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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웅의 선거와 경제] ‘우리가 남이가’는 더 이상 없다
유권자가 보낸 4·13 총선 메시지
[74호] 2016년 06월 01일 (수) 윤희웅 economyinsight@hani.co.kr

유권자는 그동안 뿌리 깊은 지역정치 구조에서 충성을 강요받았다. ‘한번 바꿔보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도 정작 투표소만 가면 ‘아무리 그래도 우리 고향 사람이 낫겠지’라는 미신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간혹 반지역 정서가 담긴 표심이 나오더라도 강도는 미미했다. 각 정당도 ‘그럼, 그렇지’라며 웃어넘겼다. 2016년 4·13 총선은 각 정당의 얼굴에서 이런 웃음기를 싹 가시게 했다. ‘못하면 바꾼다’는 유권자의 경고가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다.

충성하기(Loyalty), 목소리내기(Voice), 빠져나가기(Exit). ‘세상을 꿰뚫어본 철학자’로 불리는 정치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이 저서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 Voice, Loyalty)에서 조직이 쇠퇴할 때 소속 구성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은 것들이다.

‘충성하기’는 조직에 불만이 있든 없든, 수동적으로 남아 순응하는 방식을 말한다. 반발하지도 않고 다른 조직을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조직은 구성원의 기대를 일정 수준만 충족해주면 그만이다. ‘목소리내기’는 항의하는 것이다. 이들은 조직에 불만을 표시한다. 의사결정권자에게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흔들리는 조직의 정상적 회복을 기대하는 적극적 행동이다. ‘빠져나가기’는 목소리내기보다 더 적극적이지만 조직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흔들리는 조직을 과감히 탈출해 다른 조직에 가담하는 행동이다.

회사 직원을 예로 들면, 불만이 있지만 이직이 사실상 어려운 경우 조직에 충성한다. 성실히 업무를 수행하고 급여나 복지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직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의 경쟁력이 떨어질 경우 조직 내에 눌러앉아 충성하기로 마음먹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본인 역량에 자신이 있고 이직 가능성이 높을 경우, 직무 만족도가 떨어지면 과감히 요구 사항을 내놓는다. 자신의 목소리가 수용되지 않으면 결국 이탈을 선택한다.

   
▲ 2016년 4월14일 부산시의회 브리핑룸에서 새누리당 부산시당 선거대책위원회가 4·13 총선 기자회견을 하다가 유권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4·13 총선은 각 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연합뉴스

허시먼의 ‘충성, 항의, 이탈’ 모형은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된다. 인터넷 커뮤니티 탈퇴 여부, 거주지 이전 여부, 구독신문 변경 여부 등을 설명할 때 유용하다. 불만이 있으면 문제제기를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옮겨가면 그만이다. 시장에서는 이탈의 선택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경쟁 구조가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 구조가 아닌 경우에는 이탈이 쉽지 않다. 허시먼도 공공영역에서는 항의나 이탈이 쉽지 않다고 봤다. 가령 살고 있는 나라를 마음대로 바꾸기는 어렵다. 국가에서 이탈은 이민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선 상당한 비용이 든다. 티부(C. M. Tiebout)는 주민들이 지역(지방자치단체)을 자유롭게 옮겨다닐 수 있다고 하며, 지방공공재(地方公共財) 공급과 관련해선 이탈이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이른바 ‘티부의 가설’인데,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에 맞는 지방정부를 택해 이동한다는 ‘발에 의한 투표’(voting with feet) 가능성을 얘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자치단체별로 자녀출산수당, 복지시설 등의 차이로 인해 이주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다. 물론 지역을 옮길 때 주택과 교육 문제 등이 함께 걸려 있을 경우 결정이 자유롭지만은 않다. 다른 선택을 결정할 때는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완전한 경쟁체제가 전제돼야 한다.

공기업과 사기업이 경쟁하는 환경의 경우, 구성원들은 대안 선택이 가능해 불만이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지만 불만의 근본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애초 허시먼이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모델의 영감을 얻었던 나이지리아 철도공사 사례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 철도공사의 서비스가 부실하자 나이지리아 이용자들은 개선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민간 트럭업체에 화물을 맡겨버렸다. 이탈의 대안이 존재했기 때문에 굳이 불만을 표출하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개선의 유인이 없는 공조직인 철도공사는 서비스 개선을 하지 않았고, 저소득층은 질 낮은 서비스를 그대로 이용해야 했다.

미국 교육시장도 비슷하다. 공립학교의 교육서비스가 부실해지자 부유한 학부모들은 자녀를 사립학교로 전학시켰다. 전반적인 불만은 줄어들었지만 공교육 부실은 더 큰 과제로 남았다. 이런 사례는 경쟁체제 도입이 오히려 사회악을 해소하지 못하고 고착화한 것이다.
 
여야 정당을 긴장시킨 유권자의 선택

사기업 간 경쟁 시장에서는 소비자의 이탈 가능성이 기업 개선으로 이어진다.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할 경우 기존 기업은 압박을 느낀다. 고객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수용한다.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고객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은 중요한 일상적 업무가 됐다. 없던 고객이 생기는 것보다 있던 고객이 달아나는 것이 더 큰 타격이기 때문이다.

허시먼의 모델은 정당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 지지자들은 허시먼의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모델로 설명하기 곤란했다. 떠나고 싶어도 특정 지역에선 대안이 없었던 탓이다. 영남과 호남에선 특정 정당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부재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충성하거나 지엽적으로 항의할 뿐이지 이탈하지 못해 정당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2016년 4·13 총선은 지지자들이 떠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영호남의 정당 구도가 경쟁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절대적 기반이던 영남에서 야당이나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됐다. 견고한 지지를 보내주던 50대의 정당득표율도 40%를 넘지 못했다. 경쟁력 있는 인물들이 야당과 무소속으로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도전하며 경쟁체제가 형성됐다. 호남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은 참패했고 신생 정당인 국민의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역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경쟁체제가 형성되면서 이탈이 커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탈의 대안이 없다보니 유권자는 충성을 강제당해왔다고 할 수 있다. 간혹 소규모 반발이 있었지만 각 정당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근본적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유권자들을 ‘정치적 인질’로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항공사들이 마일리지 정책을 도입함으로써 고객 충성도를 유지하고 이탈을 막고 있듯이 말이다.

유권자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아도 됐던 ‘모르쇠 정당들’이 이제는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이 특정 정당에 머무르며 태만하던 유권자들도 유동성을 지닌 적극적 선택권자로 변신했다. 인질에서 주인이 된 것이다. 과거처럼 정당들이 굼벵이처럼 굼뜬 모습을 보이다가는 미래가 더욱 초라해질 수 있다. 이제는 정당이 선택해야 한다. 반응할지, 외면할지.

waymaker@opinionlive.co.kr

* 윤희웅은 오피니언라이브(OPINIONLIVE)에서 여론분석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과 민(MIN) 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을 거쳤다. 대중심리의 형성과 표출 과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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