 국고는 비어 있었다.
 드디어 1989년 11월 말 처음으로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승전국들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소가 서베를린의 로맨틱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공원에 위치한 대법원이었다. 냉전으로 인해 연합국이 서로 멀어지기 전인 1945년까지 독일의 최고 통치권을 장악한 신탁통치위원회가 열렸던 곳이다.

   
▲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그는 끝까지 독일 통일을 방해하려고 했다.

 1989년 12월11일 영국, 프랑스, 소련 그리고 미국의 대표자들이 다시 이곳에 모였다. 단지 각국 대사들의 모임이었고 베를린의 상황에 대해 상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했지만, 4명의 남자가 모인 사진은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히틀러를 쓰러뜨린 이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었다. 며칠 뒤 겐셔는 화가 나서 서방 국가의 외무장관들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베를린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인들과 토론해도 상관없지만 그곳에서 독일 통일을 논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외무장관 베이커는 겐셔의 팔에 손을 얹고 “한스 디트리히, 우리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직전 콜은 모드로와 동·서독 간의 항공 운항 노선 확장에 합의했다. 그러자 미국 특사가 공식적으로  총리 관저에 찾아와 동·서독 간 항공 운항은 연합국의 소관이라고 간섭했다. 책망을 들은 독일 관리는 “그의 어투가 상당히 험했고, 사전 상담이 없었던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고 기록했다. 얼마 뒤 진짜로 큰 충돌이 있었다. 워싱턴에서 독일·프랑스·미국·영국 외무부의 고위 관리들이 회담을 했는데 독일에서는 베스트팔레 디커 카스트루프가 참여했다. 직업외교관 카스트루프는 오늘날에도 승전국들이 독일이 없는 자리에서 독일의 운명에 대해 즐겨 논의하는 것에 분노했다.
 카스트루프는 회의가 끝난 뒤 기밀문서를 작성했다. 문서에 따르면, 미국 대표자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표자와 마찬가지로 ‘4강 책임제’를 지지했다. 동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4강 시스템이 정치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카스트루프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1990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이 모여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게임에 참여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지닌 ‘독일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실용주의자로 알려졌고, 스스로도 “당시에 확실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보좌관들의 의견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1989년 12월 초 미국은 “통일 독일이 나토에 포함될 경우에만 통일에 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외교관들은 이것이 독일 통일을 21세기 이후로 미루기 위해 만든 속임수가 아닌지 의아해했다. 그럼에도 콜 총리는 그에 동의했다. 그는 도미노 이론의 신봉자였다. 독일이 중립국이 되면 나토가 무너질 것이고, 나토가 없어지면 미국이 유럽에서 사라지고, 핵보유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더욱 강하게 뭉칠 것이다. 이런 상황은 독일 총리라면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콜은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이 되면 부시는 약속을 지킬 것이고,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으로 판단했다.

통독의 중립국 지위 부여에 반대한 미국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과 나토 회원국 가입을 받아들일 것인가? 소련 군대는 여전히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참여하는 동독에 주재했고, 고르바초프는 아직도 SED에서 나온 새로운 좌익 정당이 동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것이 1990년 초의 상황이었다. 유럽은 독일 통일에 반대하고, 미국은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며, 소련은 훼방을 놓고 있었다.
 크렘린의 수많은 매파는 독일 상황이 악화돼 소련 군대의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기를 바랐다. 정치학자 라파엘 비어만의 조사에 따르면, 한 소련 기갑 연대는 1990년 1월 동독의 시위대들이 슈타지 본부에 진입했을 때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 중 누구도 총을 쏘지도, 바리케이드를 만들지도, 돌을 던지지도 않았다. 경찰이 오면 시위대는 “폭력 금지”를 외쳤다. 콜과 겐셔에게 동독의 평화로운 시위대보다 더 나은 동지는 없었다. 세계의 권력자들을 압박한 것은 콧부스, 귀스트로브, 라이프치히의 소시민들이었다.
 1990년 1월 말에는 매일 시민 2천여 명이 동독을 떠났다. 대다수는 젊고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드로의 진심이 보이지 않는 개혁과 슈타지를 이용한 감시, 그리고 계획경제 체제에서 누구도 더 이상 계획된 것을 이행하지 않고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세태에 환멸을 느꼈다. 이는 서독 정부에는 환영할 만한 카드였다. 게임에 참여한 다른 큰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바로 독일의 내정 불안이었다. 1933년 이래로 누구나 독일의 내정 불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겐셔는 이 상황을 훌륭하게 이용했다. 그는 항상 동독의 상황을 매우 불안정하며 혼란이 예상된다고 다른 국가의 외교관들에게 말했다.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언제나 단 한 가지, 통일뿐이었다.

포커판의 분위기가 바뀌다 

 이제까지 쿨한 태도를 보여온 미국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베이커 외무장관은 “독일인은 통일을 자기들끼리 합의해버리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또 다른 소식이 당시 워싱턴 정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필이면 나토에 비판적인 오스카 라퐁텐이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총리 후보가 될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라퐁텐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날 걱정스럽게 만든다”고 말했다.
 서독 주민 중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이 되는 데 찬성하는 수는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은 미 군대가 유럽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신뢰할 수 있는 콜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지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포커판의 분위기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대처와 미테랑도 이젠 오직 물리적인 힘만이 독일 통일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독일 안티’조차도 원하지 않은 것이었다. 미테랑은 자신이 프랑스를 위해 얻어내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콜에게 유로화를 예정보다 빠르게, 독일 총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조건으로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대처에게는 이 옵션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처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태도 외에 이후의 진행 과정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제 고르바초프의 차례였다. 그는 1월 말 그의 사무실에 당과 외무부, KGB, 군대 그리고 정부 수뇌들을 모이게 했다. 그들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앉아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동독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고 한탄했다. 돈으로 동독을 도울 수 있었지만,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아무런 성과가 없어 외환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2월 중순 콜은 장벽 붕괴 뒤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고르바초프는 간단하게 “독일인은 그들이 어떤 길을 가고 싶어하는지 스스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콜에게 말했다. 대화를 기록하던 콜의 보좌관은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받아적기 위해 손이 날아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속으로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1990년 겨울 소련에는 독일 게임을 위한 전략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겐셔는 이 진공상태를 마음껏 이용했다. 누가 독일 통일의 최종 게임에 참여할 것인가? 통일 독일의 국경은 누가 결정할 것인가? 나토 회원국 가입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통일 독일이 주권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가지게 될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서방세계는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

   
▲ 200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 제거 2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유럽연합 관계자들이 베를린장벽을 상징하는 대형 도미노 블록을 쓰러뜨리고 있다.

‘4+2’ 회담을 ‘2+4’로 바꾼 외교력

 우루과이·사우디아라비아·레바논까지 포함한 1945년의 53개 전쟁 상대국과 평화조약을 맺는 방법이 있지만, 이는 독일에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참여국이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고, 모든 절차는 많은 돈이 들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또 다른 안은 4강 연합 회의에 독일이 일종의 준회원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1955년에도 이미 한 번 있었다. 하지만 겐셔는 “나는 독일의 외무장관으로서 그런 회의에 참가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위협했다. 모든 민족에게는 지켜야 할 품위가 있다는 것이다.
 겐셔는 공식을 바꿨다. 4개 승전국의 회담에 2개 패전국이 참가하는 것이 아닌, 서독과 동독의 회담에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4개국이 참가하는 것으로 하자는 거였다. 그리고 이는 되도록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여기에 참여하려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겐셔는 서방세계의 외무장관들을 눈이 가득 쌓인 독일 대사관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권리를 가진 6자회담이 곧 열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겐셔와 베이커가 셰바르트나제를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루지야 출신의 셰바르트나제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셰바르트나제는 모스크바와 통화를 거듭했고, 심지어 독일 외무장관이 있는 자리에서도 통화를 했다. 결국 셰바르트나제가 동의했다.

최종 게임을 향한 승부수 

 드디어 최종 게임이 시작됐다. 3월 중순 이후 2+4개국 대표들이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국을 대표하는 고위급 외교관이었다. 그들은 타협점을 찾아내야 했다. 외무장관들은 나중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따로 만났다. 협상 기록에 따르면, 소련은 계속 통일 독일에 한 단계 낮은 특별 지위를 부여하려고 시도했다. 모스크바의 외교관들은 포커 게임의 대가였다. 그들은 인상적으로 이마에 주름을 잡을 수도, 목소리를 낮춰서 위협하듯 말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전략은 게임 참가자가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고르바초프와 셰바르트나제는 그들이 이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독 헌법의 제23조를 놓치고 있었다. 이는 지난 40년간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조항이었지만, 이제 사람들이 온 정성을 다해 연구하고 있었다. 제23조는 거대한 조커가 될 수 있었다. 소련이 시간을 끌고, 영국이 깃을 곤두세우고, 프랑스가 음모를 꾸며도 제23조에 대항해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이 조항에는 동독의 모든 주가 언제라도 서독의 독일연방공화국에 참여할 수 있다고 돼 있었다. 필요한 것은 단지 인민의회의 결정뿐이었다. 그리고 그해 3월18일 동독에서 치러진 자유선거에서 통일을 찬성하는 당이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었다. 7월 초에는 동독에 독일 마르크화가 도입됐고, 서독 법체계 도입에 관한 논의가 진행됐다.
 소련은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소련의 경제위기는 1990년 봄에 더욱 심화됐고, 위기에 처한 고르바초프는 금을 팔고 심지어 다이아몬드 채굴권까지 팔았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국가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다. 고르바초프는 차관을 얻어야만 했다. 이는 독일에 완벽한 기회였다. 부시와 대처는 무너져가는 소련 경제에 돈을 쏟아부을 생각이 없었고, 프랑스의 경제력은 차관을 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콜에게 크렘린 제국이 지금 병상에 누워 있으며 약 200억마르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콜과 겐셔는 소련에서 원하는 차관의 4분의 1밖에 제공할 수 없지만 결국 차관을 주었다. 물론 이 돈은 공짜가 아니었다. 겐셔는 “독일은 재통일을 원하고 소련은 경제 개혁을 원한다”고 셰바르트나제에게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리고 부시와 토론하는 중에 갑자기 “독일이 연방 가입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말해, 그처럼 일찍 소련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국 대통령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부시는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현장에 있었던 라이스의 증언에 따르면, 몇몇 보좌관이 고르바초프에게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시를 재촉했다. 부시는 다시 한번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또 한 번 반복했다. 가장 큰 문제가 풀린 것이다. 미국 대통령은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6주 뒤 콜과 겐셔는 고르바초프를 방문해 다른 문제들을 해결했다. 독일은 통일과 동시에 주권을 되찾고, 소련군은 최대 4년 안에 동독에서 철수하며, 새로 독일 연방에 가입한 옛 동독 주들의 군사적 지위는 일반적인 나토 군대와 같게 될 것이다. 다만 그곳에 나토 소속 외국 군대가 주둔해서는 안 되고 핵무기가 배치돼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배신감을 토로한 고르바초프

 2+4개국 협상 대표들은 이후 아주 빠르게 일을 진행해나갔다. 남은 것은 돈 문제뿐이었다. 8월에 거래가 시작됐다. 러시아인은 360억마르크를 요구했고 독일은 30억마르크를 제시했다. 요구가 185억마르크로 줄어들고, 그에 대한 제안은 60억마르크로 늘어난 시점에서 양국의 수장들이 협상을 주도했다. 9월7일 그들은 전화 통화를 했다. 콜은 80억마르크로 올렸고 고르바초프는 격분했다. 그는 “함정에 빠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콜은 “이렇게는 서로 대화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대답했다. 양쪽 모두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3일 뒤 콜은 최대 120억마르크를 제시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된다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협상해야 할 것”이라며 콜을 위협했다. 여기에 콜은 무이자 차관 30억마르크를 덧붙였고 고르바초프는 그에 동의했다.
 고르바초프는 이것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독일인 외교관이 적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상인도 아니고 협박범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련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모두 합해 약 550억마르크였다. 이를 마련하는 데 1990년의 서독인들은 단지 8일간만 추가로 일하면 됐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려던 대처 

 독일 게임의 마지막 순간은 영국이 차지했다. 그들은 장벽이 아직 있을 때에도 통일에 반대했고, 소련이 이미 통일에 동의한 뒤에도 반대했다. 1990년 9월11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돼가는 것처럼 보였다. 인민회의는 헌법 제23조에 따라 10월3일 연방에 가입하기로 결의했다. 그 전에 모스크바에서 외적인 독일 통일에 대한 2+4 조약에 서명하기로 돼 있었다. 6개국 외무장관들이 소련의 수도에 이미 도착해 있거나 오는 중이었다.
 겐셔는 아주 좋은 기분으로 영국 외무장관 더글러스 허드와 독일 대사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겐셔는 캐비어를 내오도록 지시했다. 대처의 외무장관은 마지막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영국은 서방 강대국을 위해 꼭 옛 동독 지역에서 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 했고, 소련은 그것을 반드시 저지하고자 했다. 말도 안 되는 다툼이었다. 허드는 영국이 더 이상 문제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겐셔는 행복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그때 복도에서 카스트루프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좋은 기분이 금방 사라지실 겁니다.” 영국인들이 허드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에 소련 쪽에서 내일로 예정된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대처가 런던에서 지시를 내린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겐셔는 즉시 베이커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미국이 영국에 자제를 요청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미국 장관은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자고 있었고 그의 직원들은 그를 깨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겐셔는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서 필요하다면 직접 베이커를 깨우겠다고 전했다. 다시 심장병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겐셔는 새벽 1시에 택시를 타고 미국 외무장관이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갔다. 피로에 지친 텍사스 출신의 베이커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회갈색 목욕 가운을 입은 채 그들을 맞이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다음날 아침 영국인들이 자신의 요구 사항을 철회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낮 12시45분에 드디어 게임의 마지막 장면이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외무장관들과 겐셔, 그리고 동독의 총리이자 외무장관 역할도 하는 데메지에르가 ‘독일에 관한 최종 합의 조약’에 서명했다. 예식은 매우 간소했다. 서명식이 치러진 방에는 꽃병조차 없었다. 그게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독일인 말고는 아무도 이 일을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
ⓒ Der Spiegel
번역 황수경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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