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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케인스가 꿈꿨던 ‘행복경제학’
[경제사 산책]
[6호] 2010년 10월 01일 (금) 박종현 economyinsight@hani.co.kr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추리소설 보는 게 유일한 낙이던 때가 있었다.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던 단서들의 아귀가 완벽하게 맞아들어가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것을 경탄의 눈길로 감상하면서 일상의 무게를 잠시나마 잊곤 했다. 추리소설은 내게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은 물론 인간의 본성이나 심리에 대한 나름의 잣대도 제시해 줬던 것 같다. 미스 마플의 깔끔한 사건 해결 속에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인 세계관을 맛깔나게 버무려놓던 애거사 크리스티나 십자군 전쟁이 막 끝난 수도원을 배경으로 시간여행을 시켜주던 앨리스 피터스의 책은 지금도 들쳐보곤 한다. 소설 뒷부분에서 항상 독자에게 도전장을 보내던 엘러리 퀸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 나는 내 패를 다 보였다. 여러분이 가진 정보와 내가 가진 정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범인을 찾아보시라.”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본문의 단서들을 재구성하는 과정과 함께 자신이 숨겨둔 범인을 내놓는다. 꽤 많은 책에서 그가 낸 도전에 호기롭게 맞섰으나 범인을 맞힌 기억은 거의 없다.
미국발 경제위기와 함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꼽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그가 쓴 아주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재평가한 묵직한 단행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하 ‘가능성’)이라는 제목을 단 케인스의 에세이, 그리고 경제학자 16명이 모여 완성한 <케인스 다시 보기: 우리 손자 세대의 가능성> (Revisiting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하  <다시 보기>)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 바로 엘러리 퀸의 ‘독자에의 도전’이었다.
 
   
<케인스 다시 보기: 우리 손자 세대의 가능성>

추리소설과 흡사한 케인스의 예언
‘가능성’에는 100년이라는 먼 미래를 시야에 두고 당시 끝없이 확산되던 비관주의와는 전혀 다른 장대한 낙관론이 펼쳐지고 있다. 케인스는 이 과정에서 100년 뒤의 소득수준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치까지 제시함으로써 미래 세대까지도 잠재적 독자로 끌어들여 자신의 예언에 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가능성’은 아주 짧은 글이지만 경제발전의 메커니즘, 인간의 경제적 욕망, 자본주의의 미래, 인간의 행복 등 굵직한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몇몇 학자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장난처럼 시작됐던 재평가 논의가 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에서도 이 얇은 저작의 무게를 가늠해볼 수 있다. <다시보기>는 케인스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가늠하고 이 예언이 왜 맞았는지(또는 왜 틀렸는지)를 해명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범인은 누구며 범죄의 동기는 무엇이고 범행은 어떤 과정을 통해 전개됐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혀내려는 추리소설과 흡사해 보인다.
케인스는 경제성장의 핵심이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에 있다고 봤는데, 이는 현대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하지만 케인스 당대만 해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탁견이라는 게 ‘가능성’을 재검토한 경제학자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부터 1700년까지 약 4천 년 동안에는 거의 정체 상태였던 반면 이후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하게 되는데, 두 시기를 가른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의 유무였다. 1930년 당시 대공황으로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경제성장을 이끄는 이 두 축은 여전히 견고하다는 게 그의 흔들림 없는 판단이었다. 그는 이런 판단을 근거로 복리의 마술이 더해지면, 앞으로 100년 동안 선진국의 경우 소득수준이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가 높아지리라는 초장기 전망을 내놨다. 소득수준이 8배 개선된다는 것은 연간 경제성장률을 2.1%로 예상했을 때의 수치인데, 케인스의 예측치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자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100년 전에 적중한 선진국 소득수준 전망
그런데 ‘가능성’에 100년 뒤 소득수준에 대한 예측에 더해, 앞으로 인류를 찾아올 새로운 경제적 조건과 이 속에서 인류가 선택하게 될 새로운 생활양식에 대한 예언도 담겨 있다. 대규모 전쟁이나 인구 증가만 없다면, 100년 뒤쯤에는 경제적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인간은 본성상 만족을 모르는 존재”라는 경제학의 뿌리 깊은 전제를 송두리째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나누고, 인간이 천사가 아닌 한 남보다 앞서기를 원하는 상대적 욕구는 여전히 남겠지만 절대적인 욕구는 충족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기술혁신과 자본축적으로 물질적 부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절대적 욕구와 관련된 기본적인 경제적 문제 또한 해결될 것이므로, 인류는 이로부터 얻게 된 자유로운 시간과 에너지를 비경제적인 목적에 쏟게 될 것이고 기존의 가치관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부의 축적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미덕으로 꼽히지 않게 되면 도덕규범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지난 200년 동안 우리를 괴롭혀왔던 사이비 도덕원칙 중 많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본축적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눈을 감아주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경제적 관행을 폐기할 수 있는 길도 마침내 열릴 것이다. 우리는 다시 수단보다 목적을 더 높게 평가할 것이고, 유용성보다 선을 선호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시간을 고결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주는 사람들과, 어떤 노고나 쓸모도 없이 들판에 가득 피어 있는 백합과 같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부터 직접적인 기쁨을 이끌어낼 유쾌한 사람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설득의 경제학> 212~216쪽 재구성) 케인스는 이런 사회의 도래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물론 인정한다. “인류는 이제까지 뭔가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다듬어져온 대신 뭔가를 즐기도록 훈련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남는 시간을 한껏 즐길 수 있으려면 과거의 습관이나 본능을 조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결국 더 많은 시간을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더 많은 것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자발적으로 하게 될 것”(<설득의 경제학> 209~212쪽 재구성)이라는 담대한 전망을 내놓는다.
경제성장에 대한 케인스의 장기 전망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면, 100년 뒤의 경제적 생활과 사회상에 대한 그의 유토피아적 예언은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케인스의 후손은 그가 예언한 것보다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본축적과 기술혁신은 여전히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상정돼 있으며 저축과 일로부터도 해방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심지어 미국의 경우에는 전반적인 노동시간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다시 보기>의 저자들은 100년 뒤의 소득수준을 그토록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던 사람이 미래사회의 커다란 흐름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을 제시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저축과 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노동자들
먼저 상대적으로 왼쪽에 있는 경제학자들은 소득분배의 문제를 경시했던 것이야말로 케인스의 예언이 현실과 어긋난 일차적 이유였다고 분석한다. 정보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더 많은 소득이 소수의 자본 소유자와 고숙련 노동자에게로 집중되는 반면, 비숙련 노동자의 소득은 정체 상태를 보이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처럼 실질소득은 늘지 않았지만 기업의 광고나 마케팅 활동으로 개인들의 소비 욕망은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저숙련 노동자는 케인스의 예언과 달리 노동시간을 오히려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한편 경제성장 이론을 최초로 체계화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솔로는 자본과 노동의 대체 가능성에 주목한다. 기술진보와 자본축적으로 자본이 노동을 쉽게 대체함에 따라 노동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고 단위당 임금 또한 낮아져 오랜 시간을 일하지 않고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 교섭력이 노동 교섭력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다수의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일을 줄이고 여가를 늘린다는 전망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경제학자들은 부자들의 노동시간도 늘어났다는 점을 강조하며 케인스의 자본주의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인적자본 이론으로 유명한 게리 베커에 따르면, 케인스의 예견은 영국의 신사만 염두에 둔 것이다. 이들은 부를, 주로 부동산 또는 금융자산의 형태로 보유하고 있으므로 소득은 일과 무관하게 생기며 소득이 늘어나면 여가를 선호한다. 그러나 현대의 부자들은 자산가가 아니라 고숙련 자영업자로서 대부분의 부를 인적자본 형태로 보유하므로, 근로의 대가가 비싸지면 더 많은 소득을 겨냥해 여가 대신 근무시간을 늘리게 된다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과 함께 자연실업률 가설을 제창해 정책적 개입의 무능력을 입증하려던 에드먼드 펠프스는 인간 행동에 대한 케인스의 인식이 단순하고 자본주의관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의 경우 일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존감이나 사회적 관계망으로서의 역할을 경시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부정적이며 병리적인 현상임이 분명한 돈에 대한 사랑, 탐욕만을 자본주의 인간형의 핵심 동기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펠프스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란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부단한 갈망을 지닌 존재이며 새로운 도전과 자극에 맞서 이를 해결해내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케인스가 꿈꾼 미래는 올 것인가
최고의 탐정도 범인을 찾아내는 데 실패할 때가 있는 것처럼, 최고의 경제학자들이라고 해서 과녁을 항상 명중시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보기>에 나오는 분석 중에는 동의할 수 없는 진단들도 제법 보인다. 특히 케인스가 일을 고통으로만 인식했다거나 일(자리)이 사람들에게 돈벌이 이상의 존재임을 경시했다는 주장은 케인스에 대한 오독이다. 케인스가 비판한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돈벌이만이 목적인 일,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일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경제와 케인스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 사이에 적잖은 거리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축적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높은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 경제는, 명칭이야 어떻든 자본주의와 거리가 먼 시스템이다. 그리고 물질적 부에 대한 탐구를 존재 이유로 상정한 전통적인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제성장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분투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며, 한 차원 높은 물질적 진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반생산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케인스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제성장은 행복에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 케인스에게 행복은 선하고 덕성이 있으며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자유롭게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삶과 관련이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스의 예언은 절반만 맞았고 그가 꿈꾼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인간관이나 자본주의관에 모종의 결함이 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그의 예언에는 경청할 바가 많다는 게 <다시 보기>의 전반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은 세계 최고 경제학자들과 다소 다르다. 경제활동에 쓰이던 시간을 다른 활동으로 대체하더라도, 기술혁신이 경제활동이 아닌 학술활동이나 다양한 지적 활동을 통해서도 이뤄지는 추세를 고려할 경우, 추가적인 물질적 진보도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을 어디에 사용할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인지가 관건일 텐데, 어쩌면 최근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기업·제3섹터·비영리활동·사회적 책임투자·시민운동·새로운 정치적 결사체·학부모회 등 각종 대안적 단체가 케인스가 꿈꿨던 새로운 세상의 전령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앞으로 사람들의 시간과 돈과 관심을 놓고 기업과 비영리단체 사이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케인스가 꿈꾼 세상이 올 것인가의 여부는 그 경쟁의 향배에 좌우될지 모른다. 두 활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인류를 지탱하는 근간은 기업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다수 경제학자들의 입장이라면, 기업과 비영리단체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진다는 게 케인스의 입장일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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