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세계경제를 대공황의 끔직한 악몽으로 몰아갔던 글로벌 금융위기는 단순히 ‘시스템적 위기’(Systemic Crisis)가 아니라 아예 ‘시스템 위기’(Crisis of System)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시스템 차원에 심각한 충격을 미칠 정도의 위기라는 규정 이상으로 시스템 자체의 내재적인 문제점에서 비롯된 위기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위기의 직접적 충격을 넘어서 그 근저에 자리잡은 시스템 차원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 진지하고 발본적인 반성이 요구된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됐고, 또 위기의 교훈을 기반으로 향후 새로운 정책 체제를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지 많은 고민이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금융안정을 위한 새로운 규제 체제의 모색이다. 최근 국내에서 한국은행법 개정과 관련해 금융안정을 한국은행의 목표로 명시적으로 설정하는 방안을 둘러싼 논쟁 역시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동안 물가안정(및 경제안정)에 치우쳐온 통화정책 체제를, 금융안정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으로 변경하는 것이 골자다.

지난 8월 한국은행에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1970년대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충격을 경험한 뒤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은 물가안정을 축으로 대대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정책 운영 방식도 큰 변화를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 재건 과정에서 부각된 정부의 능동적 역할(재정정책)이 퇴조하고, 점차 시장 메커니즘에 기반한 미세 조정, 또 그 핵심적 기제로서 통화정책의 역할이 강화돼온 것이다. 특히 성장보다는 물가안정 혹은 인플레이션 억제(디스인플레이션), 또 완전고용보다는 경제의 유연성 제고와 위험관리에 초점을 맞춘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시장 친화적이고 전문적인 역량이 부각된 것이다.

금융위기와 중앙은행 시스템의 한계
이런 가운데 세계경제는 한동안 이례적인 번영을 구가했다. 남미 외채위기나 아시아 외환위기, 또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부도 사태와 닷컴 거품 등 이러저런 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까지 선진국 경제가, 또 2000년대 초·중반에는 신흥시장까지 꽤 견실한 성장세를 이어왔다. 특히 그간 세계경제의 골칫거리인 극심한 경기변동성이 현저히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서구 경제학계에서는 이런 양상을 ‘대완화’(Great Moderation)라고 부른다. ‘경제적 안정’을 뜻하는 표현이다. 거시경제학의 대부 중 한 명인 루카스가 “경기변동은 끝났다”고 선언한 것도 이처럼 대완화가 세계경제의 주된 특성으로 정착되던 2000년대 초였다.
대완화의 이유로 세계경제의 구조 변화나 단순한 행운 등 여러 가지가 언급되지만, 현재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 의장인 버냉키는 무엇보다 통화정책의 기량 향상을 그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춘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유연한 통화정책 운영이 세계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금융 불안이나 글로벌 불균형 등의 문제가 불거졌지만, 중앙은행 중심의 능동적인 위험관리를 통해 상당 부분 예방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런 자신감이 단순한 ‘환상’에 의존한 것임을 보여준다.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위기 직후 공세적인 금리 인하에 나서고 ‘양적 완화’라는 초유의 정책으로 막대한 유동성을 쏟아부었음에도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고, 세계경제는 대공황을 방불케 하는 충격에 허덕여야 했던 것이다. 대신에 위기는 그간 ‘중풍에 걸린 손’으로 비난받던 정부가 직접 구제금융 지원이나 대규모 재정 투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진화됐다. 한때 ‘죽은 개’로 취급받던 케인스의 화려한 부활도 이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현대 중앙은행의 오만한 자신감이 위기의 씨를 뿌렸다는 인식이 정설로 통하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그 이면에 금융시장, 아니 금융 시스템 전반의 극심한 불안정성을 키워왔다는 것이다. 위기 이전 미국의 저금리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외견상으로는 물가가 안정된 상황에서 지나치게 저금리 정책을 밀다 보니, 시스템 전반에 걸쳐 위험에 대해 맹목적인 태도를 배양했고 그 결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붕괴와 같은 참사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기 징후가 부각될 때에도 중앙은행들은 물가 불안과 무관하다는 이유로 서브프라임 문제에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물론 위기의 책임을 모두 중앙은행에만 돌릴 수는 없다. 문제는 경제관리의 책임을 주로 물가안정에 초점을 맞춘 중앙은행의 소관으로 돌려놓고, 금융안정은 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이나 미시적 수준의 마찰 현상에 국한된 문제로 치부한 기존 정책 전반의 심각한 결함이다. 그 결과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이 체계적으로 유리되면서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에 따른 광범위한 전염 효과, 그리고 대내외 금융 시스템의 복잡하게 얽힌 네트워크 위험 등을 체계적으로 포착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영국을 필두로 세계 전반에 확산된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구의 분리가 그 물리적인 실체다.

금융안정이 본연의 임무
이런 가운데 위기의 교훈으로 통화정책과 금융안정을 결합해야 한다는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 사실 금융안정은 중앙은행 본연의 임무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중앙은행 제도가 만들어진 목적도 본래는 금융 시스템 전반에 원활한 유동성 공급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금융안정의 핵심이다. 이른바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 중앙은행의 역할 말이다. 다만 최종대부자 기능은 계절적 요인이나 각종 이상현상으로 인해 자금흐름이 깨질 때에만 수행된다. 다시 말해 통화정책에서 강조하는 선제적 대응과는 달리 대부분 사후적이고 보완적인 조치라는 것이다.
현대경제에서 금융시장이나 금융 시스템이 차지하는 막중한 위상을 감안할 때, 일상적인 금융안정의 필요성이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중앙은행과 유리돼 별도의 금융감독기구 소관으로 귀착된다. 이 기구는 전반적인 시스템 안정이나 거시정책 기조와는 무관하게 개별 금융기관의 자본 적정성이나 경영 부실, 이해상충 등 미시적 쟁점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런 성향은 자산 거품에 대한 중앙은행의 ‘소극적 방임’(Benign Neglect)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거품이 붕괴돼 자산 가격이 급락할 때는 그로 인한 경제적 위험을 의식해 중앙은행이 적극적인 리플레이션(Reflation·통화 재팽창) 전략을 통해 개입한다. 통화정책의 비대칭성을 과거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추앙받던 그린스펀의 기회주의적 행태에 빗대어 ‘그린스펀 풋’(Greenspan’s Put)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금융안정 문제를 미시적 왜곡 정도로 치부하고 거시적 함의를 무시함으로써 이번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 위기의 교훈이다. 따라서 이제는 자산 거품 등 금융(시장)의 고유한 불안정성에 따른 잠재적 불안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물론 자산 가격 자체를 직접 목표로 삼는 데에는 신중한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금융안정의 거시적 함의, 즉 기존 정책 체제에서 누락된 핵심 고리라고 할 거시 건전성 문제는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데 콘센서스가 모인다. 혹자는 이를 두고 “우리는 모두 거시건전성론자”라고 설파했다. 과거 자유방임 성향이 강하던 미국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이 케인스주의의 위력에 굴복해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고 한 표현을 빗댄 것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주요국의 정책 체제는 거시 건전성을 강조하고,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금융안정의 책임을 통화정책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금융 선진화의 원조’ 영국에서는 신임 보수연립 여당의 주도로 그동안 금융기관의 감독을 책임지던 금융감독청(FSA)을 해체하고 그 책임을 중앙은행에 이관하기로 했다. ‘현대금융의 메카’ 미국 역시 연준의 권한을 강화하고 (특히 위기의 핵심축인 투자은행 등 이른바 ‘그림자 금융’을 대상으로) 소관 영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금융 개혁을 추진 중이다. 다만 미국은 위기관리 실패의 책임을 물어 연준에 대한 정부 통제 혹은 견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 체제의 진화, 특히 시스템 규제 당국으로서 현대 중앙은행 시스템의 변모는 확정적이기보다는 아직 진행형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최근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의 추가적인 양적 완화 움직임에서 보듯이, 여전히 리플레이션을 통한 경제관리에 초점이 맞춰지고 유동성 과잉에 따른 잠재적인 불안 소지, 즉 거시 건전성 문제는 묵과되고 있다. 물론 회복세가 여의치 못한 가운데 유동성 함정에 시달리는 선진국으로서는 다소 불가피한 일인지 모르나, 정작 한국과 같은 신흥시장에서 유동성 범람으로 통화절상이나 자산 과열로 몸살을 앓는 것을 보면 글로벌 차원의 거시 건전성은 여전히 먼 일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모습.

　
금융권력의 이해에서 자유로워야
다른 한편으로, 기존 정책 체제가 경제안정을 위해 금융안정을 희생한 반면 이제는 역으로 금융안정을 위해 경제안정을 희생시킬 위험에도 유념해야 한다. 대완화 기조의 와해 이후 경기변동성이 다시 확대된 상황에서 거시 건전성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안정에 초점을 맞춘 정책 운영이 자칫 경제 불안을 심화할 가능성 말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안정이 과연 누구의 이해에, 또 어떤 목적에 부응하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유행하는 각종 음모론에서 강조하듯이 서구 중앙은행의 성립 과정이 ‘고도금융’(금융기법이 고도로 발전한 첨단 금융으로, JP모건 등 거대 금융권력을 의미하기도 함)의 이해와 결부된 면이 강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미명하에 이것이 자칫 금융시장이나 금융중개기관의 이해에만 의존한다면 현대 민주주의 정신 자체가 훼손될 소지가 크다.
본래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의 독립성에 국한되며, ‘정부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정부 내에서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치적 독립 못지않게 근시안적 성향이 강한 ‘금융시장에서의 독립’도 중요하다. 따라서 지금은 현대 정책 체제의 근본 틀과 목표에 대해 광범위한 국민적 혹은 국제적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이런 맥락에서 국내에서 한은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의 진정한 쟁점, 즉 위기 이후 달라진 세계경제 환경하에서 국민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걸맞은 새로운 정책 체제의 모색이라는 숙제가 혹시 사이비 쟁점으로 호도되고 있는 건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