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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일변도서 ‘통합 문화시장’으로
[Culture & Biz] 한-중 콘텐츠 시장에 부는 중국발 ‘한류(漢流)’
[94호] 2018년 02월 01일 (목) 문동열 rabike0412@gmail.com
‘사드 여파’로 한-중 교류가 동면 상태에 들어간 1년 남짓 동안 두 나라의 문화콘텐츠 교류 환경이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다. 최근 중국 출장에서 느낀 변화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완전히 달라진 중국 제작자들의 자국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이다. 드라마와 게임 등 여러 분야에서 중국 콘텐츠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한국 콘텐츠 업계도 자국 우선이 아닌 ‘공생’ 프레임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잃어버린 1년’ 동안 한국 콘텐츠 업계의 전략이 변하면서 ‘수출 일변도’이던 중국 비즈니스는 이제 ‘통합 문화시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사드 체제 배치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복 조처로 영업 정지를 당한 롯데마트 저장성 자싱 매장. 중국 정부의 ‘금한령’으로 두 나라 교류가 동면 상태에 들어간 ‘잃어버린 1년’ 동안 중국의 문화콘텐츠 제작 역량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REUTERS
 
2017년 12월14일 필자는 중국 업체로부터 전자우편 한 통을 받았다. 1년여 전 한국과 중국의 관계 악화에 따른 한류(韓流) 전면 금지령인 ‘금한령’에 대한 기고(2016년 10월호)에서 소개했던 그 업체다. “소나기가 내리면 잠시 피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는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었던 업체가 1년4개월 만에 안부 인사와 함께 “귀사와 공동제작을 포함한 여러 협력 프로젝트에 대한 협의를 재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후 다른 업체들로부터도 몇 건의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간단한 안부를 묻고 다시 미래를 이야기하고 아직 형태도 갖추지 않은 프로젝트의 성과를 말하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막힌 물꼬가 이제 트였다는 생각과 함께 교류가 이전보다 더 활성화돼 사업 기회를 많이 잡았으면 하는 기대감에 컴퓨터 한쪽 구석에 묵혀놓았던 사업 기획안들을 전자우편으로 중국에 보냈다.
 
관계가 악화되기 전만 하더라도 두 나라의 문화 교류에서 한국 쪽이 어느 정도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 한국과 중국의 공통 인식이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배경으로 중국의 자본력과 한국의 제작 노하우·기술력이 결합한 방식이 이상적으로 여겨졌고, 콘텐츠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획과 진행을 한국 쪽이 주도하는 형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드라마 감독이나 예능 프로듀서가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개런티를 받고 중국으로 향한 것도 한국의 뛰어난 콘텐츠 기획과 제작 능력을 중국에서 인정했기에 가능했다. 실제 한국이 제작을 맡고 중국이 자본과 유통을 책임지는 형태로 많은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잃어버린 1년’
그러나 2016년 6월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의 ‘방송프로그램의 자주적 업무추진에 관한 통지’와 함께 시작된, 외국 콘텐츠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규제는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제 배치 강행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다. 한국 제작 인력이 참여한 한-중 공동 프로젝트가 잇달아 축소 또는 중지됐고 새 프로젝트는 아예 진행되지도 않았다. 당시 중국에 있다가 돌아온 제작자들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은 한국 인력의 귀국으로 발생할 제작 공백을 우려하지만 자신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한국 제작 인력이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중국 콘텐츠 업계가 선택한 길은 우선 ‘베끼기’였다. 2014년부터 중국 저장위성TV와 SBS가 공동제작하던 중국 내 인기 한국 프로그램 <런닝맨>은 계약 체결 없이 시즌5를 시작했다. <런닝맨>의 중국명인 <달려라 형제>에서 ‘형제’만 뺀 <달려라>로 프로그램 제목이 바뀌었다. 중국 쪽에서는 프로그램명도 다르고 한국 색채를 뺀 중국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중국 제작사가 정부 규제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MBC <나는 가수다>는 <가수>로 프로그램명만 조금 바꿔 제작됐다.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나 포맷 사용료 등을 주지 않았다. 새로 제작된 프로그램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 1년간 <윤식당>(tvN), <효리네 민박>(JTBC), <히든싱어>(JTBC), <쇼미더머니>(Mnet), <개그콘서트>(KBS),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KBS) 등이 무단으로 표절됐다.
 
한-중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기존 표절 작품의 정식 계약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 법원이 방송 저작권과 관련해 중국 기업에 유리한 태도를 보이면서 중국 제작사들은 더 노골적으로 표절하고 있다. 오랜 기간 중국과 공동제작을 해온 국내 제작사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마구 유출되는 상황을 답답해한다.
 
중국 방송 제작 업계가 베끼기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베끼는 것도 실력이 없으면 못한다. 이들은 여러 제작 부문을 자국 인력으로 대체하며 국외 콘텐츠의 높은 품질에 익숙해진 자국민의 눈높이를 충족할 콘텐츠를 생산해냈다. 여기에는 ‘문화 굴기’를 표방하며 국외 콘텐츠 기업에 투자한 성과가 뒷받침됐다. 다년간의 국외 공동제작, 합자사업 등으로 중국 콘텐츠 제작 인력의 수준은 빠르게 성장했고, 국외 인력이 빠진 공백을 훌륭하게 메웠다. 물론 대체 불가능한 영역에선 국외 인력을 썼지만 철저히 숨겼다. 그 바람에 중국에 계속 남았던 한국인 제작 인력은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는 건 고사하고, 불법체류 노동자처럼 당국의 단속을 피하기 바빴다고 한다. 당국 관계자가 나오면 숨어서 일하거나 한국인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제작자들 사이에 떠돌았다.
 
   
중국 전문 케이블방송 중화TV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중국 드라마 <랑야방>의 한 장면. 중국 특유의 역사 블록버스터를 앞세운 드라마 열풍이 만만치 않다. 중화TV 제공
 
한류(韓流) 아닌 ‘한류(漢流)’
한때 국외 제작 인력이 빠지면 중국의 문화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거라는 전망이 중국 내부에서도 있었다. 그런 우려에도 중국 정부가 문화 분야의 ‘자주적 업무 추진’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걸 수 있었던 것은, 문화 굴기의 성과가 어느 정도 쌓였다는 자신감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런 자신감을 증명하듯, 최근 많은 콘텐츠산업 분야에서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맹위를 가장 실감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게임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게임산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국외시장에선 전통적 게임 강국인 일본이나 한국에 밀려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현황을 보면, ‘웹게임’이라는 브라우저 기반 게임에서 중국 제품이 압도한 지 오래다. 중국 게임의 국외시장 진출은 2017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017년 상반기에 전년 동기 대비 577%의 성장률을 보이는 등 빠르게 퍼지고 있다. 한국 시장만 보더라도 2016년에 중국 게임의 점유율이 21%를 넘어섰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2017년에는 30%를 넘고 2018년에는 거의 절반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중국 선본네트워크테크놀로지가 개발한 모바일게임 <소녀전선>은 2017년 한국 시장을 강타하며 높은 매출 순위를 기록했다. 1월에는 애플 앱스토어 기준, 중국 게임 최초로 매출 1위에 올랐다. 이외에 <붕괴3rd> 등이 잇달아 한국 시장의 매출 상위권에 진입하며 선전하고 있다. 반면 한국 게임은 2017년 8월까지 중국 내 게임 출시를 위한 ‘판호’ 발급 건수가 전체의 0.11%에 지나지 않는 등 고전 중이다. 중국에선 일종의 사업 허가인 판호를 발급받아야 서비스를 할 수 있는데 한-중 관계 악화 등이 겹쳐 판호 발급이 막히다시피 했다. 이를 두고 한국 게임 업계에선 한류(韓流)가 가고 ‘한류(漢流)’가 온다고 탄식한다.
 
드라마 분야의 한류(漢流)도 심상치 않다. 2016년 중국 콘텐츠 전문 케이블방송 중화TV에서 방영된 <랑야방>은 방송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대만 작품이지만 1990년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판관 포청천> 이후 최고의 중화권 드라마로 떠올랐다. 중화권 콘텐츠 전문 방송의 잇단 개국과 더불어, <랑야방> 등에서 시작된 ‘중국 드라마 열풍’은 중국 특유의 블록버스터 역사·시대극을 중심으로 한국 시청자에게 확산되고 있다. 670억원의 제작비가 든 <대군사 사마의>는 <삼국지>를 품격 높은 정치드라마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끄고 있다.
 
각 분야에서 보이는 중국 콘텐츠의 약진은 거대한 소비시장을 배경으로 한, 엄청난 콘텐츠 ‘물량’과 제작비에서 비롯한다. 한국 시장 규모로는 상상하기 힘든 제작비를 들인 콘텐츠가 해마다 쏟아진다. 자국 내 경쟁을 뚫고 선별된 콘텐츠가 다양한 취향의 외국 소비자를 만족시키자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자국 우선 아닌 ‘공생’
중국 콘텐츠가 한국에서 선전하는 것에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고 중국 콘텐츠와 연예인에 열광하는 한국의 팬덤이 늘어나는 것은 균형 잡힌 문화 교류 시장이 열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류는 일방적이어서 규제가 쉽지만, 서로 섞인다면 자국 기업에도 큰 피해가 가기 때문에 국가의 규제가 힘들어진다. ‘금한령’ 같은 중국 정부의 규제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안정적인 거대 시장을 확보하는 기회일 수도 있다. 대만처럼 중국에 문화적으로 종속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의 콘텐츠 경쟁력이 그 정도로 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업계는 몇몇 한류 스타나 한국 콘텐츠라면 무조건 받아줄 것이라는 한류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중국 시장을 제대로 마주하려는 노력을 이미 하고 있다. 자국 우선이 아닌 ‘공생’의 새 프레임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 중이다. 단기전에 급급했던 과거와 달리 철저히 현지화된 콘텐츠 개발을 위해 중·장기적으로 접근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제3국 경유 합자 등 새로운 형태의 중국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것도 그런 사례다. ‘잃어버린 1년’ 동안 중국 콘텐츠 산업과 더불어 한국 콘텐츠 업계도 크게 성장한 것이다. ‘수출 일변도’이던 중국 비즈니스는 이제 ‘통합 문화시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통합 문화시장이라니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머잖은 미래에, 아니 당장 1~2년 뒤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1년의 짧은 공백에도 양국의 문화 교류 패러다임이 바뀔 정도로 큰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 문동열은 영상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 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 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 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 이코노미 인사이트 201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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