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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두루’ 내고 시장에선 ‘아리’ 쓴다
[CoverStory] ‘공존 자본주의’의 미래, 시간화폐 실험- ③ 국내 시간화폐 현황과 과제
[85호] 2017년 05월 01일 (월) 김연기 ykkim@hani.co.kr
1996년 첫 소개 뒤 40여 곳 운영...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 크지만 참여 부진
 
전통 품앗이 문화가 있는 국내에선 정과 나눔에 기반을 둔 ‘한국형 시간화폐’가 뿌리내렸다. 1996년 <녹색평론>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뒤 현재 전국 40여 곳에서 운영된다. 도입 초기엔 전통적 시간화폐 형태인 노동시간 거래 위주로 운영되다 지금은 상품·서비스 거래를 뛰어넘어 개인의 재능과 특기를 공유하는 공동체 운동으로 진화했다. 지역경제 활성화와 공동체 의식 부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아직까지는 참여 부족으로 미래 대안화폐로 자리잡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연기 부편집장
 
경기도 과천에 사는 주부 최민영(42)씨는 ‘아리’를 내고 인근 학원에서 요가를 배운다. 아리는 과천에서 통용되는 시간화폐다. 일반 수강생들은 현금이나 카드로 수강료를 내야 하지만 과천품앗이 회원들은 자신이 적립한 아리로 결제한다. 최씨는 요리를 가르쳐주거나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아리를 쌓았다. 그리고 1시간 남짓 요가를 배우고 학원에 1만아리를 냈다. 요가를 가르쳐주고 1만아리를 적립한 요가학원 원장은 최씨에게 저녁 장보기를 대신 부탁하는 데 아리를 쓸 계획이다. 최씨는 “아리를 내고 요가를 배워 가계경제에 보탬이 됐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지역주민과 각자의 재능을 나누며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이 더 뿌듯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되는 시간화폐가 차츰 활성화하고 있다. 회원들은 시간화폐로 노동과 물건을 거래할 수 있다. 국내 시간화폐 운동은 1996년 격월간지 <녹색평론>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현재는 과천품앗이를 비롯해 부산 사하품앗이, 대전 한밭레츠, 서울 송파품앗이, 경북 구미 사랑고리은행, 경기도 수원 구름 위의 도서관 등 전국 40곳 이상에서 운영되고 있다. 아리가 물품 거래 비중이 적고 주로 노동시간을 거래하는 형태라면 나머지는 상품과 서비스 거래 위주로 운영된다.
 
국내 주요 지역화폐 현황 (자료: 각 단체)
공동체이름 화폐이름 출범시기 운영주체
 서울 송파품앗이  송파머니  1999년  지차체
 대전 한밭레츠  두루  2000년  민간인
 경기 과천품앗이  아리  2000년  민간단체
 경북 구미 사랑고리은행  고리  2002년  종교단체
 경기 광명 지역품앗이 광명그루  그루  2004년  지자체
 경기 의정부레츠  누리  2008년  지자체
 서울 서초품앗이  품  2009년  지자체
 경기 성남 문화통화  넘실  2006년  지자체
 부산 사하품앗이  송이  2007년  민간단체
 경기 수원 구름 위의 도서관  별  2014년  법인

 대표적인 시간화폐 공동체는 과천품앗이다. 2000년 11월 회원 30여 명으로 시작해 2017년 3월 현재 600여 명으로 늘었다. 과천품앗이에선 1시간 노동을 ‘1만아리’로 계산한다. 노동 서비스를 1시간 단위로 거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 A가 영어교사 B의 자녀를 1시간 동안 돌봐주고, B는 자영업자 C에게 영어를 1시간 가르쳐주고, C는 A의 집 청소를 1시간 도와주는 식이다. 중요한 점은 주부와 영어교사, 자영업자의 1시간이 모두 똑같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재능과 특기 공유하는 ‘품앗이 학교’
아리 사용이 점점 늘면서 처음에는 쓸 곳이 많지 않다며 외면하던 주변 상점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김은희 과천품앗이 운영위원은 “지역 내 소상공인들이 가맹점 형태로 아리를 유통해 상권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품앗이에는 노동력과 물품, 때로는 아이디어나 기부활동 등도 포함된다”며 “반찬 솜씨 나누기, 자동차 함께 타기, 텃밭 채소 같이 가꾸기, 대신 장보기, 힘들 때 같이 수다떨기 등 각자의 활동이 모두 거래 내용이 된다”고 덧붙였다.
 
대전의 한밭레츠는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2000년 70여 명이던 회원 수가 현재는 1천 명으로 늘어났다. 시간화폐 단위는 ‘두루’다. 회원에 가입하려면 매월 2천원 또는 연 2만원의 회비를 내야 한다. 두루를 얻는 방법은 아리와 비슷하다. 회원 사이에 품앗이와 물물교환 같은 노동력을 제공하면 두루를 받을 수 있다. 받은 화폐는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고, 다른 회원들과 노동력을 교환하는 데 쓰인다.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2002년 가정의학과·내과·치과·한의원이 있는 민들레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생겨 진료비를 두루로 받는다. 박현숙 한밭레츠 사무국장은 “의원과 한의원에선 의료보험 치료를 모두 두루로 계산할 수 있고, 보험이 안 되는 일반 치료는 50%만 두루로 받는다”고 말했다. 한밭레츠 운영진은 6개월마다 ‘품앗이 도우미’를 제작해 회원들이 제공하는 품앗이와 가맹점 현황을 알린다.
 
   
▲ 서울 노원구의 시간화폐 ‘노원’을 거래하는 ‘노원데이’에 참가한 주민들이 지역화폐 통장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 17개 자치구에서 노원 같은 지역화폐가 통용되고 있다. 서울시 노원구 제공
 
일본의 대표적 시간화폐 공동체 ‘피너츠클럽’이 매월 벼룩시장을 열듯이, 한밭레츠도 정기적으로 장터를 열고 회원끼리 필요한 물품을 두루로 사고판다. 장터가 열리면 회원들이 가져온 유기농 채소나 과일, 각종 먹거리, 옷가지, 신발, 책 등 어지간한 재래시장에 있을 만한 물건이 한가득 펼쳐진다. 따로 가격을 정해 놓지만 즉석에서 흥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밭레츠 회원 박승원씨는 “지난 장터 때 사놓고 몇 번 신지 않은 신발들을 가져와 1만두루에 모두 팔았다”며 “이렇게 생긴 1만두루로 유기농 포도주를 샀다”고 말했다.
 
부산의 사하품앗이도 잘 운영되는 시간화폐 공동체다. 회원 600여 명이 2007년부터 ‘송이’라는 시간화폐를 사용한다. 과천품앗이나 한밭레츠와 마찬가지로 사하품앗이 역시 여성이 주축이다. 자연스럽게 육아·가사활동 관련 서비스가 주로 거래된다. 사하품앗이가 다른 시간화폐 공동체와 구분되는 특징은 지역공동체 활동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회원들이 자신의 특기를 가르치는 ‘품앗이 학교’를 만들어 지역주민과 재능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천연비누 만들기가 특기인 주민이 이웃을 모아 품앗이 학교를 열고 수업료로 송이를 받는 식이다. 이렇게 요리, 컴퓨터, 재봉, 천연염색 등 다양한 품앗이 학교가 수시로 열린다. 품앗이 학교로 돈독한 관계를 쌓은 회원들은 이를 발전시켜 ‘송이아띠 사업단’이란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마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펴고 있다. 최근에는 마을 아파트와 놀이터 주변에 텃밭을 일구고 이를 노인과 어린이가 함께 가꾸면서 단절된 세대가 소통하는 장을 열었다.
 
이현정 사하품앗이 대표는 “시간화폐 운동은 먼저 이웃 간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며 “천연비누, 천연화장품, 환경수세미 만들기 등 쉽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강의를 열어 사람들이 교류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고 말했다. “송이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로 인해 송이가 점점 불어나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주민들 간 정도 덩달아 불어났다.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 이웃 주민들과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송이가 주는 또 다른 재미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도 시간화폐 운동이 활발하다. 서울 17개 자치구에서 품앗이 공동체가 있다. 자원봉사에 기반을 둔 독특한 형태의 시간화폐도 눈길을 끈다. 2002년 구미에 처음 도입된 ‘사랑고리은행’이 대표적이다. 자신의 봉사활동으로 ‘고리’를 벌어 저축했다가 필요할 때 남의 봉사를 살 수 있다.
 
   
▲ 품앗이 공동체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장터를 열고 필요한 물품을 시간화폐로 사고판다. 부산시청 앞 녹음광장에서 열린 시간화폐 장터에서 주민들이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참여 부족으로 활성화 난망
시간화폐 공동체를 운영하는 이들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지역 내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서 나온 부가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용남 지속가능도시연구센터 소장은 “마을마다 대형마트가 줄줄이 들어서면서 지역자본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지역주민이 시간화폐로 거래할 경우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역 네트워크를 구축해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에 관심을 기울일 기회가 마련된다는 장점도 있다. 지역화폐 전문가인 천경희 가톨릭대학 교수(소비자학)는 “시민 스스로 만든 화폐로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어 저소득층이나 취약계층이 돈이 없어도 병원이나 미장원에 가는 등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며 “시간화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가능한 대안적 경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동네 주민과 각별한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시간화폐의 긍정적 측면이다. 특히 한국은 품앗이, 두레 등 상부상조 전통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만큼 시간화폐가 자리잡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을 지녔다.
 
그러나 이 땅에 소개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국내 시간화폐 공동체 운동이 정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어려움은 참여 부족이다. 천경희 교수는 “참여 부족은 시간화폐가 통용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유통 구조 형성을 가로막는다”며 “가맹점이나 장터 등 시간화폐를 상시적으로 쓰는 장이 마련돼야 시간화폐가 제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운영단체의 열악한 재정 상황도 시간화폐 공동체의 활성화를 막는 걸림돌로 꼽힌다. 박현숙 한밭레츠 사무국장은 “한밭레츠는 출범 뒤 2년까지 운영비가 부족해 여러 번 존폐 위기에 몰렸다. 지역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기까지 어떻게 버텨내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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