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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쓰는 디자인의 힘
[세계는 지금] 핀란드 디자인 산업의 성공 비결
[96호] 2018년 04월 01일 (일) 성새롬 saerom@kotra.or.kr
 핀란드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투자 부문을 교육으로 생각한다. 척박한 자연환경과 오랜 식민 지배의 역사적 경험 탓에 믿을 건 인적자원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핀란드가 믿는 또 하나의 자원이 있다. 바로 디자인이다. 핀란드는 정부와 기업, 학교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디자인 산업을 육성한다. 핀란드 디자인의 특징은 서민의, 서민을 위한, 서민에 의한 디자인이다. 소수 부유층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실용적 기능에 맞춘 디자인을 우선시한다.
 
성새롬 KOTRA 핀란드 헬싱키무역관 과장 
 
   
▲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지구에 있는 펜틱 매장. 이 지구에는 디자인·건축 박물관과 가구·유리·도자기·보석·패션 제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연합뉴스
최근 텔레비전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뜻밖의 인기를 얻은 핀란드. 하지만 여전히 핀란드는 우리에게 낯선 나라다. 자일리톨, 산타클로스, 오로라 등이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전부다. 조금만 더 기억을 더듬어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읽기·과학 부문 최상위 교육 강국, 앵그리버드·클래시오브클랜 등 모바일게임으로 떠 오른 스타트업 창업 열풍, 4차 산업혁명 이후를 대비 한 세계 최초의 기본소득제 실험까지, 핀란드는 한국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핀란드가 디자인 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핀란드는 세계시장에서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와 함께 북구 디자인 강국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핀란드 디자이너 알바르 알토는 독특한 가구와 조명, 식기 같은 인테리어 제품으로 업계에서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불린다. 주방용품이 탈라(Ittala), 의류 업체 마리메코(Marimekko), 가구 업체 아르텍(Artek) 같은 브랜드 역시 매년 꾸준한 매출을 기록하는 핀란드 디자인의 대표 주자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는 2012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됐다.
 
핀란드 디자인 산업을 알려면 핀란드 역사의 간략한 이해가 필요하다. 핀란드는 약 650년의 스웨덴 지배 이후 100년간 러시아 통치를 거쳤고, 2017년 독립 100주년을 맞았다. 즉, 역사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절대왕정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다.
 
헬싱키 디자인박물관 이사 겸 디자인지구협회 회장 피아 레흐티넨은 “핀란드 디자인은 귀족 계층의 소비 생활이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전해왔다”고 말했다. 핀란드 디자인이 생활용품에 강한 이유다. 레흐티넨 회장은 핀 란드만의 디자인 경쟁력을 ‘모두를 위한’과 ‘지속가능 한’이라는 두 가지 말로 표현한다. ‘서민의 필요에의 해 발전’했고,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 디자인의 특징으로 단순미와 실용성, 뛰어난 기능성과 재료의 질감을 최대한 살린 자연미 등을 들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지속적인 공존도 추구한다. 일례로 핀란드 알토대학교 디자인학부에는 ‘지속 가능성’이란 전공이 있을 정도로 지속가능성은 핀란드 디자인 산업의 중요 요소다. 핀란드 사람들은 본인이 쓰던 가구나 식기 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이 많다. 그만큼 제품 교체 주기가 전반적으로 느린 편이다. 1930년 등장한 알바르 알토의 사보이 (Savoy) 화병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다.
 
   
▲ 핀란드의 유명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르 알토가 설계한 핀란디아홀 외벽에 붉은빛으로 작품이 투영돼 있다. 디자인 강국 핀란드의 비결은 정부와 민간의 유기적 협력이다. EPA연합뉴스
활력의 중심지, 디자인지구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핀란드의 디자인 산업이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이다. 핀란드디자이너협회(Ornamo) 자료를 보면, 핀란드 디자인 산업의 연간 매출 규모는 2015년 기준 32억유로(약 4조 2100억원)에 달한다.
 
게임, 소프트웨어 등 디지털 콘텐츠로 창출되는 가치까지 합하면 연간 매출은 39억유로(약 5조1300 억원)이며, 이는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9%에 해당하는 규모다. 한국 디자인 산업의 매출 규모는 약 15조원으로 GDP 대비 1% 수준이다.
 
핀란드 디자인 산업은 중소 디자인 기업이 전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OECD 발표 결과, 핀란드 디자인 기업은 약 2천 개로 한국(4900개)의 40% 수준이다. 한국 인구와 GDP를 감안하면 한국보다 많은 수의 디자인 기업이 활동하는 셈이다. 핀란드 디자인 업계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기업은 없다. 핀란드 디자인 산업은 일부 스타 플레이어가 아니라 수많은 디 자인 중소기업의 지속가능한 가치 창출에 의해 발전한다.
 
핀란드 디자인 산업 발전을 위해 정부와 지역사회도 많은 기여를 했다. ‘헬싱키 디자인지구’(Design District Helsinki)는 디자인 업계, 학계, 정부의 협업을 통해 디자인 산업의 클러스터가 도심에 구 축된 대표 사례다. 이 지구는 헬싱키 디자인박물관에서 푸나부오리, 크루누하카 를 거쳐 울란린나까지 헬싱키 시내 중심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 아티스트의 오픈 스튜디오부터 빈티지 가게, 갤러리, 카페, 디자인 기업의 플래그십 스토어까지 핀란드 디자인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이 지역만 방문하기 위해 핀란드를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을 정도다.
 
디자인지구는 2005년 헬싱키 디자이너와 예술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현재 참여 회원 사는 공방을 겸한 카페부터 마리메코 같은 대기업까지 다양하다. 누구나 협회의 심사를 거쳐 회원이 될 수 있으며, 협회는 디자이너나 디자인 기업이 사회에 미칠 영향과 창출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를 기준으로 기업을 선정한다. 회원에 가입하면 공동 마케팅 프로그램이나 교육 기회가 제공된다. 모든 회원사는 공동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으며, 매체를 활용해 손쉽게 자체 마케팅과 홍보를 추진할 수 있다. 회원사 대상 교육도 실시되며, 교육은 디자인 방법론 같은 전문 분야부터 중국계 모바일결제 시스템 알리페이 도입 및 사용법 같은 실용 분야까지 디자인 기업과 소상공인에게 필요한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헬싱키시는 디자인지구 운영 예산의 대부분을 지원한다. 놀랍게도 헬싱키시에는 세계 유일의 ‘최고디자인책임자’(Chief Design Officer·CDO)라는 국장급 직책이 있을 정도로 시 정책에서 디자인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CDO는 헬싱키의 모든 디자인 정책을 결정하며, 기업-대학-헬싱키시의 산학연 디자인 프로젝트와 연구 활동에도 관여한다.
 
헬싱키시는 디자인 산업이 무형의 투자지만 투자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다. 시의 디자인 산업 지원 원칙은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다’이다. 디자인지구가 구체화되 는 과정에서도 헬싱키시는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현재도 프로그램은 회원사가 자율적으로 기획해 위원회의 승인을 받거나, 헬싱키 디자인박물관의 기획에 의해 추진된다. 회원사는 세미나와 교육을 통해 노하우를 공유하고 컨설팅을 하는 등 자율적인 교류로 성과를 창출한다.
 
핀란드 경제고용부 산하 무역진흥기관 인 ‘비즈니스 핀란드’(Business Finland) 가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경우에도, 직접 지원이 아니라 회원사 수요에 따라 마케팅 컨설팅을 지원하는 등 간접 지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실제 비즈니스 핀란드 컨설팅 사례를 보면, ‘디자인랩’(Design Lab)이라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돋보인다. 디자인랩은 디자이너, 마케터, 연구원, 학생 등 프로젝트에 따라 다양한 인력이 협업해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소다. 디자인랩의 최초 프로젝트는 디자인지구의 디자인 개발 및 차별화를 위한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 콘셉트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현재도 디자인랩은 디자인 기업의 수요에 맞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디자인 랩은 알토대학교 디자인대학과 유기적으로 협업해 산학연계 대표 사례로 꼽힌다. 학생들은 프로젝트에 참가해 경력을 쌓는 동시에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기업은 학생들의 재능을 활용해 성과를 내는 방식으로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다.
 
산·학·관 네트워크
헬싱키 디자인박물관은 업계 네트워킹 활성화를 위해 ‘디자인클럽’이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클럽은 콘퍼런스, 세미나 및 네트워킹 행사로 다양한 협업 기회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디 자인 기업뿐 아니라 은행, 부동산까지 디자인클럽의 회원으로 가입해 디자인과 비즈니스를 넘나드는 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핀란드 디자인 산업은 업계·대학·정부의 유기적 협력에 기반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정부는 디자인 산업 발전을 전통 방식의 정책 지원보다 기업의 수요를 우선한 프로젝트 방식으로 지원한다. 결과적으로 예산을 절감하고, 더불어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낸다. 정부의 지원 정책은, 업계의 문제와 해결책을 디자인 기업당 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헬싱키시는 디자인지구에 지원을 개시한 이후 2018년 들어서야 처음으로 회원사의 경제적 성과를 측정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한국의 디자인 산업은 세계시장에서 조금씩 진가를 인정받고 있지만, 그 잠재력에 비해 인식 수준은 여전히 미흡하다. 심지어 서울은 헬싱키보다 2년이나 빠른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에 선정됐으나, 이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최근 ‘넛크래킹’ (한국이 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 경쟁에서 밀리고, 후발개도국에는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현상 -편집자)으로 인한 고부가가치 소비재 산업 육성이 뜨거운 이슈다. 이런 현실에서 디자인 산업의 육성은 우리에게 과제이자 기회다.

*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함께 세계 각국의 최신 경제 흐름과 산업 동향을 소개한다. KOTRA는 전세계 83개국에 121개의 해외 무역관을 보유한 ‘대한민국 무역투자 정보의 메카’로 생생한 해외 정보를 수집·전달하는 것은 물론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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