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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문화장벽 넘는 언어통행증
[Culture & Biz]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오역 소동이 남긴 것
[98호] 2018년 06월 01일 (금)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연일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관객몰이에 한창인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오역 소동은 한국 번역계의 고질적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일부 번역가의 독과점과 하청 구조는 신진 번역가의 시장 진입을 봉쇄하고 번역 질을 떨어뜨리는 주요인이다. 이번 소동을 번역계의 ‘고인물’을 빼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 서울 시내 영화관에서 예매표를 출력하고 있는 관객들. 연일 흥행 신기록을 쓰고 있는 영화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는 오역 소동으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연합뉴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타인과 나누기 위한 소통 체계다. 생각과 감정의 근본적 구조에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체계적 형식으로 구현된 언어는 정말 다양하다. 현재 지구에는 약 6909개의 언어가 있는데 1천만 명 이상 쓰는 언어는 85개라고 한다. 성서에는 하나의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말이 통하지 않게 만들었고, 사람들이 결국 바벨탑 쌓기를 포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이 인류에게 내린 벌이든, 지리적 거리에 의한 개별 진화든, 언어가 많아지면서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에 장벽이 생겼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의사소통의 벽으로 ‘문화권’이 나뉘었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 실시간 영상통화가 가능한 지금도 언어가 여러 국가와의 문화 교류에서 큰 장벽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2018년 4월 말 개봉해 마블 유니버스 사상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을 경신 중인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오역 소동은 이런 장벽이 빚어낸 사건이다. 맥락과 다른 오역에 흥분한 마블 팬덤이 해당 번역가의 과거 오역 사례까지 들춰냈고, 급기야 그의 영화계 퇴출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 7천 명 가까이 동의하는 사태까지 낳았다. 이 청원이 직접적 강제력은 없겠지만, 배급사는 물론 많은 영화 관계자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콘텐츠업계에서 오역 소동이 처음은 아니다. 많은 외국 영화나 출판물이 오역으로 팬들의 항의를 샀다. 언론매체들도 외신 번역·인용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러 의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정치적 음모론을 낳기도 했다.
 
의역과 오역 사이
여러 국가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번역이다. 크게 국제 계약서나 외교·행정 문서 등의 공공 번역과 문화 번역으로 나뉜다. 원문을 얼마나 오차 없이 번역하느냐가 중요한 공공 번역과 달리, 문화 번역에선 그 나라의 문화에 맞게 맥락과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번역물 자체가 또 하나의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 번역을 다른 문화를 넘나들게 해주는 ’문화 통행증’으로도 비유한다.
 
최초의 문화 번역은 외국 선교에 나선 선교사의 성서 번역이라고 한다. 문화 번역 역사를 살펴보면 여러 형태가 나타나는데 ’번안’도 그중 하나다. 자국인이 외국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배경과 등장인물 등의 이름을 자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에선 1900년대 초반에 인기를 끌었다. 최초 번안 소설로 알려진 이해조의 <철세계>는 유명한 프랑스의 모험 소설가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이 원작이다. 과학소설인 원작과 달리, 당시 유행하던 계몽소설 요소가 많고 번안가가 변형·축소·생략한 대목도 적지 않다.
 
지금 시각에선 번안을 ‘오역’이나 ‘도작’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번안이야말로 문화 번역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외국 문물에 익숙지 않던 대중은 외국 고유명사를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정서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직접적 언어 의미의 전달보다는 창작물이 지닌 감정이나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는 문화 번역의 본질적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형식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못된 번안은 문화 번역의 의미를 퇴색시키기도 한다.
 
원작을 크게 훼손하는 번안은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콘텐츠가 사람의 일상을 반영하는 것이다보니 지금도 일종의 번안이 필요한 때가 있다. 번역가들은 비속어나 유머 번역을 가장 어려워한다. 일상 대화는 그대로 번역해도 의미 전달에 크게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말장난, 농담, 유행어, 비꼬는 말, 비속어 등은 해당 언어에 특화된 유머 코드나 언어 표현으로 바꾸지 않으면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 수입 영화를 볼 때 별로 웃기지 않는 장면이라 한국인은 잠잠한 반면 외국인은 폭소를 터뜨리는 일이 가끔 있다. 수입 영화에서 유머 코드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원문을 만나면 많은 번역가가 거의 창작 수준의 고민을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원문 메시지나 맥락 등을 이해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문구를 만들어내면 대중에게 ‘좋은 번역’으로 인정받게 된다. 정말 기발하고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 번역이 있는데, 주로 인터넷에서 젊은 누리꾼 사이에 회자되는 ‘초월 번역’이 그것이다. 초월 번역이란 정말 번역하기 힘들어 보이는 원문을 맛깔나게 옮긴 것을 말한다. 누리꾼 표현을 빌리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번역이다.
 
몇 년 전, 한 아마추어 번역가가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비속어가 담긴 대사를 맛깔스러운 표현으로 바꿔 많은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 적이 있다. 그 표현은 유행어가 돼 당시 인기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쓰이기도 했다. 초월 번역 사례들을 보면 ‘초월’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무방할 만큼 번역가의 재치와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이런 번역은 언어 측면에선 의역을 벗어난 오역에 가깝지만, 콘텐츠 측면에선 원작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장식이 된다. 2016년 소설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국제상을 탔을 때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도 함께 수상하며 각광받았다. 당시 번역이 좋지 않았다면 원작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한국인 최초의 맨부커 국제상 수상이라는 쾌거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견이 많았다.
 
초월 번역에 대해 번역 범위를 벗어났다는 비판도 많다. <채식주의자> 영역판에 대해 일부에서는 심각한 오역이 많고, 몇몇 대목은 ‘윤문’ 범위를 벗어나 번역가가 거의 창작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데버러 스미스는 이에 대해 “직역이란 없고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이란 없다”고 응수했다. <채식주의자> 논쟁에서 보듯, 원작의 맥락과 뉘앙스를 아우르며 다른 언어 사용자도 공감하는 번역은 외국 콘텐츠 소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남용되면 원작이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들은 초월 번역과 원작 훼손의 경계에서 교묘하게 줄타기하는 어려운 일을 하는 셈이다.
 
   
▲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가 2016년 6월19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학번역원 주최로 열린 '2016 한국문학 세계화 포럼'에 참석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문화 번역’의 명암
번역가 임무가 이렇게 중요하지만, 한국에서 대우는 신통치 않다. <어벤져스> 오역 소동을 거치며 ‘번역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며 한국 번역계의 암울한 현실을 토로하는 번역가들도 있다. 문제의 번역가가 특정 배급사 영화를 10년 이상 맡으며 일종의 독과점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해당 배급사에선 실력이 검증된 사람과 계속 일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견해를 보였지만, 이미 많은 실수를 저질러온 번역가를 계속 쓴 것이 이번 소동의 주요 원인이라는 게 팬들 의견이다.
 
많은 사람이 이번 소동을 한국 문화 번역계의 ‘고인물’을 빼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 ’잘나가는’ 번역가들이 일감을 독점하고 하청을 주는 현재 같은 구조에선 한국 문화 번역계가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이 성장하려면 다양한 배경이 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필요하다. 한국 문화 번역계에선 새 사람이 시장 진입조차 하기 힘든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이것이 신진 번역가 등장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요즘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이 많다. 외국어 구사가 특수한 능력이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간단한 문장은 자동번역기가 처리해주고, 휴대전화 음성 인식·번역 서비스도 활발하다. 그럼에도 외국 콘텐츠를 즐기려면 여전히 번역에 의존해야 한다. 해당 언어를 100% 모국어처럼 쓰지 않는 한 언어의 뉘앙스가 다양한 콘텐츠 특성에 비춰 꼭 필요한 것이 번역이다. 자막이든 더빙이든 번역을 통한 ‘현지화’가 요구된다.
 
문화 번역의 질은 외국 콘텐츠를 한국에 들여오는 때 말고 한국 콘텐츠를 외국에 내보낼 때도 고려해야 한다. 한류가 더 많은 나라에서 유행하고 문화적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는 한국어에 능한 외국 전문 번역가를 많이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콘텐츠업계에서 나온다. 현재 출판 번역계를 중심으로 문화 경쟁력 제고와 문화 수출 등에 큰 구실을 하는 번역의 중요성이 확산되고 있다. 이미 ‘번역청’을 두고 국가적으로 공공 데이터베이스 차원에서 번역을 관리하는 중국을 본받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에서도 번역을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번역청 또는 번역진흥원 같은 국가 지원기구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 앞서 프리랜서들이 번역가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목소리와 움직임은 모두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오역 소동에 따른 번역계의 작은 나비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고 다국어 번역이 지금보다 더 진화한다면 이번 같은 소동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벨탑을 세워 신에게 도전하려 했던 사람들의 어리석음 탓에 생긴 언어의 장벽을 완벽하게 해소할 수 없는 한, 역량이 뛰어난 문화 번역가의 양산은 콘텐츠 산업계의 숙제다. 불필요한 소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번역이라는 제작 공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문동열은 영상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 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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