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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민의 수렴과 절차적 정당성
[윤희웅의 선거와 경제]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원회의 성공 조건
[89호] 2017년 09월 01일 (금) 윤희웅 waymaker@opinionlive.co.kr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놓고 민의를 수렴하기 위한 공론화위원회가 발족해 활동을 시작했다. 공론조사 방식은 숙의민주주의 모델의 한 방식이다. 어떤 사회적 결정을 할 때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뿐 아니라 논의의 질적 수준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공론화위의 결정이 대표성을 가지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합리적 논의를 이어가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정은 또 다른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
 
   
김지형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공론화위원장이 2017년 7월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공론화위 첫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공론화위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민의를 수렴해야 한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가 울산 울주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5·6호기 건설을 영구 중단할지, 재개할지 결정하기 위해 꺼내든 공론조사 카드가 생소하다는 지적이 있다. ‘숙의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s)라고도 불리는 공론조사는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제임스 피시킨 교수가 처음 제안한 이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영역에 적용됐다.
 
한국도 적용 사례가 적지 않다. 2005년 8·31 부동산 대책 수립, 2007년 대통령 임기 조항을 고치자는 원포인트 개헌 논의, 2007년 부산 북항 재개발 마스터플랜 수립, 2015년 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안 모색 등에 공론조사 방식이 활용됐다. 2006년에는 한 방송사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제로 실시하기도 했다.
 
공론조사 또는 숙의조사는 이미 우리 곁에 제법 가까이 와 있고 상당히 주목받는 민주주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통상 전체 인구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추출해 1차 여론을 묻고, 이 중 일부를 선정해 해당 이슈 관련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학습하게 하며, 나중에 함께 모이게 해 심층 토론을 거쳐 다시 의견을 묻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대표’ ‘참여’ ‘토론’ 개념이 담겨 있다. 단순히 여론조사 방식 얘기가 아니라 민주주의 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숙의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둘러싼 논의이기도 하다. 숙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여러 모델 중 가장 최근에 부상했다. 용어도 1980년 클레어몬트대학 조지프 버셋이 처음 사용했다. 사람들이 정치적 과정에 무조건 많이 참여하게 하는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개선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현대 민주주의가 유명 정치인들 간 경쟁과 미디어에서 정치인들의 발언 중 극히 일부만 보도해 말싸움을 부추기는 ‘사운드바이트’(sound bite)식 논쟁에 매몰됨으로써, 시민들은 정보와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고 정치인들은 실제 대중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공론조사를 창안한 피시킨도 유권자의 공적 생활에 대한 무관심과 통치집단의 엘리트주의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토론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 속에 경솔하고 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로 이해되기도 하는 ‘사람들의 선호 취합’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사람들이 투표로 표출하는 선호가 선거라는 취합 과정을 거쳐 모아지고 그것을 사실상 공공선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참여는 의미가 크고 많은 사람이 참여해 내린 결정일수록 정당성이 높아진다고 여겼다.
 
질적 논의 확보의 과정
하지만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참여와 합리성의 관계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참여가 많아진다고 해서 합리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정당성을 높이려면 사람들 개인이 표출한 단순 선호를 모으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과정에 ‘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숙고를 거친 선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혼자 고립적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나 시민사회 속에 타인의 관점에 서보기도 하며 타인과의 사회적 만남을 통해 상호 검증하며 의사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호는 정제되고 사려 깊게 변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공론조사를 포함한 숙의민주주의가 사실은 대의제를 폐기시키고 직접민주주의로 넘어가려는 시도라고 의심을 보낸다. 한국 사회의 보수 일각에서 공론조사에 거부감이 큰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시각을 경계한다. 피시킨도 “대규모 공중의 숙의 능력은 의심스럽다. 현실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여건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흥분한 공중은 때로 선동에 취약해질 수 있다”며 단순히 참여 규모만 커지는 것에 부정적 시각을 나타낸다. 정의론의 대가 존 롤스의 제자이기도 한 미국 철학자 조슈아 코언은 “숙의민주주의의 이상을 가장 잘 제도화한 것이 직접민주주의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했다.
 
의사결정 과정을 좀더 신중히 하려는 노력으로서 숙의민주주의는 공론조사 외에 여러 방안을 제시한다. 먼저 ‘숙의하는 날 지정’이다. 날짜를 정해 주요 사안들에 대해 지역 공동체 구성원이 정보를 공유해 깊이 토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공적 이슈에 무관심한 대중이 사려 깊은 선호를 갖게 하자는 것이다.
 
또 시민배심원제 확대로 숙의와 토론에 적합한 환경을 시민에게 제공해 복잡한 공적 문제에 대해 정제되고 사려 깊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온라인 기술에 기반해 상시적으로 주요 이슈에 대해 시민들이 토론하는 공간을 제공하거나 민간 차원의 시민 교육을 강화하자는 방안도 내놓고 있다. 더 급진적인 숙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시민 교육과 숙의를 위한 기구 마련을 위해 공적자금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는 집중 조명을 받는 만큼 향후 한국 사회의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간이 짧은 것이 아쉽다. 공론화위 활동 기간은 3개월이다. 실제 조사 기간은 2개월이다. 조사 기간도 빠듯하지만 일반 국민의 새로운 숙의 방식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까지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이벤트라는 점에서 더 충분한 기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첨예한 논쟁이라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성 시비가 나오고 공론조사 방식을 포함해 숙의민주주의 자체의 수용도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비효율적이더라도 제3의 검증기관 구성도 고려할 수 있다. 결정을 공론화위가 불가역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론화위의 의견을 참조해 최종 결론은 시민이 선택한 정부가 책임지고 내리는 것도 거부감을 줄이는 방안이다. 부실하게 진행돼 ‘정제되고 사려 깊은 선호’를 발견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에 부정적 인식이 높아지지 않도록 신중하고 신중해야 한다.
 
* 윤희웅은 오피니언라이브(OPINIONLIVE)에서 여론분석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과 민(MIN) 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을 거쳤다. 대중심리의 형성과 표출 과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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