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국제 > Perspective
     
독일 부흥의 상징, 베일을 벗다
[Enterprise]
[5호] 2010년 09월 01일 (수) 주자네 아만 외 economyinsight@hani.co.kr

주자네 아만 SUSANNE AMANN <슈피겔> 기자
얀코 티에츠 JANKO TIETZ <슈피겔> 기자

알디(Aldi) 창업자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또 다른 창업자의 아들이 드디어 침묵을 깨뜨렸다. 독일을 대표하는 이 기업은 지금 재정비 중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할인판매 체인 제국’은 기괴한 일화가 가득 차 있는 동시에 세계화된 사회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반영해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형제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비한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고 은밀한 동시에 냉철하며 미래를 내다보면서도 인색에 가까울 정도의 절약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들이 평생 기업을 이끌어온 방식이기도 하다.
   
카를 알브레히트

겉치레는 안중에도 없는 재벌가
독일 에센시 한 관청의 서류철에는 백만장자이자 할인점 제국을 세운 카를 알브레히트와 테오 알브레히트가 제출한 서류가 보관돼 있다. 서류에 따르면 카를은 1997년 이미 6만9984마르크를 지급하고 브레드네이에 위치한 시립공원 묘지 15구역에 있는 8개 장지를 자신과 가족을 위해 구입했고, 동생 테오는 약 2개월 뒤에 6만5912마르크를 내고 1구역에서 14개 장지를 계약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알브레히트 형제는 묘지를 관리하지 않았다. 잡초가 너무 많이 자라자 시의 묘지 관리 담당자는 알브레히트 형제에게 경고장을 보내야 했다. 그 뒤에야 알디의 트럭이 나타나 주목과 철쭉, 그리고 측백나무를 내려놓았다. 이 일가는 자기네 매장에서 묘목을 특가 판매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알브레히트 일가의 방식이자 알디의 방식이다. 겉 치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다른 독일 대기업 소유주들이 웅장한 묘를 꾸며놓은 에센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공원 묘지에서 이 두 명의 ‘최저가’ 형제들은 그들의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까지도 평생 지켜온 원칙을 따랐다. 카를은 묘역 남쪽에 자신의 묘지를 골랐고, 테오는 이제 북쪽에 안장됐다.
   
테오 알브레히트

7월 마지막 주 수요일 아침, 이곳에서 독일 전후 시대 경제역사상 가장 특이하고 폐쇄적이고 비밀에 휩싸인 두 형제가 함께 이뤄온 역사의 막이 내렸다.
테오는 1971년에 일어난 납치 사건 이후로 황무지 개척자처럼 완전히 자신을 고립시키며 살았다. 대중에게 사진이 공개되지도 않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인터뷰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몇 년 뒤 납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물질적 손해에 대해 세금 공제를 신청했다. 물론 독일 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형 카를과 함께 공동으로 미국 시애틀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이르는 9400개 매장을 가진 거대 기업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수요일 아침 그의 가족과 친지들이 간소한 장례식장으로 모일 때까지 그의 죽음은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행렬도 장례미사도 추도사도 없었다. 오직 테오와 카를의 가족, 자녀, 손자·손녀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을 모두 합해 약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와 영원한 작별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다.
이 가족이 원했던 것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것 단 하나였다. 그 때문에 묘지 출구 옆에 비에 젖지 않도록 가리개를 씌워서 세운 알림판 말고는 이곳에서 한 시대의 막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과 북으로 사업 영역을 나눈 두 형제

알디가 단순한 기업이 아니었던 것처럼 테오 알브레히트도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알디는 독일 그 자체다. 이 기업의 정돈됨, 효율성 찬양, 매장의 검소함 그리고 무엇보다 한결같은 절약 정신…. 독일이 곧 알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록펠러와 같은 화려한 기업 왕조나 케네디와 같은 사교계의 명가,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와 같은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온 출세한 사람을 낳았고, 러시아는 무절제한 집권층과 함께 살고 견뎌내야만 했지만, 독일연방공화국에는 검소한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두 사람이야말로 독일 경제 기적의 시대 마지막 기념물이자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독일이 분단된 것처럼 알브레히트 형제도 그들의 사업을 분리했다. 1961년 카를과 테오는 사업 구역을 독일이 정치적으로 동과 서로 나뉜 것처럼 남부 알디와 북부 알디로 나눴다. 테오의 북부 알디 매장의 상품들은 엄격할 정도로 검소하지만, 카를의 남부 알디 매장에서는 심지어 비텔로 톤나토(참치소스를 곁들인 쇠고기 수육)까지 팔고 있다. 적응력은 언제나 그들의 최고 강점 중 하나였다.
이렇게 독일이 시인과 사상의 나라일 뿐 아니라 대형 할인 체인점의 국가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슈퍼 싸구려 콘셉트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독일에서 “절약은 섹시하다!”(Geiz ist Geil!)를 외치는 광고가 유행하기 훨씬 전에 알브레히트 형제가 만든 것이다.
고객의 편의보다 중요한 것은 대량생산이었다. 1953년 카를은 “저렴한 가격이야말로 우리의 광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가 역사상 단 한 번 했던 공개 발언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화·세계화된 이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아우르는 계명이 되었다.
알디화(化)는 새로운 일자리와 생필품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알디에서 팔고 있는 노브랜드 상품에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획일성과 효율성, 그리고 익명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납품 업체에 대한 압박과 때때로 밝혀지곤 하는 제3세계 착취 스캔들, 노조에 대한 의혹, 그리고 모든 연령대 소비자에게 일괄적으로 나타나는 절대적 우위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알디 매장은 창업자 가문의 생활만큼이나 검소하다.


3유로짜리 티셔츠의 딜레마 
알디화된 사회에서는 항상 모든 것에 가격표를 붙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결국 저렴한 상품만이 좋은 상품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이 기업의 딜레마 뒤에는 3유로짜리 티셔츠를 사고 싶어하지만 그로 인해 방글라데시 어린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경악하는 현대 소비자의 딜레마도 숨어 있다.
우리는 알디와 같은 기업이 소비 평준화에 박차를 가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기도 한다. 알디와 스타벅스, 맥도널드 그리고 이케아의 매장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할인 슈퍼마켓 체인점인 리얼(Real)을 소유하고 있는 메트로(Metro) 그룹의 최고경영자 에크하르트 코르데스트가 말한 바와 같이, 극단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식품과 생필품을 공급함으로써 소비를 민주화하고 그를 통해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준 테오의 ‘사회적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다른 면을 보자면, 수많은 최저가 상품을 보면서 도대체 이 가격을 만들어내기 위해 누가 희생됐을지를 생각하면 가슴에 불안감과 죄책감이 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때 이 기업은 생존의 한계에 서 있는 독일의 전후 세대에게 생의 기쁨 한 조각을 나눠줬다. 알디 샴페인이 트렌드가 되고 모든 공동 부엌에 알디 요리책이 놓이고, 독일의 유명 토크쇼 진행자인 귄터 야우흐가 원조 할인 판매점에 대한 애정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전에 수많은 이주노동자 세대가 상품이 상자째 쌓여 있는 알디 매장에서 생필품을 사들였다. 이성적인 구매자들의 나라인 독일은 그에 걸맞은 싸고 편리하고 겉치레가 없는 생필품 판매점을 얻었다.
1990년대에 알디의 변화가 시작됐다.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알디에서 판매되는 품목이 확실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사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굵은 콩 대신 갑자기 훈제연어가 나타났고, 맑은 슈납스(독일 소주) 대신 알디에서 파는 이탈리아 와인 몬테풀치아노가 유행했다. 심지어 비교적 수입이 괜찮은 중산층 직장인들마저 알디에서 판매하는 컴퓨터를 사는 자신이 매우 현명하다고 느끼게 됐다.
얼마 전 시사주간지 <디 벨트>(Die Welt)는 과거 쇼핑봉투에 찍힌 푸른색의 알디 로고 A가 ‘부정적 인상의 상징’이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 시기조차 알디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렇게 알디는 유력한 경쟁자로 자라난 리들(Lidl)이나 네토(Netto)와 같은 아류 할인매장들의 원형이 됐고, 이제는 슈퍼마켓뿐만 아니라 다른 업계에도 대형 할인판매점이 있다.
이렇게 독일인의 일상에서 알디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창립자인 알브레히트 형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끈질기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밀에 부쳤다. 기업에 대한 문의는 팩스로만 받으면서 그 문의에 대한 답변을 듣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 이유는 1971년 테오가 납치됐던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어떤 기업이나 기업가도 알디처럼 까다롭게 폐쇄성을 내세우는 곳은 없다. 묵직한 철제 대문이 닫혀 있는 에센크라이에 위치한 본사는 마치 보안회사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긴다. 저녁 8시에는 모든 창구에서 적재가 시작되는데 이것도 원격조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에센에 개장된 알브레히트 형제의 첫 번째 매장.


낡은 금고에서 시작된 거부의 꿈

알디의 세계에서 소통은 실수가 아니면 기껏해야 시간 낭비로 여겨졌고, 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배신자로 취급되었다. 수요일 테오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루르 지방의 언론은 여전히 엠바고(보도유예)가 걸려 있었고 누구도 이를 깨려 하지 않았다.
이 회사와 그 소유주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익명이길 원했다. 예외는 단 한 사람, 고인의 조카이자 또 다른 창립자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카를 알브레히트 2세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지배자의 아들이 <슈피겔>에 사상 최초로 그들의 제국 내부를 약간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에센숀네베크는 곳곳이 허물어진 전형적인 노동자 거주구다. 이곳에서 1954년 이미 거대한 부가 형성됐다는 것은 창고와 이어진 낡은 벽돌 건물의 지하실에 있는 금고로만 알 수 있다. 잊혀진 듯 숨겨진 가로 4m×세로 5m 규격의 거대한 금고를 만든 사람은 바로 알브레히트 형제다. 이 금고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4개 자물쇠로 잠겨진 금고의 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이곳이 알디의 첫 번째 본사였다. 이곳에 테오와 카를은 루르 지방 전체에 퍼진 매장의 매출액을 모아뒀다.
당시에도 이미 ‘은행과의 거래는 금기’라는 기업의 격언이 적용되고 있었다. 은행 대출, 달리 말해 빚은 이 거대한 알디 제국 안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요소였다.
이곳에서 100m도 떨어지지 않은 후에 거리(Hue Straße) 89번지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 건물 2층에 형제의 부모가 살았다. 1층에는 100㎡도 안 되는 작은 식료품 상점이 있었다. 1886년에 태어난 형제의 부친 카를 알브레히트는 본래 광부였지만 진폐증으로 직업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에서 카를 2세는 처음으로 이 전설의 일부를 수정했다. “할아버지 카를 알브레히트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광부가 아니라 제과제빵사였습니다. 이분은 1913년 제과점을 운영하기 위해 빵 만드는 일을 그만두셨습니다. 할아버지가 1914년에 징병되자 안나 할머니께서 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안나 알브레히트는 전형적인 독일식 소형 잡화상의 여주인이었다. 그녀는 스타우텐베르크의 빵공장에서 빵을 받아다 팔았다. 이 업체는 오늘날에도 알디에 빵을 납품하고 있다. 와인은 와인통에서 병에 따라 팔았고, 설탕과 밀가루는 자루에 들어 있었다. 후대에 회자되는 ‘알디 원칙’은 당시에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들 형제가 상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그들이 전쟁에서 귀환한 뒤 194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형제는 어머니의 가게를 넘겨받아 이전까지의 판매 방식을 개선했다. 그들에게 몇몇 이웃 단골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알브레히트 형제의 가족모임 모습.

황금알을 낳은 아이디어

다른 가게보다 더 싼 가격에 판매한다는 원칙은 그때에도 완벽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경쟁 상점들은 서로 협력 구조를 갖췄고, 할인쿠폰 방식이 정착돼 있었다. 고객은 할인쿠폰을 모아 연말에 사용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 형제는 그들과는 반대로 항상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려 했다. 나중에 그들은 후대에 전세계 판매업을 지배하는 데 쓰일 아이디어도 생각해냈다. 그들은 고객이 필요한 상품을 직접 집어올 수 있도록 했고, 그를 통해 상점을 장식하는 데 드는 돈을 절약했다. 그들의 상점은 곧 창고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상점의 인테리어와 장비, 직원…, 그들은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절약했다. 때로는 상점 주인인 형제가 직접 배달에 나서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상품 품목을 줄였다. 다른 상점들이 다양한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을 내세울 때 알브레히트 형제는 화재 등으로 가벼운 손상을 입은 물품 중 쓸만한 물건을 떼어다가 아주 싸게 팔았다.
처음에는 자금이 부족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이를 통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형제가 어머니의 잡화상 ‘카를 알브레히트 식료품’을 넘겨받은 뒤 5년 만에 독일 루르 지역에는 31개 매장이 생겼다. 연간 매출액이 600만마르크에 이르렀고, 7년 뒤인 1960년에는 알프레히트의 이름을 걸고 있는 매장이 300여 개로 늘어나 매출액은 1억여마르크가 됐다.
그로부터 1년 뒤 알브레히트 형제는 이 할인매장 체인의 이름을 더 간단한 ‘알디’(Aldi)로 고치고 아무런 다툼 없이 전체 독일을 나눠가졌다. 다른 독일인 기업가 형제인 다슬러 형제가 싸움 끝에 결국 몇십 년간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두 개의 거대 기업 아디다스와 퓨마를 만들어낸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분리의 이유는 매장에서 담배를 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두 형제가 서로 의견일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뒤 니더라인에서 시작해 뮬하임을 거쳐 동쪽으로는 마부르크·지겐·기센까지, 북쪽으로는 풀다까지 연결되는 일명 ‘알디-적도선’이 그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싸우지 않기 위해 서로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독일이 통일된 뒤 테오는 구동독 지역과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카를은 남유럽으로 진출했다.“나눠라, 그리고 지배해라.”(Divide et impera.) 이렇게 그들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연합된 시장지배력을 가지게 되었다
카를과 테오 알브레히트가 1920년과 1922년에 에센에서 태어났을 때, 이곳은 광산업과 철광업으로 먹고사는 회색빛 공업도시였다. 알브레히트 일가는 두 업계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의 성공 원인은 매우 독실했던 가톨릭식 가정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전간기에 겪어야 했던 결핍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호화나 사치는 이 형제에게 언제나 낯설고 먼 것이었다. 에센시의 노동자 지역 숀네베크에 있는 초급 학교를 졸업한 뒤 카를은 브래드니 지구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급 식품 판매점인 ‘바일러’(Weiler)에서 견습 점원으로 일했고, 테오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자기 집 가게에서 상인 수업을 받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둘은 사업에 몰두했다. 기업이 계속 커나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쇼넨베크의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카를의 결혼과 아들 카를 2세의 탄생은 이웃들이 참여하는 동네 행사였다. 형제는 1955년과 1957년에 에센시의 더 살기 좋은 구역에 저택을 세워 그 집에서 가족과 50년 이상 살았다. 좁은 복도에서 단단한 강철로 된 현관문까지는 5∼6m밖에 되지 않았고, 짧게 자른 잔디밭은 녹색으로 가꿔져 있었다.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키 작은 철쭉나무들 말고는 하얀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된 창문을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 옆에는 분필로 적힌 슈테른징거(Sternsinger)1)들의 축복 표시가 보이고 문틀에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만들어진 동방 삼왕이 인쇄된 바틱 염색천이 붙어 있었다.
 
   
카를 알브레히트의 생일파티 모습

검소함이 몸에 밴 형제들
이곳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카를의 집이 있다. 그의 땅은 산업용 울타리 뒤로 넓게, 그리고 위쪽으로 경사를 이루면서 펼쳐져 있다. 우거진 나무와 높은 테라스 벽이 집까지의 실제 거리를 짐작만 할 수 있게 해준다. 비바람에 약간 낡고 높은 기둥에는 움직임 감시 장치와 스포트라이트가 설치됐다. 몇 주 전 <슈피겔>이 찾아가 알브레히트라는 명패 옆 초인종을 눌렀을 때 한 노인이 대답했다. 그는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당신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나 애를 쓰는군요. 그렇지만 노력에 보답해드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좋은 저녁을 보내라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카를은 아직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그의 아내는 사용인들이 돌보고 있다. 딱 한 번 1970년대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약간 들여 도나우슁겐에 있는 골프호텔 외쉬베르크호프에 투자했다. 여기에 비하자면 푀르섬에 있는 테오 소유의 작은 해변 오두막은 매우 소박해 보인다. 테오 역시 골프를 좋아하지만 말이다.
테오 알브레히트는 거부가 된 뒤에도 사생활에서나 기업 경영에서 특이한 비용 절감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그의 운송부서에서는 화물차 타이어가 닳으면 그 타이어를 좀더 오래 쓸 수 있게 타이어 프로필에 따라 홈을 더 파내야 했고, 연료 소비를 줄이기 위해 그는 화물차 정면에 노즈콘(nose cone)을 달도록 했다. 매장에 전화를 놓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고, 상업협회의 회원증 따위는 없었고, 회의에서 열리는 경영진의 강의도 금지됐다.
지난 2월에 있었던 카를 알브레히트의 90살 생일에 경영진들은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하려고 했다. 그의 골프장에 서커스단을 부르고 공연이 끝난 뒤 천막 안에서 정식 디너파티가 시작됐다. 카를의 감사 인사는 딱 세 문장으로 이뤄졌다. “이렇게 다 모일 필요는 없었는데요. 배가 고픕니다. 얼른 집에 가야겠어요.”
모든 것이 비즈니스이고, 비즈니스가 모든 것이다. 테오의 이웃이자 대형 출판사 WAZ의 사장인 귄터 그로트캄프가 몇 년 전 가든파티를 열었을 때, 테오는 자기가 음료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알디에서 파는 값싼 샴페인이 나오자 손님들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그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알브레히트 형제는 누가 지켜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검소했다. 이런 절약 정신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테오의 아들 베르톨트가 얼마 전 부모 집 근처에 집을 한 채 산 뒤, 개조를 맡긴 곳은 유명한 건축가나 회사가 아닌 직원들이 전혀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폴란드 회사였다.
   
 

낡은 타이어의 홈을 더 파냈던 이유
하지만 이 일가는 그들이 가진 돈으로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크고 작은 분야를 지원하고 있다. 고향 상트마르쿠스 구역에 살고 있는 한 병든 여성은 매달 1천마르크를 지원받았다. 이 사실은 그녀가 죽은 뒤에야 밝혀졌다. 브레드네이 지역에 있는 괴테학교의 새로운 건물은 거의 알브레히트 일가의 지원으로 지어졌다. 그 외에 카를은 암 연구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아들 카를 2세는 그가 지금 기획하고 있는 연대기에 기록할 생각이다. “아버지의 전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중 대부분 기간은 회사의 연대기에도 포함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일족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율이 있다. 돈을 받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절약 정신이 뼛속까지 스며 있는 두 노인에게서 돈을 받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한다.
상품에 대한 열정, 끝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강한 의지, 그리고 절대적인 절약 정신, 이것이야말로 숀네베크의 잡화상 형제를 성공하게 만든 비결이다. 회사의 고위 간부들은 두 노인 중 한 명이 방문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서랍을 뒤져 몽당연필을 찾아내 책상 위에 올려놓곤 했다. 사무용품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알디 매장에서 상품은 거의 장식이 없는 황갈색 타일이 깔린 바닥 위에 고정된 밋밋한 철제 진열대 위에 놓여 있거나 포장이 풀리지 않은 채로 바닥에 쌓여 있다. 한 치의 땅도 쓸모없이 남아 있는 곳은 없고, 통로는 좁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정도의 넓이다.
“알디는 힘든 노동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경영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북부 알디의 최고 경영진에 속했던 사람의 말이다. 독일의 슈퍼마켓은 1980년대 초반부터 스캐너 계산기를 사용했지만, 알디는 몇 년이나 더 계속 전통적인 가격표를 고집했다. 계산원들은 모든 상품의 세 자릿수 코드를 완벽하게 외워야만 했고 그에 대해 보너스가 주어졌다.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남부 알디가 이 시스템과 작별했고 3년 뒤 북부 알디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두 기업 모두 스캐너 계산기를 도입하기 전에 제품의 포장을 최적화했다. 알디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95%를 차지하는 자체 상표 상품들의 바코드는 여러 면에 인쇄됐다. 그래서 상품을 돌리거나 뒤집을 필요가 없고 계산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경쟁 상점들도 이를 곧 따라하게 됐다.
   
 

이런 높은 수준의 완벽함이 오늘날까지 전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알디는 납품업체들에도 똑같이 높은 수준의 작업을 하도록 요구했다.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5월 말 알디는 오랫동안 알디에 티슈, 화장지, 키친타월을 납품해온 업체와의 거래를 임시로 중단했다. 이탈리아 제조업체 트론체티(Tronchetti)가 알디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품의 균일성에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거나 제품이 낮은 품질 평가를 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납품업자의 문 앞에 알디의 직원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납품업자 사이에서 알디의 사업 방식에 대한 비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알디와의 공동 작업은 힘들지만 일 처리가 공정하고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함부르크 주변 지역의 사과 재배업자에서부터 바이에른의 낙농업자, 그리고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양계업자를 막론하고 모든 납품업자를 끌어들이는 단 한 가지 비결이다. “모든 대형 납품업자들은 알디에 납품하고 싶어합니다”라고 에핑엔에 살고 있는 양계업자 게오르크 하이틀링거는 말했다.
전략적인 결정은 두 기업 모두 행정이사회라는 곳에서 내려진다. 상품 매입도 두 개의 매입회사를 통해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지역회사는 독립된 회사다. 이 지역회사들이 딱 기업 공개 의무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는 소문이 반복해서 기사화된다.
하지만 이 역시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에서 없앨 수 없는 알디에 대한 전설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모든 지역회사는 2000년 이후 그들의 재무재표를 ‘연방고시’에 공개했다. 지역회사들은 모두 독립적 회사로 기능하고 그들의 매출액은 공개 의무 한계인 연간 3200만유로를 한참 넘어선다. 다만 반대로 공식적인 전체 기업 재무재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출되는 수익도 직접 창업주들의 호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르쿠스재단(북부 알디)과 시프만재단(남부 알디)에 보내진다. 이 재단의 목적은 공식적으로 ‘알브레히트 일가의 공통 관심사를 지키고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전세계 20여 개 나라에 진출한 알디

이런 복잡한 구조를 통해 형제는 경쟁자들이 알디의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매각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있다. 특히 기업의 실제적인 운영은 이미 오래전 창업자들의 손을 떠난 상태이기도 하다.
지난 경제위기 이후 알디는 미국에 확실히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미국뿐 아니라 이 할인매장 제국은 그사이 전세계 20여 개국에 진출해 있다. 이 형제는 세계시장도 나누었다. 미국과 스위스, 오스트리아는 카를의 제국에 속하고 프랑스·스페인·폴란드는 테오의 영역이다. 미국에서는 트레이더 조(Trader Joe’s)라는 유통업체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기업이 세계 어디에서나 독일에서와 같이 가장 신용할 수 있는 생필품 판매업체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할인매장 시장점유율은 8.6%고 이탈리아에서는 6.5%, 영국에서는 3.3%에 불과하다. 독일의 알디가 진출해 있는 나라에는 대부분 경쟁업체인 리들도 진출해 알디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어떤 나라도 독일만큼 생필품이 저렴하지는 않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독일인보다 식품에 드는 돈을 더 아끼는 고객은 없다. 다진 고기 1파운드에 179유로, 신선한 호밀빵 한 덩이에 1유로 이하의 가격, 요구르트 한 컵에 19센트.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가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알디는 이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가격정책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에 대해 ‘싸다’라는 조건에 얽매여야만 한다는 것이 제조업자와 농민과 사회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심해본 적도 없다. 저렴한 가격의 이면은 낙농업자가 간신히 살아남을 정도의 수익만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과, 식료품을 제외한 다른 제품은 대부분 낮은 가격에 맞추기 위해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생산되고 있는 아시아의 제품을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플래닛 리테일의 통상정보 전문가 마티아스 퀘크는 “지금까지 알디 경영자들은 비즈니스 상대를 속임으로써 자신감을 얻는 부류가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 알디 내부에서 자란 인물들로 외부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거의 유입되지 않았다. 몇십 년에 걸쳐 지켜온 신념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는 알디를 떠나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기업 내부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알디 매장의 여직원들은 오랫동안 판매업계의 ‘콜걸’로 여겨졌다. 언제나 필요하면 전화를 받는 즉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알디 내부에서는 이 시스템을 작업 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가변적 노동시간의 단축형인 카포바즈(Kapovaz)라고 부른다.
노동조합은 이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추가 노동시간이 너무 많고, 만성적인 매장 직원 부족 또한 큰 문제다. 평균적으로 한 매장에는 직원 3명이 일하고, 이들은 계산과 상품 정리, 청소까지 다 해야 한다. 그래서 공식적인 노동시간 외에도 일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알디는 이에 대해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을 변호해왔다. 최고경영진에 속하는 한 북부 알디의 고위 관리직은 “임금이 계산되지 않는 노동시간이 다소 있더라도 평균보다 높은 기본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 노동시간에도 임금이 지급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자의 난’은 없을 듯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르다. 통합서비스업 노조 간부인 아그네스 슈라이어는 “알디를 포함한 많은 할인매장에서 직원들은 인간적인 노동조건을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남부 알디에서는 이런 투쟁이 가능하더라도 비공식적으로만 이뤄질 것이다. 뮬하임의 본사에서는 노동자협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알디 직원끼리 사내 연애를 시작하면 즉시 상사에게 알려야 한다. 피어싱은 허락되지 않고, 수염 역시 환영받지 못한다.
반항의 결과는 결국 해고다. 일반적인 보상금보다 많게는 3배의 보상금으로 회사는 평화를 사고 길고 지루한 소송은 피한다. 대신 해당 직원은 양심적인 침묵의 의무를 약속하는 서명을 한다. 지금까지는 이런 식으로 해왔다. 하지만 앞으로 두 개로 나뉜 이 제국은 어떻게 다스려질 것인가?
동생 테오의 죽음은 긴 세월 동안 동반자였던 형 카를에게 많은 충격을 줬을 테지만 회사와 고용된 최고경영자들에게는 그런 영항은 없었다. 창업자의 죽음에 관해 신문에 낸 애도문은 냉철하면서도 결의에 가득 찬 선언문 같았다. “지난 몇 년간 기업은 능력 있는 알디 경영진이 이끌어왔습니다. 이들은 테오 알브레히트와 그의 가족에게서 독립적으로 모든 기업 경영에 관한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기업의 자산은 재단 소유로 매각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장기적인 기업적·자산적 지속성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가족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더 이상 알디의 실제 운영에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것이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테오의 아내 체칠리에만이 아들들과 함께 재단 이사회에 속하게 될 뿐이다. 왕조의 후계 싸움이라든가 기업의 몰락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을 듯하다. 시장 연구자 퀘크는 “알디는 할인매장으로서의 원칙을 포기하느니, 원칙을 지키면서 위엄 있게 몰락해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위대한 기업 수호자는 죽었다. 하지만 그의 유지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테오 알브레히트는 지난 5월 한 전직 알디 경영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성공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임을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 Der Spiegel(distributed by NYT syndicate)
번역 황수경 위원
 
1) 독일 축일 중 하나인 1월6일, 동방의 삼왕 축일에 어린이들이 아기 예수를 보러 온 동방에서 왔다는 세 명의 왕과 천사들로 꾸미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르고 축복을 하고는 성금과 과자를 얻어오는 풍습. 반드시 성인 자원봉사자 1명이 따라다니면서 어린이들을 돌본다. 과자는 아이들이 나눠가지고 성금은 자선 목적을 위해 기부한다.

[알림]:한겨레 경제매거진 <이코노미 인사이트> 온라인 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제1~2호(5, 6월호)의 전체 기사, 제3호(7월호)부터 최신호까지의 일부 기사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www.economyinsight.co.kr"

정기구독자는 과거 기사 전체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온라인 회원은 과거 기사 일부와 2016년 6월 이후 온라인 기사 전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주자네 아만 외의 다른기사 보기  
ⓒ Economy Insight(http://www.economyinsigh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 기사의견(2)  
 
   * 3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600byte)
   * 욕설이나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운영원칙]
매체소개 구독신청 구독문의기사문의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 이메일무단수집거부찾아오시는 길
한겨레신문(주) | 제호 : 이코노미 인사이트 | 등록번호 : 서울 아 01706 | 등록일자 : 2011년 07월 19일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고경태
발행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 한겨레 고객센터 1566-9595 | 청소년보호 책임자 : 윤종훈
Copyright 2010 Hankyore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