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인 한국은행(BOK)은 독립성과 관련해 오래전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는 싫은 별명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국은행을 ‘지성소’(지극히 성스러운 장소)라고 꼬집어 부르기도 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최고(?)의 상품인 화폐를 독점적으로 발행하는 성스러운 권한을 가진데다, 매월 둘쨋주 목요일에 한국은행 본관 15층에서 금융통화위원회(위원 7명)를 열어 금리를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7명이 테이블에 모여 결정하는 금리는 물가·고용·소득분배 경로를 통해 우리 모두의 경제적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신성한 가격 변수다.
최근 중앙은행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이슈가 경제적·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금융통화위원 선출임명 방식을 고치는 것을 골자로 한 한국은행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와 있고, 금융계의 ‘황태자’로 불리는 금통위원 가운데 한 자리가 수개월째 공석이다. 화폐는 최고의 공공재다. <이코노미 인사이트>는 화폐를 다루는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그 외피’, 그리고 금통위 지배구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다시 생각해본다._편집자

최우성 <한겨레> 산업팀장 morgen@hani.co.kr
 
“4조5685억원 규모의 2008년도 추가경정예산안(이하 추경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출석 의원 267명 중 240명이 찬성했고, 반대와 기권은 각각 16명, 11명이었다. (중략) 추경 편성의 적절성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데다 정부의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90일 만에 뒤늦게 통과돼 효과를 반감시켰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2008년 4월 어느 날,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어느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다. 이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추경안엔 한전·가스공사 손실 보조금 1조40억원, 철도망 구축 및 도로 확충 9519억원을 비롯해 대학생 학자금 2500억원, 재래시장 시설 현대화 자금 1890억원 등 각종 민생 관련 예산이 포함됐다. 한마디로, 정부가 당초 세운 한 해 살림살이 계획보다 4조원 이상을 더 지출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제 무대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한국은행 본관 15층으로 잠시 옮겨보자. 앞의 사례와 엇비슷한 시기인 2008년 10월 어느 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이하 금통위)는 정례회의 직후 다음과 같은 결정문을 즉각 발표했다.
“총액대출한도를 현재의 6조5천억원에서 9조원으로 2조5천억원 증액하고, 이를 2008년 11월부터 적용하기로 결정하였음.”
주류 경제이론에서는 경기를 안정시키거나 부양하기 위해 정부가 세입·세출 크기를 조정하는 것을 ‘재정정책’이라고 부른다. 이에 반해 중앙은행이 화폐의 공급 등과 관련해 취하는 일련의 조처들은 ‘통화정책’으로 정의된다. 물론 큰 틀에서 봤을 때,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정부(중앙은행 포함)가 펼칠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구체적인 정책 파급 경로나 효과 면에서 대비될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통화량’이 실제로 얼마나 늘어나는지와는 무관하게, 시중에 돈을 푸는 방식으로 일종의 확장적 경기 대책을 편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한은 본관 15층 금통위 정례회의
하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해보면, 두 사례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정책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정책이 결정·집행되는 구체적 ‘형식’과 ‘과정’에서의 차이다. 추경안과 관련된 첫 번째 사례에서는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이 ‘국회 본회의 의결’ 형식을 띤다. 반면 두 번째 사례에선 한국은행의 최고의결기구인 금통위가 결정의 무대요, 주체다.
국회(본회의)와 금통위. 각 조직을 이루는 국회의원과 금통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심의·의결하는 형식적 절차를 밟았으니 둘 사이에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둘을 냉혹하게 가르는 본질적 차이는 결정 주체가 이른바 ‘선출권력’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게 포인트다.
여기서 선출권력이란 주권자인 일반 국민에게서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권력 행사를 위임받은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일컫는다. 국회를 구성하는 국회의원이 국민의 직접투표를 통해 선출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반해 금통위의 결정은 이와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이뤄진다. 금통위를 구성하는 금통위원(총 7명)을 선임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다르기 때문이다. 현행 한국은행법상 금통위는 당연직인 한국은행 총재와 부총재를 비롯해, 재정경제부·한국은행·금융위원회·대한상공회의소·전국은행연합회 등 5개 기관(장)의 추천을 받은 인물로 구성된다. 주권자에게서 권력을 직접 위임받은 선출권력(대리인)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셈이다. 이런 차이가 지닌 의미는 결코 적잖다. 예를 들어 확장적 경기 대책을 펴려는 정부가 추경안을 편성했다 치자. 그 정당성과 효과를 두고 선출권력인 여야 사이에 토론과 표결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적 ‘통제 장치’ 정도는 마련돼 있다. 하지만 금통위 결정 과정은 형식적·실질적으로 온전히 주권자의 ‘통제 밖’에 놓여 있다. 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 정례회의는 매월 둘쨋주 목요일에 열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 금통위원 7명
흔히 중앙은행을 둘러싼 오랜 신화는 이런 현실에 눈꼽만큼의 의심을 갖거나 반론을 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마취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독립된 중앙은행이야말로 ‘통화가치 수호’라는 절대 과제를 담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신화 말이다. 으레 이런 신화 속에서 중앙은행은 국민경제 전체를 아우르는 듬직한 수호신이자, 지고지순한 ‘순수 결정체’로 포장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걸어온 역사는 중앙은행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실상은 일종의 집단적 오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앙은행이 태생적으로 모든 세속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초국가적’ ‘절대적’ 조직인 건 결코 아니다. 잠시 자본주의의 ‘고향’ 영국의 경험부터 되돌아보자. 17세기 말, 오랜 전쟁과 사회적 혼란으로 파산 직전에 놓인 잉글랜드의 재무장관 찰스 몬태규 앞으로 일군의 무리가 찾아왔다. 개신교도인 이들은 루이 14세를 피해 프랑스를 떠나려는 위그노파가 다수를 이루었다. 이들은 재정난에 골치를 앓는 재무장관에게 흥미로운 제안 하나를 던졌다. 자신들이 8% 금리로 120만파운드를 영국 정부에 꿔줄 테니, 대신 그에 상당하는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지닌 은행을 설립할 권리를 내주고 이 은행을 잉글랜드 정부의 유일한 은행으로 지정해달라는 게 제안의 뼈대였다.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Bank of England) 탄생사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장식됐다. 26명의 중앙은행 이사진이 거의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금융 중심지인 시티 출신의 특권층으로 짜인 건, 이쯤 되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대서양 건너편 미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당대의 주요 나라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중앙은행을 갖지 못한 거의 유일한 나라에 속했다.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개별 은행이나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던 ‘동해안’ 자본가들은 대체로 전국 단위의 금융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이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연방권력으로의 집중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마침내 미국에서도 어엿한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Fed)이 탄생한 건, 전쟁과 그에 이어진 대혼란 덕이었다. 이쯤 되면 이런 명제도 가능할 법하지 않을까? 태초에 절대적 권위를 지닌 중앙은행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세속권력에 성스러운 권력의 외투를 입힌 것일 뿐이라고.

지난 1월 금융통화위원회에 허경욱 기획재정부 제1차관(가운데)이 참석하자, 한국은행 노조 조합원들이 ‘관치금융 철폐’를 요구하며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은행 독립성과 신격화
특히 1970년대 주요 서구 자본주의 나라에서 새로운 교리인 통화주의가 한계에 다다른 케인스주의의 대안으로 득세하는 것과 맞물려, 중앙은행의 신격화는 더욱 공고해졌다. 케인스주의적 수요 창출 정책을 편 정부의 방만한 정책이 인플레이션이라는 재앙을 불러왔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 통화주의 교리를 지탱하는 핵심 뼈대는 곧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존재였다. 물론 이 대목에서 평범한 의문은 남는다. 물가가 솟구치면 가장 큰 피해는 오롯이 취약계층 몫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중남미 국가들에서 초강성의 중앙은행이 나서 수백%에 이르던 초인플레이션을 잡자, 이 계층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하는 장면은 우리 눈에 꽤 익숙한, 나름대로 감동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인플레이션 파이터’를 자임하고 나선 중앙은행은 결국 사회문제를 해결한 구원자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또 다른 스토리’가 숨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해, 물건(재화)의 가격이 곧 물가다. 화폐경제 사회에서 물건 가격이 거침없이 뛰어오르면, 당연히 그 짝패인 ‘돈의 값어치’는 여지없이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인플레이션이 속성상 돈을 꿔주는 채권자(자산계급·금융자본)에게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채무자(임노동자·산업자본)로 부(富)를 강제 이전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이해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실질금리가 떨어져 돈을 꾼 채무자의 부담도 덩달아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을 꿔준 사람이 받아야 할 몫이 줄어들게 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명분 아래 명목금리를 대폭 인상하는 중앙은행의 단호함은 곧 이런 메카니즘을 정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강력한 규율 아래 돈의 값어치를 되살려내는, 말하자면 ‘자산계급(채권자)의 복수’인 셈이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그 선봉장이자 핵심 도구인 것은 물론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 경제의 쟁점 가운데 하나인 ‘중앙은행 독립성’이란 주제를 더 근본적·종합적으로 재고할 필요성을 느낀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은 다른 ‘잡음’(노이즈)에서 멀찌감치 떨어질수록 강력한 효과를 내기 마련이다. 가장 큰 잡음이라고 할 행정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일은 타당하고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하물며 정부가 개별 금융기관 운영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던 ‘관치금융’이 우리 경제에 안겨준 아픈 상처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마당에, 섣불리 중앙은행의 의사결정에 행정부의 영향력이 끼어들 여지를 열어두는 건 엄청난 패착임이 틀림없다.
다만, 논의의 무대를 한 발짝 더 넓힐 필요는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글의 맨 앞에 등장한 사례를 다시 떠올려보자. 현재 금통위가 운영되는 현실에 비춰볼 때 ‘기관 추천제’란 허울뿐인 구호에 가깝다. 금통위원 한 자리가 수개월간 비어 있는데도 정작 정권 최고위층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여전히 공석으로 남아 있는 현실은,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른바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절대명제의 허울을 벗겨낼 수 있는 기회도 함께 마련해준다. 조금 과장하자면, 정부의 추경안을 놓고 국회에서 여야가 치열한 격론이라도 벌일 수 있겠지만 최악의 경우 독립성의 외피를 뒤집어쓴 금통위가 정권의 의중을 반영해 시중에 돈을 마구 풀어대더라도 이를 제어할 아무런 통제 장치는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금통위 지배구조 개편이 핵심
결국 핵심은 중앙은행 독립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고하면서, 중앙은행 최고 의결기관인 금통위의 지배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개편하느냐의 문제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독립성 논의의 틀을 속성상 자산계급의 이해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인 중앙은행과 정권(행정부), 단지 둘 사이만의 관계를 넘어서는 방향으로 더욱 진전시켜야 한다. 흔히 ‘중앙은행도 행정부의 일부’라는 논리를 내세워 정책 공조를 밀어붙이려는 경제 관료의 입김을 지켜낸다는 의미에서 ‘형식적’ 독립성에 매몰되지 않을뿐더러, 한 사회를 이루는 최고의 공공재인 화폐에 대해 사회 전체가 ‘공적 통제’에 나설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분명하게 열어둬야 한다는 얘기다.
전세계를 휩쓸고 간 금융위기는 뿌리 깊던 중앙은행의 신화가 산산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덧 위기가 차츰 진정되면서 ‘구원투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낸 중앙은행의 성과만 슬그머니 부각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이번 금융위기는, 1970년대 이래 통화주의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뿌리를 내린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란 명제가 얼마나 허약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서 있은 것인지를 여실히 들춰내주는 소중한 기회였을 뿐이다. 금융위기는 곧 중앙은행의 위기였던 셈이다.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서 논의되는 금통위원 인사청문회, 한은 총재의 국회 출석 의무 부과 등은, 커다란 물줄기에서 보자면 극히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다. 오랜 자본주의의 역사를 지탱해온 패러다임이 커다란 순환을 맞는 이즈음, 최후의 ‘성스러운 권력’으로 남아 있는 중앙은행 역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선출권력에 의한 기본적인 견제는 물론, 다양한 사회세력과 계층의 목소리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적 지배구조’를 성공적으로 짜내도록 우리의 상상력을 활짝 펼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