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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눈먼 돈’이 도약 자양분
[Culture & Biz ] 거품경제의 역설
[97호] 2018년 05월 01일 (화) 김윤지 yzkim@koreaexim.go.kr

 어떤 산업에든 자금이 모인다는 것은 큰 기회다.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거품’이 곧 사그라들겠지만, 기회를 잘 살리면 자양분이 되곤 한다. 거품이란 표현에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지만, 실제 엄청난 해악을 남긴 거품은 역사에서 손꼽을 정도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한국 영화는 거품경제가 한창일 때 넘쳐나던 자본 덕분에 성장한 대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네덜란드 서부 덴헬더르 튤립 농장 위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17세기 튤립 투기 광풍은 거품경제 사례로 가장 많이 거론된다. REUTERS
최근 한국 드라마의 남자 주연배우 품귀 상황을 쓴 지난호 글에 의견을 보내온 분이 많았다. 까다로운 선택과 결제를 거쳐야 하는 영화와 달리, TV 드라마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탓에 품평하는 사람도 의견도 다양했다. 갑론을박으로 이어지는 내용 가운데 선뜻 반박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어떤 요인에서든 드라마 제작이 늘어난다면 더 많은 스타가 탄생할 기회도 커지는 게 정상 아니냐는 의견이 대표적이다. 부족한 스타들을 대체할 유망주가 대거 나오면 새 스타가 탄생할 가능성도 더 높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왜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비슷한 스토리와 기획, 비슷한 캐릭터의 드라마만 쏟아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깨비>가 히트를 치면 천년을 죽지 않고 사는 주인공들이 이어지고, 타임슬립이 괜찮다 싶으면 시공간을 오가는 드라마가 연달아 나온다. 남녀 몸이 바뀌는 설정도 이젠 흔하고, 채널을 돌리면 꼭 한 번 이상은 마주치는 검사 주인공도 조금 식상하다.
 
드라마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다양한 기획과 시도가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비슷한 기획과 설정이 대부분이다. 영화의 경우 투자사 펀딩을 받기 위해 검증된 코드를 반영하다보니 엇비슷한 상업영화만 남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드라마 역시 방송사 편성이 중요한 과제라 늘 나오던 반찬으로 차린 밥상 느낌이다. 오래전부터 본 듯한 드라마와 캐릭터에서 신인 배우들의 발군의 연기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다.
 
‘튤립 거품’의 실체
거품경제의 예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도 실제 증거를 거의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 있다. 미국 경제학자 피터 가버는 저서 <버블의 탄생>에서 네덜란드 튤립 거품은 새로 도입된 금융 방식의 해악을 알리려던 지배계급이 사후에 재창조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튤립 거품은 17세기 작물 호황과 동인도회사 수입 등으로 재정이 풍부해진 네덜란드에서 부의 과시욕이 만든 역사상 최초의 투기 사건으로 알려졌다. 흔히 튤립 가격이 1개월 만에 50배나 뛰었다는 예를 들면서 비합리적 투기 열풍이 얼마나 거셀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가버는 당시 사료를 꼼꼼히 뒤져 튤립 거품 에피소드가 한두 편의 팸플릿에 근거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이미 선물계약 방식이 도입돼 있었다. 지배계급에겐 새 계약 방식이 위험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이 방식의 위험성과 비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해 소책자, 설교, 인쇄물을 통해 도덕 캠페인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튤립 거품을 인용하면서 이 사건이 ‘신화’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광풍 사례로 언급되는 튤립 구근은 희귀 품종이었다. 일반 품종의 거래 기록에는 그런 광풍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가버의 설명이다. 이런 드문 사례에 ‘도덕성’을 더 강화하기 위해 허구도 툭툭 덧붙여졌다. 많은 사람이 확인 없이 이를 반복적으로 인용했고, 신화는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버는 튤립 가격 폭락으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무릇 거품이 있었다면 광풍이 지난 뒤 재산상 손실도 엄청났을 텐데 그런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품이 아예 없거나, 거품이라 하기엔 약간 모자란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다.
 
거품경제서 꽃핀 ‘아니메’
어떤 산업에서는 약간의 거품이 자양분으로 바뀌는 사례도 많다. 엔터테인먼트산업 역시 그런 분야다. 일본의 대표 상품인 애니메이션(아니메)산업도 거품경제 덕에 꽃폈다는 시각이 많다.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이 일본 거품경제 시기라고 한다. 일본은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수출로 고속성장을 했다. 일본인 특유의 꼼꼼함으로 제조업에서 강세를 보이며 막대한 무역 흑자를 거두는 수출 대표 국가가 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1·2차 석유파동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수출로 고속성장을 해온 일본은 외부 요인으로 커지는 변동성을 막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1달러에 250엔이라는 고정환율을 도입해 엔저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일본은 엔저로 미국에 더 많이 수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역 적자로 피해를 본 미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을 압박해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플라자 합의’를 관철했다. 1985년 9월 엔화 환율이 달러당 250엔에서 125엔으로 떨어질 정도로 엔화 가치가 급등했다.
갑자기 엔화 가치가 오르자 일본 수출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 정부는 금리를 낮춰 내수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저금리로 넘쳐나는 돈이 부동산과 주식은 물론, 새 설비와 투자처로 흘러갔다. 엔터테인먼트와 예술 분야를 비롯해 애니메이션산업에도 많은 자본이 몰려들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 돈이 모자라 TV 시리즈를 극장용으로 짜깁기한 작품이 유통되곤 했다. 좋은 극장용 작품을 제작하려면 거대한 자본 투자가 필수다. 1980년대 들어 거품경제의 영향으로 갈 곳 잃은 자본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묻지마 투자’만은 아니었다.
시대적으로 가정용 비디오 등 영상기기가 보급되면서 볼거리가 많이 필요해진 상황에 맞춘 미래산업 투자이기도 했다.
 
이때 막대한 ‘연료’를 투입받아 일본 애니메이션산업은 일대 도약을 했다. 마침 미국의 <스타워즈>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우주공상과학물이 큰 인기를 얻자, 극장용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이 동시다발적으로 제작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포츠, 개그, 연애, 판타지 등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쏟아졌다. 넘치는 자본을 총알 삼아 다양한 장르가 시도됐고,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고스란히 쌓을 시간을 얻었다.
이렇게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자 소비층도 어른까지 확대됐다. 일본의 대표 캐릭터 ‘건담’도, 작가주의 작품으로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니 소비층이 다양해짐에 따라 시장도 커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 영화 <옥자>로 70회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박찬욱감독(왼쪽)이 영화제 관계자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영화 두 편을 실패한 뒤 세 번째 작품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지금이라면 누구도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없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REUTERS
벤처 투자가 낳은 한국 영화 붐
한국에도 비슷한 계기로 영화산업이 크게 도약한 바 있다. 1990년대 비디오 열풍이 일면서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대거 진출해 새 자금원으로 떠올랐다. 대기업 투자로 한국 영화의 편당 제작비가 크게 오르고 기획력도 강화됐다. ‘산업’으로서 영화가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거친 뒤 정부의 벤처 육성 정책, 코스닥 시장 활성화 등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막대한 자본이 영화산업으로 흘러들어 왔다. 벤처 투자를 하는 창업투자회사들이 영화 투자에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전 영화산업의 돈줄이던 지방 극장 등 ‘토착자본’이 쇠퇴하고 재무적 투자자들이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산업 동력이 바뀐 것인데, 이때를 계기로 한국의 영화산업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원래 창투사들은 벤처기업에 전문적으로 투자한다. 기업에 투자하면 기업공개(IPO)로 자금을 회수하기까지 약 5~7년이 걸린다. 투자 뒤 꽤 오랜 기간 자금이 묶이는 셈이다. 그런데 영화는 1편의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방식이어서 몇 달이면 투자 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창투사들이 자금 운용 과정에서 단기수익을 채워넣을 수 있어 영화 투자가 크게 늘어났다.
덕분에 이 시기에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등 한국 영화사의 획을 긋는 다양한 대작이 쏟아졌다. 젊고 참신한 신인 감독도 대거 탄생했다. 이때 화려하게 등장해 이제는 거장으로 자리잡은 박찬욱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첫 영화 두 편을 실패한 뒤 세 번째 작품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었다. 두 편이나 실패하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행운은 그때 아니면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면 누구도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없다.”
 
당시 거품처럼 몰려든 자본으로 우리는 지금의 박찬욱 감독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 ‘수익률’ 중심으로만 영화가 기획되면서 영화의 다양성은 더 확대되지 않는다는 평가다. 새로운 박찬욱 감독도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거품이 부정적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힘이 되기도 한다. 다시 튤립으로 돌아가면, 1637년 튤립 거품은 원산지 터키 대신 네덜란드를 튤립의 나라로 만들었다. 드라마 시장에서도 거품이 제값을 톡톡히 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 김윤지 연구위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문화산업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접근해갈 계획이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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