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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통신장비 하나로 글로벌 정상 우뚝 서다
중국의 삼성, 화웨이- ① 성공 비결은?
[60호] 2015년 04월 01일 (수) 친민 등 economyinsight@hani.co.kr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가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다. 화웨이는 1987년 직원 5명의 전화교환기 제조업체로 출발했다. 지금은 170여 국가에 통신 인프라를 공급하는 매출 460억달러(약 51조7천억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통신장비 분야에서 알카텔과 노키아를 넘어 이제 세계 1위 에릭손마저 넘어설 기세다. 정치적 이유로 막혀 있는 미국 시장 진출에만 성공한다면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화웨이가 이렇게 급성장한 것은 불과 몇년 사이의 일이다. 중국이란 배경에 기대지 않고 철저하게 국제 기준을 따른 것이 성공의 열쇠였다. 기업과 나라를 가리지 않고 좋은 제도나 시스템이 있으면 누구의 것이든 열린 태도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유럽 진출에 성공한 것이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최근 경기침체 상황에서도 매년 20% 안팎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화웨이의 창업주이자 정신적 지주인 런정페이 회장은 중국에선 드물게 민간 기업을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그래서 ‘중국의 이건희’로 불린다. 화웨이의 성공 비결과 런정페이가 걸어온 길을 파헤쳐본다. _편집자

   
▲ 화웨이는 170개국에 진출해 연매출 460억달러(약 51조7천억원)의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4년 10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 정보기술(IT) 박람회의 화웨이 전시관. 신화 뉴시스

한우물 전략과 적극적 해외 진출로 170개국서 460억달러 매출…
미국 진출 성패가 관건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가 글로벌 최강자로 발돋움하고 있다. 불과 몇년 만에 세계 최대 통신장비 및 솔루션 전문 업체로 자리잡았다. 화웨이의 성공 비결은 간단했다.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려 유럽 시장을 적극 공략한 것이다. 또한 통신장비 한우물만 팠다. 그 결과 덩치 큰 유럽의 경쟁사들을 따돌리고 통신장비 업계의 최강자를 넘보게 됐다.


친민 譚敏 왕리웨이 王力爲 후원옌 胡文燕 <신세기주간> 기자

올해 나이 70살의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 총재가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등장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무대에 오른 그는 진솔하게 자신은 물론 자신이 이끄는 화웨이를 세상에 소개했다. 런정페이 총재에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는 세계 통신업계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기업인이다. 그랬던 그가 2015년 1월22일 검은색 정장에 파란색 스트라이프 넥타이 차림으로 스위스의 작은 도시 다보스에 나타났다. 과거에도 포럼에 참석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청중석에 앉아 있지 않고 무대로 올라와 영국 의 대만 출신 앵커 린다 유웨와 마주 앉았다. 무대 아래에는 세계 각국의 언론인, 기업인, 투자자들이 있었다. 그는 세상의 호기심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창업 스토리와 가족사부터 시작해 화웨이의 실적, 네트워크 보안과 도청 가능성 등 다소 민감한 질문까지 쏟아졌다. 런정페이 총재는 구이저우 억양이 강한 중국어로 말했다. 그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런정페이 총재는 “내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 않다”며 “기술을 모르고 재무도 모르고 경영도 모르기 때문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포럼이 끝난 뒤 다시 10여명의 중국 언론사 기자와 만났고, 화웨이가 당면한 리스크와 기회 등 더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런정페이 총재가 직접 기자들과 만난 것은 이번이 다섯번째다. 2013년 5월 런정페이 총재는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처음 기자들과 만났다. 뉴질랜드 현지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화웨이의 상장, 최고경영자(CEO) 순환제도, 미국 시장 진출 등 다양한 질문에 대답했다. 그 뒤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중국 선전에서 기자들과 만났고 특유의 솔직한 태도로 세계, 특히 유럽을 향해 투명하고 개방적인 화웨이의 모습을 알렸다.

통신장비 업계 최정상에 다가선 화웨이

화웨이는 170개국에 진출해 연매출 460억달러(약 51조7천억원)의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으로 성장했다. 업계의 ‘추격자’에서 이제는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리더’로 변모했다. 상황이 변했지만 런정페이 총재는 여전히 화웨이와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2010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도 화웨이에 대한 억측이 무성했다. 런정페이 총재의 딸을 후계자로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다만 “있지도 않은 일을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화웨이가 변했듯이 런정페이 총재도 달라졌다. 기업의 성장과 조직을 위해 화웨이의 상징적 존재인 그가 무대로 나와 개방적이고 투명한 서구식 방법으로 화웨이를 설명했다. 화웨이의 글로벌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외교적 수사법을 구사할 줄 모르는 그는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를 털어놨다. 어쨌든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고 ‘화웨이는 신비주의’라는 꼬리표를 떼어냈다.

화웨이는 세계 170개국에 통신장비를 판매한다. 하지만 런정페이 총재는 ‘국제화’란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화웨이를 ‘글로벌 기업’으로 평가해주기 바란다. “다국적기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글로벌화를 추구한다. 세계경제가 통합돼야 자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보스에서 런정페이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2010년부터 화웨이는 내부적으로 ‘국제화’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런정페이 총재는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글로벌’한 사고방식을 가진 최초의 기업인일 것이다. 국제화는 중국이 중심이고 중국인이 해외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글로벌화는 세계 각지의 우수한 자원을 활용해 세계시장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런정페이의 지원 속에 화웨이는 러시아에 알고리즘연구소를 설립했다. 러시아인의 수학적 능력에 기반한 알고리즘연구소는 모바일 네트워크 특유의 기술적 한계를 해결했다. 화웨이는 기술적 성과를 세계 각국에 팔려나간 제품에 응용했다. 런정페이 총재는 통신사들이 기술의 세대교체를 겪으면서 다수의 플랫폼과 주파수대역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전했다.

화웨이는 모바일 네트워크의 알고리즘 문제를 해결해 2G, 3G, 4G 제품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방식은 주파수대역이나 안테나를 추가할 필요가 없어 비용을 20~30%까지 절감할 수 있었다. 장비 무게도 절반 이하로 가벼워져 유럽 지역 통신사들은 기지국을 건물 옥상에 설치했고 설치 면적이 줄면서 장소 임차료 등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런정페이는 모든 공로를 ‘수학의 힘’에 돌렸다.

런정페이 총재는 여러 해 전부터 세계 각국의 현지 인력을 채용했다. 런 총재는 글로벌화가 비즈니스 생태환경 구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유럽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유럽 정부도 점차 우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4년 1월 말 화웨이는 유럽 지역에 연구센터 2곳을 설립했다. 연구센터 산하에는 14개 연구기관이 소속됐다. 연구센터는 재무·마케팅·서비스 등 6개 분야에 직원 7700명을 고용했다. 또한 독일 도이체텔레콤과 영국 보다폰(Vodafone), BMW 등 유명 기업과 협력을 추진했다. 2014년 화웨이는 유럽 지역에서 부품 구매와 엔지니어 서비스, 국제 물류 서비스 명목으로 34억달러를 지출했다. 지출 규모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이러한 글로벌적 사고방식은 기술 노선을 선택할 때도 드러났다. 3세대(3G) 이동통신 기술표준을 둘러싸고 WCDMA(코드분할다중접속)와 중국에서 추진한 TD-SCDMA(시분할-연동코드분할다중접속)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화웨이가 WCDMA를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런정페이 총재의 대답은 간단했다. “WCDMA는 국제적 표준이다. 이 표준을 선택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제품을 팔 수 있겠나? 제품을 팔 수 없었을 것이다.” 2004년부터 해외시장 개척을 선언한 화웨이가 문제 해결에 접근하는 출발점은 중국이 아니라 세계였다.

   
▲ 런정페이 화웨이 총재가 2015년 1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패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신화 뉴시스

유럽에서 글로벌 기업 성장 발판 마련

중국은 고속 성장을 거듭하는 거대한 시장이다. 그리고 화웨이의 해외시장 진출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렇지만 화웨이의 2014년 매출 460억달러 가운데 해외 매출 비중이 70%를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화웨이는 한때 올려다볼 수조차 없던 경쟁사들을 추월했다. 10여년 동안 통신업계 취재를 담당한 한 외신 기자는 “화웨이가 해외에서 성공한 것은 3개 통신사와 10억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한 중국 본토 시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국내 시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유럽의 경쟁사에 비해 국제 시장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있었다. 반면 화웨이의 경쟁사는 대부분 분열된 유럽 시장에 갇혀 있다. 28개 국가, 28개 시장으로 분리돼 큰 테두리 안에서 안정적으로 경제성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화웨이는 1987년 설립 뒤 10년 동안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1998년에 이르러서야 차이나모바일로부터 인정받았고, 다시 5~6년이 지난 뒤에야 핵심 네트워크에 접근했고 기지국 장비를 공급했다. 같은 해인 1998년 화웨이는 해외시장 진출을 결심했다. 해외 진출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당시 중국 통신사들이 구조조정 과정에 놓여 있었고 국내 통신장비 시장이 일시적으로 포화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른 중국 기업과 마찬가지로 중동·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의 개발도상국을 겨냥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화웨이는 위기감이 이끌고 가는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1940년대에 태어난 기업인들은 대부분 배를 곯은 경험이 있었다. 런정페이 총재는 부모님에 대한 글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시를 앞두고 매일 아침 어머니가 챙겨주신 작은 옥수수떡 덕분에 시험에 합격했다고 추억했다. 온 가족이 먹어야 할 옥수수가루를 아껴서 만든 떡이었다.

런정페이 총재와 비슷한 시대에 태어난 류촨즈 레노보 회장도 런정페이 총재의 글에 공감했다. 그는 배가 고파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글을 통해 “그때의 배고픔이란 사람 몸에 있는 지방을 남김없이 소모한 뒤 근육까지 소모하는 것과 같았다”고 썼다. 배고픈 유년시절을 보냈던 기업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위기의식이 강하다.

런정페이 총재는 화웨이를 설립한 뒤 26년 동안 여러 차례 위기를 경고했다. 해외시장 진출 추진 뒤 5년이 지난 2004년 런정페이 총재는 1만3천자 분량의 장문의 연설을 통해 화웨이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고 ‘혹한’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통신장비 사업에만 초점을 맞췄다. 런정페이 총재는 글로벌 비즈니스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통신장비 사업에 집중하고 다른 사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런정페이 총재는 화웨이가 성장할 수 있는 요인에 집중했다. 그는 “화웨이는 사업 다각화가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로지 통신 분야에 집중해 앞서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수박을 여덟조각으로 잘라 한조각만 가지면 된다. 나는 일본 기업에 화웨이는 절대 물리 분야를 연구하지 않고 수학적 로직만 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랬더니 일본 기업이 안심했다. 나는 그들이 지닌 소재 기술을 유출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MS)엔 검색 기능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국제적 분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1987년 전화교환기 제조업체로 출발한 화웨이는 이제 세계 최대 통신장비 기업인 에릭손과 어깨를 겨룬다. 화웨이 연구원이 중국 선전의 화웨이 본사 연구·개발 센터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신화 뉴시스

그 뒤 화웨이는 인도·타이·이라크 등 개발도상국에서 유럽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에서 시작해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에 진입했고, 비주류 통신사의 주변 업무에서 시작해 주류 통신사를 공략했다. 2004년 12월 네덜란드 통신사 텔포트(Telfort)와 전국 범위의 WCDMA 통신망 구축 계약을 체결했다.

유럽의 주류 시장에 진출하자 화웨이 내부에서도 여러 변화가 생겨났다. 개도국에서는 가격 경쟁이 주효했지만 서유럽 지역에 진출한 뒤에는 고객사의 요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런정페이 총재의 표현을 빌리면, 유럽 사람들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질에 주목했다. 영국 통신업체 브리티시텔레콤(BT)의 인증을 통과하자 유럽 시장의 문이 열렸다.

2003년 BT는 전세계 통신장비 업체를 대상으로 네트워크 설비 공급사를 선정했고, 화웨이는 인증 심사를 신청했다. 제품이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인증이었다. 제품 품질, 재무, 인적자원, 환경, 관리 등 12개 분야를 평가했고 인권 조사도 포함됐다. BT는 인증 심사를 위해 화웨이의 생산라인과 직원 기숙사를 방문했고 직원들의 추가 근무시간과 처우는 물론 협력사 상황도 조사했다. 이때 한 협력사의 급여가 선전시 노동자의 평균급여보다 낮은 것이 밝혀졌다. BT는 화웨이가 이 협력사와 계약을 해지하지 않으면 인증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인증의 유효기간은 2년이었다. BT의 엄격한 인증을 통과하자 유럽 시장은 닫힌 빗장을 열었다. 화웨이는 오스트레일리아 텔스트라(Telstra), 스페인 텔레포니카(Telefonica), 영국 보다폰의 인증도 통과했다.

2010년부터 유럽은 화웨이에 기여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화웨이는 새로운 글로벌화 단계에 진입했다. 2010년 화웨이의 매출 1852억위안 가운데 해외 매출은 1204억위안으로 전체 매출의 65%를 차지했다. 해외 매출에서 유럽 시장의 비중은 30% 수준이었다. 유럽은 가장 크고 앞선 통신장비 시장이었다. 유럽이란 최고봉에 오르면 평범한 보통 산에 오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런정페이 총재는 “이제 유럽 시장은 화웨이의 가장 큰 곳간이고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런정페이 총재는 인력자원이 풍부한 유럽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면 화웨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각국 정부와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국가안보 이유로 화웨이 진출 봉쇄한 미국

정부의 간섭이 심하지 않은 것도 화웨이를 매료시킨 장점이었다. 2010년 유럽연합(EU)이 반덤핑 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화웨이는 현지 정부를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반덤핑 조사가 시작된 다음부터 현지 정부를 찾아가 소통했고, EU는 화웨이에 대한 반덤핑 조사를 철회했다. 런정페이 총재는 “유럽에서 화웨이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장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화웨이는 실패를 경험했다. 화웨이는 곧바로 다른 지역에 집중했고 미국에 매달리지 않았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대형 통신사의 승인을 받았고 2010년부터 AT&T와 스프린트(Sprint) 등 통신사들의 납품 건을 수주했지만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계약이 취소됐다.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던 화웨이는 태도를 바꿔 정면으로 공격했다. 2011년 2월 회사 홈페이지에 공개 서한을 게시하고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대한 모든 의혹을 공식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2012년 10월 미 하원 정보위원회는 ‘화웨이 제품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고 미국 통신사가 화웨이 장비를 구매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화웨이가 미국에서 진행하던 기업 인수·합병(M&A)은 모두 무산됐다.

미국에서의 좌절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 시장의 문이 닫히자 유럽 시장이 더욱 중요해졌고 보안의 중요성을 의식한 화웨이는 더욱 개방적이고 투명한 기업으로 변모했다. 대중과 언론 앞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린 런정페이 총재까지 공개 석상에 나와 화웨이를 홍보했다. 그는 여전히 미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국 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우리 화웨이에 잘못했다거나 불공정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런정페이 총재는 다보스포럼에서 네트워크 보안에 관한 주변의 우려에 대해 해명했다. 그는 통신망을 수도관에 비유했다. “화웨이는 수도관을 제공할 뿐 수도관 속에 흐르는 물은 통신사가 보내주는 것이다. 화웨이는 수도관의 철판을 만들 뿐인데 철판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2014년 말 현재 세계 50대 통신사 가운데 77%가 화웨이와 협력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런정페이 총재는 일찍부터 캐나다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캐나다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현지 대학과 협력해 공동 실험실을 설립했으며 통신사의 이동통신망 사업 입찰에도 참여했다.

글로벌화에 따른 리스크는 컸다. 화웨이는 수단과 리비아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곳에도 진출했다. 또한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뒤 철수하지 않고 남은 기업 가운데 화웨이도 포함됐다. “나라가 갑자기 두개로 나눠지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져 대금을 현금으로 받을 경우 큰 손실이 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돈을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나? 결국 우리는 현지 화폐로 대금을 받아 물품을 구매한 뒤 이를 중국으로 들여와 위안화로 바꿨다.” 런정페이 총재는 국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아프리카 수단이 분리독립한 뒤 나뉜 두 나라에서 대금을 나눠 받았고 그 돈으로 참깨를 구입해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러분이 지난 중추절에 먹었던 월병에 들어간 참깨의 3분의 1은 화웨이가 공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화웨이는 이러한 서비스 정신 덕분에 고객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런정페이 총재는 “리스크를 피할 수는 없다. 해외시장을 공략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新世紀週刊 2015년 6호 華爲的征服
번역 유인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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