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이슈 > 흐름
     
[Life] 현대판 품앗이 ‘시간화폐’를 아시나요?
유럽의 새 물물교환 수단 ‘시간화폐’
[76호] 2016년 08월 01일 (월) 마리 파르 economyinsight@hani.co.kr

노동력 제공 대가로 시간 받아…
법정통화와 교환 안 되나 세금 대신 내기도

지금 유럽에선 ‘시간화폐’가 새로운 물물교환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시간화폐란 예컨대 서비스 제공자가 이웃 노인의 장보기를 도와줄 경우 그 대가를 돈이 아닌 시간으로 받고 나중에 이 시간만큼 다른 이에게 자신의 아기를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제도다. 현대판 ‘품앗이’다.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약 1700개의 시간화폐 거래 단체가 존재한다. 일부에선 시간화폐로 세금을 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법정통화와 교환되지 않는다. 자원 절약형 소비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자체나 환경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한다.

마리 파르 Marie Fare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서비스 제공 대가를 돈이 아닌 시간으로 받는 것은 서비스 물물교환을 의미하며 일종의 품앗이라고 볼 수 있다. 발상 자체는 1970년대 일본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돌봄 서비스 네트워크 ‘돌봄을 위한 기부’와 함께 처음 나왔다. 이 발상이 1990년대 이후 국제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시간화폐’(Time-money) 시스템 덕분이다. 현재 전세계에 약 1700개의 시간화폐 거래 단체가 존재한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시간화폐는 개인만 사용할 수 있고 특정 지역에서만 거래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시간화폐 단체는 ‘아코르데리’(제공자)다. 아코르데리는 원래 캐나다 퀘벡의 사회복지단체 ‘데자르댕 연대경제금고’와 ‘퀘벡 생로슈 재단’이 설립한 시간화폐 네트워크로, 현재 퀘벡에 10여 개가 있고 프랑스에는 20여 개가 있다.

아코르데리는 연소득 1만유로(약 1280만원) 미만의 저소득자나 실업자, 독거 노인 등 생활이 불안정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예로 프랑스 남부 샹베리의 아코르데리는 회원의 3분의 1이 연소득 1만유로 미만 저소득자다. 캐나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캐나다 아코르데리 회원의 약 58%는 연평균 소득이 1664만원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코르데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사, 교통, 수리, 컴퓨터·음악·요리·외국어·사진·영상물 제작 등 지식 교환, 아이 돌보기, 청소·벽지도배·목공·원예 등 집안일, 회계, 보석·바느질·가죽 공예 등 수공예, 스포츠 트레이닝, 대체의학, 숙박, 미용 등 그야말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역화폐와 마찬가지로, 시간화폐는 교환 자체에서 일종의 가상화폐가 창출되는 상호 신용 시스템에 기반을 둔다. 시간화폐를 주고받는 ‘시간은행’은 일종의 중앙은행 구실을 하는데, 아코르데리의 모든 회원은 이 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다. 다른 회원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때마다 제공 시간이 계좌의 오른쪽 대변에 기록된다. 반대로 서비스를 제공받은 사람의 계좌에선 제공받은 시간이 계좌의 왼쪽 차변에 기록된다. 서비스 교환은 엄격한 등가교환 원칙을 따른다. 모든 서비스는 서비스의 종류, 숙련도와 상관없이 1시간은 1시간으로 교환된다. 각 회원은 제공한 서비스와 제공받은 서비스가 기록되는 시간 계좌를 보유한다.

사회적 소외 퇴치운동  

   
▲ 노인 돌봄 서비스를 한 뒤 그 대가를 시간으로 받아 나중에 자신의 아기를 다른 이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시간화폐’가 최근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다. 영국 리버풀에서 여성들이 유모차를 밀고 있다. REUTERS
실제 화폐로 환전할 수 있는 몇몇 지역화폐와 달리, 시간화폐는 해당 국가의 법정통화로 환전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시간화폐는 법정화폐와 절대 교환되지 않는다. 오직 서비스 자체만 시간으로 계산된다. 만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이동해야 한다면, 서비스 구매자는 시간화폐 외에 따로 교통비를 지급해야 한다. 또한 서비스 제공 중 사용되는 재료 비용은 법정화폐로 지불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아코르데리 시스템에 참여하길 원하면 그는 다른 회원에게 제공할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의 이해가 일치하면 회원들은 중개인 없이 직접 거래한다. 서비스 이용자는 제공자에게 대가로 ‘시간수표’를 내고 제공자가 이 수표를 아코르데리에 제출하면 해당 거래가 기록된다. 이 거래의 기록자는 아코르데리의 직원이거나 또 다른 아코르데리 회원이다. 이 회원은 거래를 기록하는 대가로 여느 회원과 동등하게 시간화폐를 받는다. 자원봉사자가 없다는 게 아코르데리의 특징이다. 아코르데리 조직 운영이나 공동서비스 활동에 투자한 시간도 다른 서비스 교환과 마찬가지로 시간화폐로 보상받는다. 계좌의 관리와 회계는 컴퓨터를 이용해 중앙에서 처리한다.

시간은행은 보통 지자체나 사회경제 운동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예로, 이탈리아에선 2000년 관련 법의 제정으로 400개 넘는 시간은행이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시간은행은 지역 차원에서 주민들의 사회적 관계를 재구축하고 상호부조를 실현하는 도구로 인정받고 있다.

영미권 국가에선 지자체가 직접 시간은행을 설립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대부분 시간은행에 돈과 현물을 지원한다. 그러나 지자체의 지원이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행의 경제활동은 화폐를 매개로 성립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정부 당국이 사회보장 분담금과 납세액을 계산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시간은행의 법적 지위가 모호하다. 그래서 북유럽 국가들은 시간은행에서 교환되는 서비스를 과세 대상 항목에 포함시키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모든 시간은행의 당면 과제는, 첫째 지금처럼 단순히 사회적 취약계층뿐만 아니라 좀더 광범한 계층이 시간은행을 이용할 수 있도록 고객층을 확대하는 것이다. 둘째, 상근 직원을 고용할 수 있도록 공공자금이든 민간자금이든 외부의 자금 지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상근 직원이 없으면 서비스 교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어렵다. 시간은행은 상업화의 함정에 빠져 단순한 경쟁 기업으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영국의 몇몇 시간은행처럼 정부나 지자체의 위탁을 받아 사회정책을 실현하는 일종의 하청업체 구실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 시간은행은 매우 좁게 나 있는 길을 따라 신중히 행보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경제 주체와 협력관계를 구축해 여러 자원을 적절히 배합해 사용해야 한다.

많은 시간은행이 사회 위기를 계기로 등장했다. 예컨대 2008년 이전 그리스에선 시간은행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에는 약 70개의 시간은행이 있다. 그런데 시간은행 설립 운동은 단순히 임시방편적 목적만 내세우지 않는다. 많은 시간은행이 개인의 활동 능력을 고양하면서도 상호성과 평등 원칙에 기초한 교환 영역을 창조함으로써 주류 경제모델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사회 위기를 계기로 잇따라 등장

   
▲ 시간화폐를 주고받는 ‘시간은행’은 자원봉사, 가사일 등 주류경제학에서 경제활동으로 간주하지 않는 활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캐나다 리치먼드에서 열린 연어축제에 참가한 자원봉사자들이 숯불에 연어를 굽고 있다. REUTERS
아코르데리 헌장의 일부이다. “아코르데리는 서비스 제공자인 모든 시민의 재능과 능력을 인정하고 평등과 연대를 추구한다. 아코르데리 회원들의 능력과 지식의 가치는 시간을 기준으로 교환된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일하다.” 시간을 기준으로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 혹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위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간은행 덕분에 승용차 함께 타기, 재활용, 수리, 공구 빌려쓰기 같은 자원 절약형 소비 방식이 보급되는 것은 환경에도 긍정적 영향을 준다. 이를 통해 상품의 사용 기간을 늘리고 천연자원 고갈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간은행은 가사일이나 자원봉사처럼 주류경제학에서 경제활동으로 간주하지 않는 활동과 능력을 인정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처럼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사회가 생산한 부를 국내총생산이 아닌 다른 개념을 사용해 측정하며 시장이나 고전적 사회복지 국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원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매개하는 촉매제가 된다. 따라서 아코르데리 회원이 된다는 것은 지금과 다른 사회의 건설에 기여하는 일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브뤼노 테레는 단순히 지역 차원의 시도를 넘어 정부 당국이나 지자체가 시간화폐를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즉, 정부와 지자체는 시민 활동에 할애되는 시간을 인정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를 위해 당국은 시간화폐를 발행해 시민이 공익활동에 시간을 투자할 때마다 시간화폐로 보상한다. 시민은 일반 시간은행에서 시간화폐를 이용해 타인의 서비스를 살 수 있지만, 세금의 일부를 시간화폐로 낼 수도 있다. 시간화폐와 유로의 환전 비율은 시간당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사전에 결정되고 단일 환율이 적용될 것이다.

브뤼노 테레의 제안은 당연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사회적 변화의 도구로서 시간화폐의 잠재력을 보여준다. 시간화폐를 통해 사회는 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부를 측정하며, 상품 교환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필요를 충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16년 6월호(제358호)
Le temps, ce n’est pas que de l’argent
번역 박수현 위원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마리 파르의 다른기사 보기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0)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김현대 | 편집인 : 강대성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백기철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