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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스타트업 열풍이 되살린 ‘기업가정신’
한·중·일 스타트업 성지를 가다- ③ 일본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
[73호] 2016년 05월 01일 (일) 김연기 economyinsight@hani.co.kr

 ‘아베노믹스’ 동력 삼아 젊은이들 “대기업 취직보다 창업”…
정부가 이끄는 창업 생태계

<뉴욕타임스>는 최근 장기간 경기 침체에 빠진 일본에 어려운 환경을 헤치고 기업을 일구려는 ‘기업가정신’이 다시 꿈틀댄다고 보도했다. 젊은이들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창업으로 눈을 돌리고 정부와 대학, 기업은 다양한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과 투자 생태계를 마련해 이들을 뒷받침해준다. 일본을 스타트업 불모지에서 창업 천국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벤처지원 업무단지인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다. 이곳은 거대한 스타트업 비즈니스의 중심지다.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창업에 도전하기 위해 줄을 잇고, 일본을 넘어 외국인 인재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힘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협업하는 생태계가 마련된 나라다.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충분한 규모의 내수시장까지 있다. 일본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겉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서서히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

도쿄(일본) =김연기 부편집장
 
“저것 보세요! 정말 굉장하죠?” 2016년 3월3일 일본 도쿄 신주쿠의 쇼핑센터 ‘아에온’ 9층 대강당. <이코노미 인사이트> 취재진을 안내하던 변성훈 벤처어메이징 대표가 행사장을 가리키며 신나게 떠들었다. 일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조망하기 위해 도쿄를 찾은 취재팀을 변 대표가 이곳으로 먼저 안내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한 이동통신사가 주최한 행사에 1천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이 회사의 창업 지원 프로그램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를 졸업한 5개 스타트업이 자신들의 사업모델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벌써 만 3년 가까이 매주 목요일 아침 7시면 창업을 꿈꾸는 일본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사업 구상을 발표합니다. 이를 보기 위해 대기업 및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이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정부의 입김없이 완전히 민간기업 중심으로 이런 행사가 꾸준히 운영되고 있죠. 이 행사만 해도 벌써 140회째를 훌쩍 넘겼습니다.”

전세계에 스타트업 열풍이 불고 있는 것과 달리 일본 젊은이들은 새로운 도전에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날 행사장의 모습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부른 노래와 연주를 동영상으로 올리면 다른 이용자가 그 위에 음성과 연주를 입히는 컬래버이션(Collaboration·협업) 기능이 특징인 서비스입니다.” “외출할 때 날씨 상태는 물론이고 약속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최적의 패션 코디를 제안해줍니다.” 무대에 올라선 일본 창업 준비생들은 하나같이 자신감과 활기가 넘쳤다.

봉건시대 무사 빗댄 ‘스타트업 사무라이’

   
▲ 일본의 달라진 창업 열풍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트업 행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3월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스타트업 행사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에서 일본인 예비창업자가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REUTERS
일본의 달라진 창업 열풍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트업 행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3월17일 미국 텍사스 오스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세계 최대 콘텐츠 분야 스타트업 행사인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에 일본 스타트업이 대거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의 스타트업은 5개사에 그쳤지만 일본은 20여 기업이 참가했다. 각 나라의 전시관 규모 면에서도 일본은 한국을 비롯해 미국, 홍콩, 중국 등을 압도했다. 류상윤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그동안 일본은 벤처기업과 창업이 활발하지 않은 나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2016년 SXSW에는 일본 스타트업이 대거 참가해 최근 일본의 창업 열풍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기업 창업에 뛰어든 이들을 봉건시대의 무사인 사무라이에 빗대 ‘스타트업 사무라이’라고 부른다. 도쿄 시나가와에 자리잡은 벤처지원 업무단지인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는 일본 스타트업의 성지이자 작은 실리콘밸리다. 이 업무단지는 신생기업에 싼값으로 공간을 빌려주고 여러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다. 입주기업에는 무료 법률 자문을 비롯해 숙식 공간 등 생활편의 시설을 제공한다. 매달 한 번씩 ‘사무라이 벤처 서밋’을 열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3월6일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가 들어선 건물에 도착하자 거대한 사무라이 걸개그림이 가장 먼저 기자를 맞았다.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사무라이 정신을 계승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 요시다 다이치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 지원 파트 매니저의 설명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이번엔 복도 양옆으로 진열된 <핀테크 혁명, 드디어 일본 상륙> 이란 제목의 책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낮 12시가 조금 안된 시간 관광버스 1대가 건물 앞에 섰다. 번호판을 보니 도쿄에서 족히 3시간 이상 걸리는 나고야 차량이었다. 차문이 열리자 20대 젊은 남녀 수십 명이 차에서 내려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로 향했다. 나고야대학 창업지원센터에서 온 견학생들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요시노 마이(21·나고야대 학 4학년)는 “기업에 들어가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삶 대신 창업의 길을 선택해 당당하고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선배들의 모습에 매료돼 창업을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 다. 이들을 따라 2층 업무 공간으로 들어가니 점심시간을 넘겼는데도 창업 회의가 한창인 젊은이들로 시끌벅적했다. 농구장 크기의 공간을 창업 열기로 가득 메우며 창업의 꿈을 키워가는 이들이 족히 100명은 돼 보였다. 현장에는 일본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는 이른바 스타트업의 성지다. 주말이면 창업 열기를 느끼려는 젊은이들이 줄을 잇고, 일본을 넘어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일본 북단 홋카이도부터 남단 규슈의 젊은이들이 창업을 위해 가장 먼저 이곳을 찾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곳을 ‘스타트업 유원지’라고 정의했다. 단순히 창업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차원을 넘어 창업을 꿈꾸는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최근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성장이 멈춘 일본은 황혼에 접어들었지만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무기로 한 강력한 흡인력으로 사람, 돈, 물건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불황이 상시화된 일본이지만 이곳에는 고도 경제 성장기 때의 파워가 남아 있다. 일본 언론이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를 흔히 ‘신흥국’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핀테크(Fintech·금융과 정보기술의 결합) 스타트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공간인 피노라보(FinoLab)도 도쿄의 대표적인 스타트업 성지로 불린다. 피노라보는 일본의 3대 은행 본점이 자리해 ‘금융 1번지’로 불리는 마루노우치 도쿄은행연합회빌딩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 최대 광고대행사인 덴쓰가 운영하는 이곳에는 20개에 가까운 유망 핀테크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다. 전국 각지의 금융권 관계자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을 찾아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는다. 특히 은행권이 분주하다. 주요 은행들은 핀테크 관련 부서를 대거 보강하고 앞다퉈 스타트업과 연계한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이같은 열기를 반영하듯 일본 최대 경제신문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16년 3월 창간한 <닛케이 핀테크>는 1년 구독료가 48만엔(약 500만원)에 달하지만 창간 한 달 만에 5천여 명의 정기구독자를 모집했다.
 
핀테크 스타트업 육성 공간 ‘피노라보’

이미 사업이 궤도에 오른 핀테크 스타트업도 많다. 개인 자산 관리에 특화된 ‘머니포워드’와 ‘머니트리’가 대표적이다. 모든 은행 거래 내역과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자동으로 연결해 이른바 ‘온라인 가계부’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업 1년 만에 300만 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했다.
이곳에서 만난 창업 준비생들은 이런 열풍의 배경에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아베노믹스 덕분에 경기낙관론이 퍼지면서 창업과 투자가 활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투자사 ‘올댓벤처스’의 기노시타 요시히코 대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안정적인 일자리와 정년퇴직이라는 가치 대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게 낫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소니·샤프 등 일본의 대형 정보기술(IT) 기업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에 뛰어드는 사람도 많다. 벤처투자사 ‘브레인파워벤처스’의 요시다 슈이치 대표는 “일본 IT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잃다보니 많은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일본 젊은이들이 다시 창업에 나서게 된 이유로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애플과 삼성의 질주도 일본 젊은이들의 변화에 일조했다. <뉴욕타임스>는 “일본 기업이 이들에게 무너지면서 앞으로 자신들의 정년을 지켜줄 안정적 기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창업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1년 전 인터넷 기업을 설립한 후쿠시마 요시노리(25) 대표는 “대학 졸업 뒤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다”며 “스티브 잡스가 보여줬듯이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건 한두 개의 성공 스토리”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스타트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일본은 올해 SXSW에 공무원과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 등 300여 명을 정부 차원에서 파견했다. 일본의 창업 열기는 스타트업에 몰리는 정부 대출과 투자금 규모로도 나타난다. 일본 정부가 출자해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일본정책금융공고에 따르면 2011년 947억엔(약 9900억원)에 불과했던 스타트업에 대한 대출 금액은 2013년 1821억엔, 2014년 2214억엔, 2015년 2967억엔으로 급증했다. 또한 일본벤처리서치에 따르면 2011년 378억엔(약 3900억원)에 그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금은 해마다 크게 늘어 2012년 557억 엔, 2013년 729억엔, 2014년 1154억엔, 2015년 1327억엔으로 증가했다.

일본 대학들이 신생기업 육성에 관심을 보이는 점도 긍정적 변화다. 도쿄대학을 비롯한 주요 대학들도 스타트업 활성화를 위해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고 벤처 펀드 조성에 나섰다. 그동안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취업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겨온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스타트업 양산을 위한 교과 과정 개발에 도 적극적이다. 도쿄대학과 와세다대학은 신생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2015년 한 해 동안 각각 25개, 5개 스타트업 창업을 도왔다.
 
‘아베노믹스’가 되살린 창업 정신 

   
▲ 일본 이동통신사 소프트뱅크가 2016년 3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한 스타트업 경연대회에서 어린이들이 소프트뱅크의 인공지능(AI) 로봇 ‘페퍼’를 살펴보고 있다. 최근 일본에선 어려운 환경을 헤치고 기업을 일구려는 ‘기업가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금의 스타트업 창업 붐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렇지만 2000년대 초반 1차 벤처 붐이 차갑게 식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이곳 예비창업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후쿠시마 요시노리 대표는 “마이너스 성장이 우려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과거 세대와 비교했을 때 직장을 대하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며 “이들의 진취적인 움직임과 창의적 발상이 성공적인 스타트업 창업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인다고는 하지만 요즘 일본 거리를 다녀보면 여전히 활력이 눈에 띄게 줄었다.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5년 이상 흘렀지만 공포와 긴장이 여전했다. 향후 20년 안에 사상 최악의 대지진마저 예고된 상태다.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익숙해진 장기 불황 탓에 경기가 바닥을 헤매는데 재해까지 겹치며 전반적으로 찬바람이 싸늘하다. 그렇지만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취재 내내 품었던 근본적인 의문은 일본 경제주간지 <니케이 비즈니스> 기자를 만났을 때 풀렸다. “스타트업이 모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경제의 다이내믹함은 끊임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젊은 사업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기업가정신이 있다. 과거 일본 경제를 무서운 속도로 성장시킨 주역들도 모두 한때는 젊은 사업가였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기업가정신을 계승하는 사무라이 스타트업 아일랜드에는 지금의 일본이 되살려야 할 그 무엇이 있다.”

y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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