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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패권적 통화정책이 근본 원인
[Finance] 가시화하는 신흥국 통화위기
[98호] 2018년 06월 01일 (금) 윤석천 maporiver@gmail.com

미국의 금리 인상이 촉발한 신흥국 통화위기가 가시화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터키에선 자금 이탈이 본격화하면서 통화가치가 폭락하고 금리가 최고 40%까지 뛰었다. 미국의 ‘재채기’가 신흥국을 ‘독감’에 빠뜨리는 사태가 재연되고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신흥국의 경제체질이나 환율제도가 아니라 무분별한 자본 유·출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 페소 가치 급락으로 통화위기를 맞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시민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은행 건물 앞에서 “구제금융 반대” 시위를 벌이는 도중 음식을 나누고 있다. REUTERS
미국은 기존 23개 무역 법안을 광범위하게 개정한 ‘무역촉진법 2015’를 201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7편 ‘BHC(베넷-해치-카퍼) 법안’이 핵심이다. 이 법안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의 환율 개입이나 조작에 강력한 보복책을 마련했다.
 
미국은 왜 강력한 법안을 마련한 걸까? 목적은 자국 산업 보호에 있다. 통상 환율이 높게 유지될수록, 즉 자국 통화 가치가 낮을수록 수출경쟁력이 높아진다. 미국은 이를 경계한다. 환율시장에 개입해 인위적으로 자국 통화 가치를 끌어내려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나라에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다.
 
나머지 국가들은 억울하다. 미국은 위기 때마다 ‘달러 찍기’로 극복해왔다. 이 돈의 상당액이 미국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흘러갔다. 2008년 금융위기 뒤 미국이 방출한 달러만 해도 2015년 말까지 약 4조5천억달러(약 4847조원)에 이른다. 천문학적인 액수다. 전세계 달러 유통량의 3분의 2는 미국 국경 바깥에서 유통된다. 그 때문에 달러 유입국 환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밀려드는 달러로 해당 국가의 통화가치가 오른 것이다. 그만큼 수출경쟁력을 잃었다.
 
그런데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서 상황이 급격히 반전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달러 유입이 끊기고 유출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해당국 환율이 오르면서 통화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수출경쟁력엔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자본유출 고통이 시작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 외국 금융시장이 발작 증상을 보이고 있다. ‘신흥국 10년 위기설’까지 불거졌다. 아르헨티나는 페소 가치가 급락하자 2018년 5월 초 일주일 사이 세 차례나 금리를 올려 기준금리를 40%까지 끌어올렸다. 이란은 암시장 외환거래를 중단했다. 준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홍콩은 빠져나가는 달러를 막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퍼부으며 환율을 방어하고 있다. 5월 초 터키 리라화, 남아프리카 랜드화, 브라질 헤알화 등 신흥국 통화가치가 일제히 하락했다.
 
미국의 긴축에서 시작된 신흥국 통화 위기가 다시 가시화하고 있다. 신흥국은 금리를 올려 보유한 달러를 풀며 통화 방어를 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1998년 같은 신흥국 위기가 다시 발생할 거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금리를 올리고 환율조작국에 제재를 한다. 하지만 달러 흐름이 만들어내는 다른 나라, 특히 신흥국의 불안과 위기에는 눈감고 있다.
 
   
▲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환전소 직원이 100달러 짜리 미국 지폐를 내보이고 있다. 외국 자본의 무분별한 유출·입은 신흥국 통화위기의 첫 번째 위험 요소다. REUTERS
고정환율제가 대안?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고정환율제를 옹호한다. 변동환율제에서는 자본 유·출입에 따른 환율 변동을 피할 수 없다. 급변하는 환율은 경제 불안 요소이기에 차라리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하자고 주장한다.
 
고정환율제는 자국 통화를 다른 통화에 고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통화’란 보통 달러처럼 가치가 안정적인 통화를 말한다. 고정환율제는 로프를 사용해 두 통화를 묶어놓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한국이 고정환율제를 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환율은 1달러 대 1천원으로 정했다. 이 상황에선 환율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아니라 정책 당국의 인위적 변경이 없는 1달러당 1천원으로 고정된다. 다만 달러 가치가 변하면 연동된 원화 가치도 바뀐다. 다른 통화에 대해 그렇다는 얘기다.
 
고정환율제는 장점이 있다. 우선 거래를 예측할 수 있다. 환율 급변은 수입가와 수출가에 큰 영향을 준다. 이 경우 경제주체는 환율 변동으로 심각한 불확실성에 놓인다. 고정환율제는 이런 불확실성에서 자유롭다. 정책 당국의 변경이 없는 한 환율 변동이 없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정환율제는 물가 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이퍼인플레이션 대응책이 될 수 있다. 환율이 급등할 우려가 없어 수입 물가가 급변하는 상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셋째, 고정환율제를 시행할 때 인위적으로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해놓으면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외국자본 유입이 급증하더라도 자국 통화 가치가 오르지 않기에 수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고정환율제 작동 방식이다. 환율을 고정하려면 중앙은행을 비롯한 당국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자국 통화의 공급과 수요를 인위적으로 통제해 시장의 영향을 상쇄해야 한다. 홍콩이 대표적 사례다. 홍콩 달러는 미국 달러에 고정돼 있다. 홍콩 통화 당국은 홍콩달러 가치를 항상 주시한다. 쇼핑 시즌이 다가와 홍콩달러 수요가 많아질 것 같으면 시중에 팔고 미국 달러를 사들인다. 홍콩달러 가치를 낮추기 위해서다. 반대로, 홍콩에서 자금이 빠져나갈 땐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를 열어 미국 달러를 풀고 홍콩달러를 사들인다.
 
바로 여기에서 고정환율제 문제가 일어난다. 중앙은행은 정책 결정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 홍콩 금리는 미국 금리를 좇아가야 한다. 홍콩달러를 미국달러에 고정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뒤 미국이 경기침체로 고통에 빠졌을 때 홍콩은 중국 성장 덕분에 호황을 맞았다. 홍콩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를 올려야 했으나, 미국의 저금리를 따라 낮게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통화정책 독립성을 잃는다.
 
또,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외환을 사들이는 순간 자국 통화가 시중에 풀린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 위협이 가중될 수 있다. 반대로, 외환보유고가 고갈되면 큰 혼란이 온다. 외국 돈을 구하기 어려워져 공식 환율과 차이가 큰 암시장이 생기게 된다.
 
사실, 고정환율제는 신흥국 위기의 단초였다. 대표적 사례가 타이의 바트다. 통화위기를 겪은 타이는 1990년대 말 어쩔 수 없어 고정환율제를 폐지했다. 타이는 1980년대에서 1996년까지 고도성장을 했다. 통화가치를 올려야 했지만, 타이 당국은 수출경쟁력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96년부터 성장이 둔화됐다. 통화가치를 내려 수출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압력이 세졌으나 타이 정부는 저항했다. 헤지펀드들이 바트 절하에 천문학적 돈을 걸며 투기에 나섰다. 타이 정부는 바트 가치 안정을 위해 수십억달러를 쏟아부어 바트를 사들였다. 결과는 외환보유고 낭비로 끝났다. 1997년 7월2일 타이은행은 마침내 고정환율제를 폐지했다. 바트는 그해 10월24일 달러 대비 60% 정도 가치가 떨어졌다.
 
바트 절하는 남동아시아 통화가치 급락으로 이어졌다. 말레이시아 링깃, 필리핀 페소, 인도네시아 루피아 등의 절하가 이어졌다. 1997년 가을 혼란은 한국, 홍콩, 중국까지 퍼졌다. 1998년엔 러시아와 브라질로 옮겨갔다.
 
위기 원인은 고정환율제에 있었다. 외국자본 유입기에 타이가 바트 절상을 용인했다면 위기가 닥쳤을 때 충분히 가치를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는 고정환율제를 고수하며 버텼다. 그것이 마침내 아시아의 금융위기로 확대된 것이다.
 
이런 일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석유 수출국이다. 석유 호황기에 밀려드는 외부 자금으로 자국 통화 가치를 올려야 했는데 수출경쟁력 유지를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나이지리아 화폐 나이라의 가치는 급락세를 보였다.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은 2014년 말~2016년 6월 나이라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의 약 20%를 투입했다. 결과는 뻔했다. 견디다 못한 나이지리아 정부는 2016년 6월 마침내 고정환율제를 폐지했다. 동시에 빠져나가는 자본을 붙잡고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7월 기준금리를 12%에서 14%로 올렸다.
 
무분별한 자본 유·출입이 문제
고정환율제는 대부분 신흥국에서 위기 발생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를 환율제도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세계화된 오늘, 자본 유·출입을 막는 방법은 거의 없다. 기축통화국은 주기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고 회수해간다. 시절이 좋을 때는 막대한 자본이 밀려온다. 장밋빛 호황을 낳는다. 자산시장은 대부분 폭등하며 풍부해진 돈 흐름은 놀라운 성장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때가 좋지 않거나 기축통화국이 긴축으로 돌아서면 그만큼 자본이 빠져나간다. 자산은 오른 이상 내리기 마련이며 고도성장은 멈춘다. 자칫 경제가 침체로 돌아선다.
 
이 상황은 변동환율제를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고정환율제보다 경기 조절에 좀더 유연할 뿐이지 자본 유·출입에 대한 근본 대응책은 아니다. 신흥국은 어떤 환율제를 택하더라도 급변하는 자본 유·출입을 방어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환율제도에 있지 않다. 기축통화국의 무분별한 통화 팽창과 회수에 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신흥국이 주기적 위험에 빠지는 것이 현대 국제경제 체제다. 신흥국 처지에서 그 위험을 피한다는 것은 현재의 달러 기축통화 시스템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이 정도면 기축통화국의 패권적 통화정책에 맞서 국제적 논의가 필요한 때다.

 

* 윤석천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금융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융 관련 책들을 썼으며, 특히 외환과 관련해 많은 강의를 해왔다. <한겨레> ‘세상읽기’를 연재했으며, 현재 팍스TV <이슈포커스>에 출연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를 그리워한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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