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원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올해 다양한 전자책이 쏟아져나왔다. 2007년부터 아마존 킨들이 시장을 견인했지만, 지난 1월 아이패드가 등장한 사건은 원년 선언과도 같았다. 국내에도 시장 규모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양한 단말과 서비스가 등장해 시장은 순식간에 과열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쉽게 끓어오르는 것이 싸늘하게 식듯, 국내 제조사 중 1만 대 이상 판 곳은 없으며, 급기야 삼성전자도 전자책 사업에서 발을 뺐다. 그러나 종이가 아닌 화면을 더 오래 보기 시작한 지 오래됐으며, 책도 전자화를 피할 수 없으리라는 데 이견이 없다. 사실 삼성전자가 발을 뺀 것은 경쟁사의 ‘전자잉크’를 쓴 독서 전용 단말뿐이고, 액정표시장치(LCD)를 쓴 ‘갤럭시탭’으로 다시 시장에 참여했다. 신문이나 음반처럼 책 역시 물질로부터 정보가 분리되는 탈물질화가 벌어지고, 이를 다시 물질로 되담기 위한 그릇의 싸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정보의 탈물질화와 재물질화
글은 지식에 맥락을 주어 구조화함으로써 체계적으로 지식이 축적되도록 한 인류의 오랜 문화 활동이었다. 글은 다시 책으로 구조화되면서 완성된 지식 체계로 빚어질 수 있었다.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그 시절 세상에 있던 지식의 총량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와 현재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의 총량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사자성어 250개로 이루어진 <천자문>에는 과학·철학·사회학 등 당대의 세계 전부가 담겼고, 이것만 제대로 알아도 어엿한 선비이자 교양인이었다.
과거와 비교해 개개인의 지혜의 깊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일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해버린 것만은 사실이다. 의외로 지식 팽창이 일어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임을 알 수 있다. 백과사전이 제한된 인원에 의해 집대성될 수 있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 참조되는 지식은 인터넷을 통해 클라우드 속으로 자동 흡수된 세계의 망라적 지식이다. 백과사전쯤이야 손톱만 한 반도체에 초고밀도로 응집될 수 있는 시대의 특권이다. 그야말로 정보와 지식은 민주화돼 누구나 전자 활자와 전자 윤전기를 갖고 전자 배달원을 지니게 되었다. 구태의연한 백과사전은 위키피디아와 검색엔진이 실시간으로 펼쳐내는 자유로운 형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쯤 되면 MP3라는 괴물에 의해 음악이라는 정보만 빠져나가며 음반 판매가 초토화됐듯이, 책도 정보만 유체 이탈해 초토화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책은 건재했다. 타격을 입은 것은 속보성, 휘발성 정보, 그리고 소장 가치가 없는 정보, 뉴스뿐이었다. 책이 풍기던 물질적 가치는 음반과 달랐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종이. 책에는 종이보다 우월한 매체가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장서를 보관하는 이들은 있어도 신문지를 소장하는 이들은 없듯이, 종이가 주는 편한 사용감과 서적의 소유감도 탈물질화하려는 정보를 붙들어맬 정도는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정보는 끊임없이 물질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다른 정보와 연계해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면 새로운 정보가 되는 속성 때문이다.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정보는 더 탐욕스러운 물질과 재결합해버리기도 한다. 전자책의 무서움은 이 재결합의 가능성을 엿보였다는 데 있다. 종이만큼이나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정보와 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2010년 스마트폰의 유행이 알려준 징조다. 충분히 읽기에 편하고 정보가 결합되기에도 용이하며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전자책이 등장할 수 있음이 비로소 증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이책 자체의 물성(物性)이 귀찮고 번잡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또 이를 소비하는 것이 지구에도 좋지 않다는 인식이 일반인에게 퍼지는 순간, 검색되지 않고 링크를 걸 수도 없고 저장할 수도 없는 불편한 정보 생활을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보다 나만의 보석
종이책의 한계는 사실 경제적 제약에 있다. 편집과 출판의 소요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기획에서 시장 진입까지의 총 프로젝트 기간이 수개월로 늘어난다. 인쇄·유통 비용이 모두 소비자에게 전가되거나 출판사 자체의 이익 압박으로 돌아가는데, 이 모든 것이 종이가 지닌 물성을 사수하기 위한 것임을 고려하면 낭비적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하루 중 소비해야 할 정보의 총량은 늘어나고 있다. 단 그것이 활자에서 화면상의 글꼴로, 더 나아가 멀티미디어 정보로 변했을 뿐이다. 종이가 아닌 LCD에 빼앗긴 것뿐이다. 사람도 시대도 바뀐 것이다.
우리는 서점과 도서관의 서가에서 뿌듯한 지적 포만감을 느끼겠지만, 효과적인 지식의 탐색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늘 단 한쪽의 통찰력이라도 얻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집어들지만 원하는 순간을 만나는 기회비용도 적잖다. 인터넷에 질문을 치면 답이 1초 안에 나오는 세계에 사는 우리들은 이에 낙심하고 책과 멀어진다. 출판사는 그간 정보를 선별·분류하는 관문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전 국민 모두가 같은 베스트셀러를 읽고 만족하던 시대에서 각자가 마음속 베스트 콘텐츠를 가질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바, 모두를 위한 옥석 고르기가 아니라 나만의 보석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물질적 투자가 최소화돼 단 두 권만 팔릴 듯하더라도 내게 최고의 책이라면 출간 가능한 곳이 전자책의 세계다. 이쯤 되면 기존에 출판사가 해온 관문 역할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혜안을 가진 편집자에 대한 브랜드 가치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익숙한 작가가 높은 확률로 나의 지적 취향을 만족시켜주리라는 기대로 저자를 보며 도서를 고른다. 그러나 편집자가 수많은 저자로부터 하나의 트렌드를 잡아 체계화하는 일을 한다면 ‘편집자의 브랜드화’가 일어날지 모른다. 일종의 채널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컨대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전달하는 편집자가 등장해 출판사의 브랜드를 대신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파워블로거’나 ‘트위터 팔로어’가 많은 이들은 원천 정보의 생성자라기보다 탁월한 정보 편집자인 경우가 많다. 지식에도 아키텍트(설계자)가 필요해짐에 따라 출판 기득권의 생존법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베타판’을 통한 쌍방향 소통
경전 몇 권만 독송하면 그만이던 시절과는 달리, 현대의 독서 생활은 사뭇 대등하다. 책을 읽다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경우도 있고, 당장 반론을 펼치고 싶은 경우도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쓴 책 중 특정 챕터를 웹에서 전개되는 논의에 던져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책에는 링크조차 걸 수 없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정보를 여러 형식으로 나눠 실시간으로 소통하려는 욕구는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 정보 소비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생산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추가 정보가 새로 공급되거나 수정이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사진집·요리책·여행서적 같은 장르나 르포 같은 시리즈물은 뉴스만큼이나 최신 소식에 민감하지만 동시에 소장 가치가 있는 품목이다.
종이서적의 경우 특정 매수 정도의 분량을 채워야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자서적은 유통 구조가 단순해져 가격이 다양화될 수 있고, 웹 2.0의 풍조처럼 ‘언제나 베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 권의 책을 빚기 위한 취재 비용을 이제 집필하면서 벌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가격에 합당한 통찰력 있는 내용이 녹아들어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서적이 베타판으로 조기 유통되면서 완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란 지금껏 완성된 체계를 자처했지만, 현장의 실시간 경험을 통해 현재진행형의 소통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단말과 그 시장이 이끌어줄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다음은 문화가 이를 원하며 이 문화를 공급·소비할 시장이 생겨야 한다. 전자(電子)로 이뤄진 자유로운 백지에 단방향 문자만이 인간의 문예를 표현하는 방편이라고 제한할 이유는 없다. 앞으로의 시대에는 부수 경쟁이 아니라 응집력 정도가 성공한 저자를 나타내는 척도가 될지 모른다. 바야흐로 저자의 책을 읽는 것에서 저자와 책을 ‘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