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경훈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원
　
1997년 외환위기 이전 한국은행법 제1조에 따르면,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은 ‘통화가치의 안정과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직후 김영삼 정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금융개혁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정책 처방에 따라 한국은행법을 대폭 개정했다. 대표적으로 바로 앞의 목적 조항을 ‘물가안정’으로 한정한 물가안정 단일목표제다. 또한 한국은행이 보유한 은행 감독의 기능을 사실상 제거하고, ‘금융감독기구 설치에 관한 법률’을 신설해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신용관리기금 등 4개 금융감독기구를 통합해 1999년 1월 금융감독원을 설치했다. 한국은행의 은행 감독 기능은 금융감독원으로 넘기고, 한국은행은 물가안정 목표만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물가안정-민주주의 양립 재검토를
권위주의 정권에서 관치 금융과 부당한 정치적 압력 등의 역사로 말미암아,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민주주의의 진전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과연 누구로부터 독립하려 는지, 그리고 현 중앙은행의 지배구조는 민주주의에 부응하는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한다. 더불어 통화정책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에 비추어, 물가안정목표제가 민주주의 원리는 위반하지 않은지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다음 두 가지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경제적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첫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오직 ‘물가안정’이라는 단일한 결과만 가져와야 한다. 즉, 통화정책이 물가안정에만 영향을 미치고,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이나 다른 사회적 이해관계의 상충 등을 초래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통화정책이 실업·인플레이션·성장률·환율 등 여러 거시경제 변수에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거시경제 조합을 선택하는 결과에 직면한다면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하게 된다. 국민의 삶과 재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은 국민의 뜻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물가안정이라는 단일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올바른 정책을 선택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을 지녀야 한다.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바탕이 되는 이론적 기초가 과학적이어야 하며, 이론의 현실 적용 또한 객관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중앙은행이 비과학적 이론에 근거해 임의적·주관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추구한다면, 정부의 영향력을 제거한다고 해서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1995년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오른쪽 두 번째) 등 경제학자 1054명이 ‘한국은행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현실의 통화정책에서는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통화정책은 사회·경제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며, 어떤 통화정책 과정도 결코 과학적·객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민주주의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통화정책의 행위가 국민의 의지에서 심대하게 이탈되지 않게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제한되어야 한다. 또한 통화정책이 국민경제에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가 갈수록 확대되는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중앙은행의 책임성은 더욱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가안정목표제는 시대적 방향에도 역행하는 제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여전히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견지하고 있다. 대공황 이후 1933년 25%까지 치솟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완전고용 법안’이 제출되었다. 1946년 발효된 최종 법안에는 ‘최대한의 고용, 생산, 그리고 구매력’을 높이도록 정부의 책임성을 확고히 하고, 중앙은행의 목표에도 ‘고용’을 명시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우선순위는 ‘고용창출’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한 이후, 1978년 ‘완전고용과 균형성장 법안’을 통해 처음으로 물가안정이 명시적 책임으로 부과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전히 ‘최대한의 고용, 물가안정, 그리고 안정적인 장기이자율’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은 정책목표에 ‘고용’ 추가해야
우리나라 헌법 제32조에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고 뚜렷하게 명시돼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 임금 보장에 노력해야 한다’고 국가의 책임을 부여한다. 이런 헌법 조문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의 목적 조항에 ‘고용’이 빠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최근 고용 문제가 양극화와 더불어 첨예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대두되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해, 중앙은행의 목적 조항에 ‘고용’ 추가를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1998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를 실시하는데,  ‘금리-총수요-인플레이션’이라는 3단계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 즉, 금리 인상을 통해 경제의 총수요를 줄이고, 이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한다는 수요 인플레이션 통제 정책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연이자율과 자연가동률을 정확히 추정하지 않으면 물가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정책 운용의 자의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실제 운용 과정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보다 높으면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금리를 계속 올리는 정책을 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금리 인상은 경제의 총수요와 기업의 이윤 마진을 감소시켜 고용과 임금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따라서 금리가 물가, 실업, 그리고 소득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경제 변수라 하면, 금통위의 성격에 따라 상이한 경제적 결과와 소득분배를 초래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금통위가 낮은 물가를 선호하게 되면, 자연이자율과 자연가동률을 자의적으로 선택해 실업의 사회적 고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의도한 정책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현행 물가안정목표제는 석유나 원자재 가격 등 공급 요인에서 발생하는 물가 상승을 처방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물가 상승의 원인이 비용 또는 공급 요인임에도 물가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금리를 지속적으로 올리면 물가는 잡지 못하고 경기는 더욱 하락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2008년 한국은행이 유가 폭등에 따른 물가 상승 때 금리를 인상했다가 두 달 만에 다시 내리는 실책을 범한 것도 취약한 이론적 기반과 조야한 운용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이 비단 물가와 고용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금리는 우선 정부의 재정 및 부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금리 인상은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국채의 이자지급 비용을 증가시키고, 경기 위축에 따른 세수 감소와 사회적 이전지출 증가로 정부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자본시장 개방도와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금리는 환율 변수를 통해 경상 및 자본 수지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금리 인상은 차익 매매에 따른 자본수지 유입을 초래해 자국의 통화가치 상승을 초래한다. 역으로 고환율 정책은 수출 기업에는 보조금을 지원하고, 수입 기업과 국내 소비자에게는 관세나 소비세를 부과하는 효과를 통해 소득분배에 영향을 미친다. 금리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이해관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준다. 채권자인 금융기관의 입장에서 금리 인상은 예대차익과 장기금리를 상승시켜 이득을 주고, 채무자는 이자 비용 상승으로 손해를 본다.
　
‘금융안정’ 기능 명시 필요
금융시장의 투기 행위를 억제하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높이려면 중앙은행에 더 높은 책임성이 요구된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물가안정목표제의 문제점이 낱낱이 드러났다. 우선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국내 금융시장에 전이되는 과정에서, 예방 차원의 어떠한 경고 메시지도 전달하지 못했다. 주요 시중은행의 단기 외화 대출이 급증했음에도 적절한 감독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2008년 8월 초 금리를 인상했다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금리를 대폭 내리는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경제 시스템의 금융화와 세계화, 그리고 금융위기에 따라 중앙은행의 위상과 역할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물가안정이라는 협소한 정책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행의 은행 감독 기능은 1997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대부분 금융감독원으로 넘어간 상태다. 다만 ‘통화신용 정책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금융기관 검사 및 공동 검사를 금융감독원에 요구할 수 있고, 자료제출 대상 기관 또한 매우 협소한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설립 목적에 ‘금융안정’ 기능을 명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검사하는 ‘금융기관’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감독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행법상 금융기관은 예금 취급 은행이나 은행지주회사 등으로 한정하는데, 금융기관 간 경계가 갈수록 불분명한 현실에 비추어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라 금융투자회사가 지급결제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금융기관을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상 금융기관으로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각에서는 감독 기능이 중첩되어 자원의 비효율적 이용과 잠재적 이해 상충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금감원은 근본적으로 개별 금융기관의 재무 건전성, 즉 미시 건전성 감독에 초점을 맞추지만, 중앙은행은 시스템 위기 방지를 위해 국민경제의 거시 안정성을 중시하므로 충분히 협력하고 견제할 수 있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스프링클러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소화기·소화전 등 여러 예방 도구를 준비해두는 것처럼, 예방과 감독 기능의 중복이 초래하는 비용은 위기 발생에 따른 고비용을 고려하면 효율적이라 할 것이다.
통화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의 핵심이 되는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7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민간 이익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이 각각 1명씩 추천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통화정책은 물가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장률·실업률·환율 등 여러 경제 변수뿐만 아니라, 소득분배와 금융안정에도 심대한 영향을 준다. 금리 결정은 최소한 단기 실업률에 영향을 미치며, 채권자와 채무자 등 다양한 형태로 소득분배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금리를 통상 ‘분배 변수’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이익을 대표하는 민간 단체의 회장들만이 금통위 위원을 추천할 수 있는 독특한 지배구조다. 

금융시장으로부터 독립을
경제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1인1표제’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지배구조는 유권자의 뜻을 모아 위임되어야 하며, 민간 단체의 추천 몫을 제거하고 국회가 추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난 9월, 민주당 이성남 의원이 추천 위원 5명에 대한 기관 추천 제도를 폐지하고, 금통위 위원 모두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하는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다. 모든 것에서의 독립은 사실상 시장권력에 대한 종속, 즉 통화 독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오직 물가만을 목표로 하는 통화정책의 오류를 극복하고 고용과 금융 안정을 정책 우선순위에 두도록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책임성 강화에 조응해 금융시장의 투기와 불안정성을 통제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로부터 독립도 중요하지만, 금융권력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금융화의 세계에서는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독립이 더욱 중요한 시대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