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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과 작품의 힘이 합작한 ‘역주행’
[Culture & Biz] 관심 못 받다 뒤늦게 뜨는 작품들의 비밀
[88호] 2017년 08월 01일 (화) 문동열 redbros@redbros.co.kr
‘이번엔 망했다’고 생각한 영화가 자고 일어났더니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콘텐츠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역주행’이다. 발표 초기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콘텐츠가 뒤늦게 작품성이 알려지면서 흥행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역주행은 다양성 강화 측면에서 콘텐츠 산업의 발전에도 기여한다. 한국 영화에서 주요 역주행 작품이 독립영화, 예술영화라는 점은 이를 설명해준다. 대형 제작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콘텐츠 시장의 불공정한 유통 구조가 역설적으로 역주행을 만들어낸 힘이 됐다. 소셜미디어를 무기로 좋은 작품을 찾아 키워내는 문화 소비자들이 역주행의 또 다른 공신이다.
 
문동열 레드브로스 대표
 
   
독립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한국 영화의 대표적 ‘역주행’ 작품으로 꼽힌다. 진모영 감독이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이자 유명 지도자인 요기 베라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프로야구 뉴욕 메츠팀이 시즌 중반 꼴찌를 달릴 때 한 기자에게 “이번 시즌은 끝난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 요기 베라는 야구계에 길이 남을 말을 한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실제 그 해 뉴욕 메츠팀은 최하위에서 순위를 역행해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한다. 지금도 야구계뿐 아니라 수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요기 베라의 명언을 콘텐츠 업계에 가져온다면 아마 ‘역주행’이란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콘텐츠 업계에서 역주행은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이 발표 초기엔 그다지 반응이 없다가 여러 이유로 흥행 순위나 각종 차트를 거슬러 올라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한 영화배급사 대표는 수준급 외화를 수입했지만 반응이 좋지 않아 영화관에서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려 ‘이번 영화는 망했구나’라고 자포자기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그 영화가 인기검색어에 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 커뮤니티에서 유명 블로거가 그 배급사의 영화를 극찬했고, 영화관을 상대로 재개봉을 요구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것이다. 보는 이가 적어 내렸던 이 영화를 찾는 관객이 조금씩 늘어나자 영화관들이 스크린 수를 늘려갔다. 이를 시작으로 하위권에 맴돌던 박스오피스를 역주행했다. 이른바 ‘자고 일어났더니 박스오피스 1위’ 전설의 시작이다.
 
역주행 주도하는 예술영화들
콘텐츠 장르를 불문하고 역주행은 ‘행운’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특히 영화업계에서 역주행은 그야말로 ‘로또 당첨’에 가깝다. 한국 영화산업의 유통 방식이 제작사나 배급사에 불리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1차 유통업자인 영화관은 신작 영화가 나오면 영화별로 스크린(개봉관)을 배분한다. 신작이 늘 쏟아져 나오는 탓에 한 영화에 스크린 배분 물량을 개봉 이후 짧게는 1주, 길게는 2주 정도 집중한다. 개봉 일주일이 지나 관객을 동원할 여지가 더 있다고 판단되는 영화는 스크린을 유지하거나 더 늘리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는 또 다른 신작 영화에 스크린을 내준다.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대작이나 영화관과 같은 계열의 메이저급 배급사는 스크린 독점 혜택을 누린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중소 영화들은 처음 배분되는 스크린이 많지 않고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는 대형 배급사의 홍보에 밀려 그야말로 제대로 주먹 한번 못 날리고 링에서 내려오는 일이 많다. 역주행이 역경을 딛고 나온 것을 생각하면 ‘로또급 행운’에 비유하는 것이 호들갑처럼 보이지 않는다.
 
실제 2014년 8월 개봉한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은 개봉 당시 <명량>이나 <해적> 같은 한국 영화 대작에 밀려 가장 흥행 성적이 좋은 개봉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관객이 2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역주행을 시작했다. 역주행한 지 한 달도 안 돼 하루 평균 관객이 4배 가까이 늘었고, 개봉관도 200개에서 최고 525개에 달했다. 8위로 출발했던 박스오피스 성적이 최고 2위까지 올라갔다. 음악영화 <위플래쉬>나 흥행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예술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역주행 신화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 영화를 배급한 행운의 배급사들은 엄청난 흥행 수익을 손에 넣어 당시 많은 관계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런 역주행은 영화산업 발전에 다양성 강화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띤다. 한국 영화의 주요 역주행 작품이 독립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부터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다룬 <동주>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귀향> 같은 작품이란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영화계의 역주행 작품은 대부분 대중오락 영화가 아니라 예술 장르나 다양성 영화다. 그동안 다양성 영화들은 스크린 배분 때 시장 논리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돼왔다. 한국 영화의 왜곡된 유통 구조는 다양성 영화를 제작할 의지를 꺾었지만, 최근 역주행 신화가 하나둘 쌓이면서 많은 제작자나 배급사는 ‘제대로 만들면 관객이 봐준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영화계뿐 아니라 다른 콘텐츠 분야에도 역주행 신화는 존재한다. 드라마에서 역주행은 첫 방송에 비해 시청률이 점점 높아지는 현상을 지칭한다. 최근 젊은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쌈, 마이웨이>는 첫 방송 시청률이 5%대였으나 역주행을 거듭해 13%대를 넘어섰다. 2013년 방영된 드라마 <비밀>은 동시간 대 경쟁 드라마에 밀려 5%대로 출발했으나, 20% 넘는 시청률로 막을 내려 업계에선 드라마 역주행의 전설로 불린다.
 
음반시장의 역주행은 더 극적이다. 몇년 전 음반시장에서 팬이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이른바 ‘직캠’ 한 방으로 일약 톱스타가 된 걸그룹 EXID의 <위아래>가 대표적이다. 혼성 듀오 신현희·김루트의 <오빠야>는 무려 2년 전에 발표한 노래로 최근 음원 차트 1위에 오르는 ‘레전드급 역주행’을 선보였다.
 
   
걸그룹 EXID의 <위아래>는 팬이 촬영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덕분에 큰 인기를 얻었다. EXID가 두 번째 미니앨범 <아예> 발매 기념 무대에서 춤추고 있다. 연합뉴스
 
불공정한 경쟁이 가져다준 행운
무엇이 역주행을 가능하게 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콘텐츠 시장의 ‘불공평한 유통 구조’가 역주행을 만들어낸다. 콘텐츠 흥행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케팅으로 꼽힌다. 마케팅으로 자신의 콘텐츠를 대중에게 알리고 흥미를 갖게 해서 소비로 유도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최근 콘텐츠 업계의 마케팅을 보면 과대 포장과 여론 조작에 열을 올리는 경향이 적지 않다. 대중음악계에서도 음원을 몰래 사들여 음원 차트를 조작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평점을 조작하기 위해 ‘알바’를 동원한다는 의혹은 이제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시장을 빠르게 선점하려는 콘텐츠 산업의 비정상적인 마케팅 활동은 결국 비용 상승으로 이어진다. 대형 제작사가 ‘물량 공세’로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는 동안, ‘실탄’이 모자란 중소 제작사는 콘텐츠의 질과 별개로 마케팅 비용을 얼마나 집행하는지를 흥행의 중요 요소로 보는 유통업자에 의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결국 중소 제작자의 질 좋은 콘텐츠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제대로 경쟁도 못 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밀려난 중소 제작자의 콘텐츠를 소비자가 알아보고 이를 다시 무대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바로 역주행이다. 결국 역주행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공정하지 못한 경쟁 환경’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역주행은 소비자가 만들어내는 기적이자 한번 쓴맛을 본 중소 제작자에겐 패자부활전의 기회라고 할 수 있겠다.
 
역주행의 본질은 그것만이 아니다. 최근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미디어 환경이 극적으로 변하는 가운데, 그동안 개인이란 형태로 흩어져 있던 소비자가 소셜미디어로 무장해 함께 모은 힘으로 구조를 변화시킬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문화와 콘텐츠의 다양성을 선호한다. 자신의 문화 욕구를 만족시키려면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똑똑한’ 소비자의 행동은 공정하지 못한 경쟁에서 좋은 콘텐츠가 다시 살아날 힘을 제공한다. 역주행 사례가 많아질수록 그만큼 많은 제작자는 과대 포장에서 벗어나 콘텐츠의 본질에 더욱 충실할 수밖에 없다. 유통사들 역시 다양성에 점점 눈을 돌릴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역주행이 화제가 되고 성공 신화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제작자가 역주행을 인위적으로 재현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런저런 원인을 분석해 적용해보지만 결과적으로 인위적 역주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본질이 콘텐츠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전파하는 활동에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자발적인 팬심과 인위적인 ‘알바’ 댓글을 구분할 정도로, 지금 시대의 콘텐츠 소비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꼴찌에서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한 요기 베라의 역주행도 ‘행운’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노력에서 왔듯이, 점점 ‘똑똑해지는’ 소비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사로잡는 길은 마케팅 물량이나 스타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팬과 제대로 마주 보고 소통하며 그들이 원하는 걸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본질에 충실하면 비록 불공평한 경쟁 상황일지라도 소비자는 열렬한 추종자가 돼 보상 없이도 콘텐츠를 ‘포교’하는 전도사가 돼줄 것이다.
 
* 문동열은 영상 콘텐츠 스타트업 레드브로스 대표로 저비용·고효율의 한국형 영상 콘텐츠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미디어 마케팅을 전공했고 SBS 콘텐츠허브에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또한 IBK기업은행 문화콘텐츠금융부에서 콘텐츠 금융과 콘텐츠 기업 컨설팅을 맡았다. 방송제작과 금융에 모두 정통한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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