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국내 > 이슈
     
낡은 재벌경영 선그은 ‘오너’ 혁신가
[국내이슈] 다섯 열쇳말로 풀어본 정용진 리더십
[95호] 2018년 03월 01일 (목) 박중언 parkje@hani.co.kr
덩치 키우는 ‘일등주의’ 대신 가치 창출에 주력… 주 35시간 근무제 등 파격 잇따라
 
한국의 재벌은 속된 말로 구리다. 편법증여, 일감 몰아주기, 순환출자, 문어발식 사업 확장, 황제경영, 정경유착 등등. 이런 불법·부패·반칙에서 가장 거리가 먼 재벌그룹으로 신세계를 꼽을 수 있다. 신세계는 최근 전자상거래 1조원 외자 유치, 주 35시간 근무제 도입, 스타필드 잇단 개장 등 예사롭지 않은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새로운 신세계’의 흐름을 이끈 선봉장은 정용진 그룹 부회장이다. 재벌 오너 출신 경영자로선 드물게 업계 혁신을 선도해온 정용진의 리더십을 다섯 열쇳말로 들여다본다.
 
박중언 부편집장
 
   
2017년 8월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고양’ 개장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 부회장은 문화와 즐거움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는 기업으로 신세계그룹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연합뉴스
 
“세상에 없는 일류기업.”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 정용진 부회장의 2018년 신년사에서 도드라진 두 문장이다. 그가 신세계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는지를 가늠케 한다. 점포, 매출 등 덩치와 숫자 중심의 일등주의 성장은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기존에 없던 고객 가치를 창출해 초일류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 무기로 고객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들었다. 그런 성공 사례가 디즈니와 나이키, 면도날 배송 스타트업 달러세이브클럽 등이다.
 
백화점과 이마트를 두 축으로, 유통과 무관한 쪽을 쳐다본 적이 별로 없는 신세계는 ‘최초’라는 기록을 많이 갖고 있다. 업계의 혁신을 의미하는 최초의 대부분은 소득과 소비 수준이 앞선 선진국 벤치마킹에서 출발했다. 될 만한 것을 포착해, 적확한 시점에 한국 소비자의 소득·문화·사고에 맞게 풀어내는 것이다. 부지런히 외국을 다니며 안목을 키운 정용진 부회장은 그런 통찰력과 결단력, 구체적 실행 능력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 만하다.
 
1. 아마존
1월 말 발표된 신세계의 1조원 외국자본 유치는 전자상거래 일류를 겨냥한 것이다. 유통의 무게중심이 디지털로 급속히 옮겨가는 것은 자명하다. 업계의 출혈경쟁에서 한 발짝 비껴나 내실을 다져온 신세계는 지금이 공격적 투자로 전환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백화점과 이마트로 나뉜 온라인사업부를 전자상거래 전담 신설법인으로 통합한 뒤, 외자와 그룹 자체 투자 등 1조원 이상 투입해 단번에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마트몰과 신세계몰의 2017년 매출은 각각 1조원 남짓이다. 13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베이코리아(지마켓·옥션)나 시장점유율이 그 절반 정도인 11번가에 크게 못 미친다.
 
신세계는 2023년까지 매출 규모를 현재의 다섯 배인 10조원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규 투자는 온라인쇼핑 전용 물류센터 ‘네오’의 확대에 우선적으로 쓰일 전망이다. 경기도 용인과 김포에 있는 네오 센터를 적어도 수도권 동서남북에 하나씩으로 늘리고, 규모도 확장할 계획이다. 물류와 배송 경쟁력으로 시장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뜻이다. 온라인쇼핑 절대 강자인 아마존이 그 모델이다. 오프라인에서 구축한 제품 기획과 물품 조달 역량, ‘이마트’(emart)라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온라인 장보기 노하우, 여기에 아마존처럼 뛰어난 구매 유도와 물류·배송 체계가 결합하면 온라인 시장 공략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신세계는 기대한다.
 
인수·합병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서두르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11번가나 ‘소셜커머스 3형제’ 쿠팡·티몬·위메프 등 대다수가 대규모 적자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런 만큼 3~4년 기다리면 헐값 매물이 쏟아질 것으로 신세계는 내다본다.
 
2. 디즈니
할인가를 앞세운 대형마트가 성장을 이끌던 시절은 끝났다. 신규 점포를 낼 공간을 찾기 힘들뿐더러 생존이 걸린 동네 상점들의 반발도 더는 감당하기 어렵다. 신세계가 눈을 돌린 대안이 초대형 복합쇼핑몰 ‘스타필드’다. 이 또한 지역상권을 죽인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나 한결 부담이 덜하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축구장 70배 크기의 경기도 하남점에 이어 2017년 5월 ‘별마당도서관’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코엑스점과 8월 개장한 경기도 고양점으로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스타필드는 그의 말대로 놀이공원이나 야구장 등이 경쟁 상대인 테마파크다. 놀이, 레저, 음식, 힐링 등을 아우르는 테마파크의 중심에 쇼핑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디즈니는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의 대명사다. 정 부회장은 디즈니처럼 콘텐츠로, 체험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기업을 꿈꾼다. 시장점유율을 말하는 마켓셰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을 점유하는 ‘라이프셰어’를 강조한다. 물건을 파는 데서 문화와 예술, 즐거움으로 고객을 만족시키는 기업으로 옮겨가는 디딤돌이 스타필드다. 그가 수시로 스타필드를 찾는 이유다.
 
3. 브랜딩
거대 유통기업들이 자체 개발(Private Brand) 상품이나 자사 상표(PL·Private Label) 상품으로 추가 이익을 올리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 제품 혁신이나 브랜드 가치 창출 없이 인기 제품 베끼기, 납품 단가 후려치기 등 유통권력으로 불공정 거래를 일삼는 것이 문제다. 이마트 PL 상품 역시 ‘저가 짝퉁’ 이미지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국외 박람회를 부지런히 다니며 성공 사례들을 뜯어본 뒤 내놓은 ‘피코크’와 ‘노브랜드’는 차원이 다르다. ‘PL 상품의 전설’인 미국 코스트코의 커클랜드(Kirkland)처럼 독자 브랜드화에 성공해 이마트의 매출 증대를 이끌고 있다. 가격보다 품질과 맛을 앞세우며 2013년 가정간편식 시장에 뛰어든 피코크는 5년 만에 매출이 7배가량 늘었다. 2017년에는 미국과 홍콩 등 국외 슈퍼마켓에도 상륙했다.
 
‘브랜드 없는 제품’을 표방한 노브랜드는 별도 전문점을 내는 메가 브랜드로 급성장했다. 2016년 8월 첫 점포를 연 지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점포 수가 100개를 넘었다. 제품의 핵심 기능과 무관한 비용을 모두 줄여 가성비를 극대화한 물티슈, 감자칩, 생수, 우유, 즉석밥 등 히트작을 잇따라 내놓았다. 물티슈를 예로 들면, 아기용과 청소용으로 나눠 구매 목적에 맞춰 품질과 가격이 만나는 이상적 두께를 찾았다. 신세계의 물건 만들기는 식품과 일반 생필품에서 화장품과 풀HD 43인치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일반 제조업체보다 유통기업이 소비자의 요구를 훨씬 잘 반영할 수 있다”며 “시장 빼앗기가 아니라 유통과 제조의 융합”이라고 말했다.
 
4.트렌드
신세계의 성장 전략은 시장의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정 부회장 자신이 대표적 ‘얼리어답터’이자 ‘트렌드세터’다. 재벌 오너 경영자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써온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고객과 소통하는 접점인 동시에 홍보 창구다. 게다가 유통기업을 이끄는 만큼 소비 트렌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공식 수입이 되기도 전에 테슬라 전기자동차를 사 들여온 그는, 2017년 스타필드 하남점에 테슬라 매장을 열었다. 스타벅스와 손잡고 국내에서 본격적인 커피 전문점 시대를 연 것도 그다.
 
신세계의 편의점 집중 투자는 인구구조 변화에 적극 대응한 것이다. 한계점에 이른 할인매장과 달리 1인 가구의 ‘나홀로 소비’에 적합한 편의점의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후발 주자인 신세계는 2017년 ‘위드미’에서 ‘이마트24’로 이름을 바꿔 점포를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2020년까지 3천억원을 투자해, 해마다 약 1천 개씩 새로 열 계획이다. 지금의 두 배가 넘는 6천 개 규모로 키워, 흑자 전환을 이룬다는 목표다. 이마트의 상품 경쟁력으로 무장한 이마트24는 클래식이나 전통 카페 접목 등으로 기존 편의점과 차별화를 꾀한다. 편의점 업계 혁신을 위한 연구소 설립은 신세계가 편의점 사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엿보게 한다.
 
5. 상생
유통업계의 가장 큰 과제는 상생이다. 대형 할인매장이나 기업형 슈퍼마켓은 늘 기존 동네 점포와 전통시장 상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이를 염두에 두고 신세계는 편의점에 뛰어들 때부터 24시간 영업 의무와 영업 위약금을 없애고, 로열티 대신 고정 월회비를 받는다. 편의점 경영 실패를 줄이기 위해 6개월~1년을 직영해 실적이 검증되면 가맹점으로 전환하는 ’오픈 검증’, 가맹점주가 발주한 상품 공급액의 1%를 돌려주는 ‘페이백’, 가맹점주 자녀 학비 지원 등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동네 마트가 매장 일부를 내준 경기도 안성점을 비롯한 전국 네 곳의 노브랜드 상생 스토어는 지역상인들의 전통시장 살리기 노력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시작했다. 기존 점포들과 판매 품목이 겹치지 않게 하고, 매장 배치 때 고객이 특히 청년 상인들의 가게를 거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노브랜드는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과 상생을 고심한다. 노브랜드는 상품의 본질적 가치에 집중하면 가격과 품질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고 본다. 휴지를 생산하는 한울생약과 서광에프엔비(유자차), 부산우유(우유)는 노브랜드가 자랑하는 상생 사례다. 이들 기업의 매출이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 물티슈와 유자차는 수출도 한다. 신세계는 일감 몰아주기가 일상화한 재벌그룹에선 처음으로 계열사가 운영하던 직원식당을 중소기업에 개방해 호평을 받았다.
 
2018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주 35시간 근무제’는 파격적이다. 재벌그룹이 앞장섰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시간 근무 단축에 따른 임금 삭감은 없지만, 직원을 추가 고용하지는 않는다. 생산성을 높여 기업과 노동자가 그 과실을 나누자는 것이지, 기업의 일방적 베풂이 아니다. 유통 업무의 특성에 맞춘 생산성 향상을 고심해온 신세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 뒤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진 것을 ‘쉴 때 쉬고, 일할 때 집중하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계기로 삼았다. 노동강도 증가에 따른 불만과 ‘최저임금 인상 무력화 꼼수’라는 비난도 나오지만, 인식 전환과 시스템 정비로 낭비 요소를 줄여나가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신세계는 기대한다.
 
정용진 부회장이 그리는 신세계는 아마존과 디즈니가 결합한 모델로 짐작된다. 정 부회장의 평소 성향과도 어울리는 구상이다. 정 부회장에겐 여러 연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인문학, 몸짱, 봉사, 낭만, 소탈 등이 그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아는, 교양 있고 리버럴한 엘리트 귀족 이미지로 요약된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다를지니, 그에게 보통 사람의 눈높이를 바라기는 힘들다. 선진국에선 상식으로 통하는, 가진 자의 품격과 사회적 책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한국 재벌로선 평가받을 만하다. 신세계그룹은 동네 상권 침해와 노조 사찰의 ‘상처’를 딛고 일등 아닌 일류를 지향한다. 정 부회장이 강조하는 가치와 소통이 고객에게 머물지 않고 노동자와 영세업자, 우리 사회를 아우른다면, 그는 ‘진정한 일류’로 한국 재벌 역사의 새 장을 쓰게 될지 모른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3월호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권태호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장철규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