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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특집] 공장 맥주에 질린 당신, 수제에 꽂히다
수제맥주 전성시대- ① 맥주시장의 변화 바람
[56호] 2014년 12월 01일 (월) 김연기 economyinsight@hani.co.kr
   
 
   
▲ 최근 수제맥주가 다양한 연령대에서 인기를 모으면서 새로운 술문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11월20일 서울의 한 수제맥주 전문점이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국내 맥주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OB맥주와 하이트진로가 사실상 독과점으로 나눠가진 시장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소규모 양조장이 자체 개발한 제조법에 따라 빚는 수제맥주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일률적인 맥주 맛에 대한 소비자의 변화욕구가 커지고 주세법 개정으로 수제맥주의 외부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수제맥주가 새로운 술문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_편집자

다양하고 차별화된 맛으로 인기몰이… 올해부터 외부 유통 가능해져 독과점 시장 균열 조짐

지금 대한민국은 수제맥주 전성시대다.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 등 수제맥주의 성지는 밤이면 주변 골목길이 수제맥주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수십년간 OB맥주와 하이트진로 두 기업의 맥주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은 이제 ‘맥주 다양성’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맥주를 원하고 있다. 수제맥주가 인기를 끌면서 대기업들도 수제맥주 스타일의 신제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김연기 부편집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제맥주 마시러 갈래”라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엉뚱했다. “수제, 뭐? 그런 맥주가 있었나?” 그나마 수제맥주를 좀 안다는 이들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한국에서도 수제맥주를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 있나? 우리 맥주 맛없잖아. 수제라고 뭐 특별한 맛이 있겠어?” 이런 대접을 받던 수제맥주가 지금은 세대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술문화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수제맥주는 대기업의 대량생산 맥주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이다. 최근 들어 20~30대는 물론 40~50대에게도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황윤정 신한금융투자 식품산업 분야 연구원은 “수제맥주의 인기는 대량생산·대량소비를 멀리하고, 로컬·웰빙·유기농을 추구하는 요즘의 소비 트렌드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수제맥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를 즐기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다. 수제맥주 마니아들의 대표적인 문화가 바로 ‘펍크롤링’(Pub Crawling)이다. 수제맥줏집인 ‘펍’과 순례한다는 의미의 ‘크롤링’을 합친 말이다. 여러 펍을 돌면서 맥주를 맛보는 행위를 뜻한다. 펍크롤링을 즐기는 이들에게 수제맥줏집이 모여 있는 지역은 이른바 ‘성지’(聖地)로 통한다.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과 부산 광안리 남천동 일대가 대표적인 수제맥주의 성지다. 밤이면 수제맥줏집과 주변 골목길이 수제맥주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40~50대로 번진 수제맥줏집 ‘성지순례’

펍크롤링은 몇해 전만 해도 20~30대 ‘맥덕’(맥주 마니아를 뜻하는 조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40~50대에서도 새로운 여가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덕철(41) 신한카드 홍보팀 차장은 펍크롤링 마니아다. 지난여름 처음 펍크롤링을 접한 뒤 그 매력에 빠져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 ‘순례’에 나선다. 신 차장은 “평일에는 일을 마치고 저녁 7시 정도부터 시작해 대략 3~4곳의 펍을 찾는다. 한곳에서 수제맥주 한두 종류를 마신 뒤 다른 펍으로 이동해 밤 10시 정도에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에는 부서 회식 때도 펍크롤링을 즐기는 경우가 잦다”며 “회식 다음날 업무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아 직원들 사이에서 펍크롤링이 새로운 회식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이태원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수제맥주 축제 ‘제2회 그레이트 코리언 비어 페스티벌’(10월24~25일)은 최근의 수제맥주 인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난 10월24일 오후 행사가 열린 전쟁기념관 뮤지엄카페 야외 테라스에 들어서자 100여가지 수제맥주가 뿜어내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야외 정원 군데군데 있는 수십년 된 등 굽은 소나무의 솔향이 맥주 향기와 묘하게 어울리며 수제맥주의 품격을 높였다.

올해의 캐치프레이즈는 ‘나만의 개성을 마셔라’다. 축제 현장에서는 수십가지의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수제맥주가 특유의 열정과 즐거움을 알코올에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다. 대기업의 맥주와 달리 여과를 거치지 않아 효모가 살아 있는 진짜 생맥주다.

한 펍에서 내놓은 수제맥주 ‘인디언페일에일’(IPA)을 음미하듯 천천히 마셨다. 진한 과일향과 수제맥주 특유의 묵직한 풍미가 더해지면서 기분 좋게 취기가 올랐다. 주변에서는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외국인 사내 몇몇이 늦가을 오후의 쌀쌀한 바람에도 웃옷을 벗어던진 채 즐거움과 열정을 나누고 있었다. 이틀간의 축제기간에 3천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2만잔 가까이 팔려나갔다. 방문객 수와 판매량 모두 1회 때보다 두배가량 늘었다.

행사를 기획한 미디어 파란 관계자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일본의 삿포로맥주축제와 같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맥주 페스티벌과 규모나 명성 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맥주 페스티벌이 다소 생소한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방문객 수와 판매량 모두 기록적인 수치”라고 말했다.

   
▲ 수제맥주는 대기업 맥주와 달리 여과를 거치지 않아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 국내 1호 수제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의 발효실(위). 최근에는 가정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홈브루잉’(Home Brewing) 교육기관도 주목받고 있다. 맥주 양조 교육기관 ‘수수보리아카데미’가 주최한 양조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맥주를 시음하고 있다(아래). 한겨레 정용일 기자

수제맥주는 대기업이 아닌 소규모 양조장이 자체 개발한 제조법에 따라 빚은(craft) 맥주를 뜻한다. ‘크래프트 비어’ ‘하우스 맥주’로도 불린다. 수제맥주를 만드는 이들을 대형 맥주 양조장을 뜻하는 ‘매크로 브루어리’(Macro Brewery)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마이크로 브루어리’(Micro Brewery)라고 부른다. 천편일률적인 맛의 대기업 맥주와 달리 독특한 레시피를 바탕으로 개성 있는 맛의 맥주를 추구한다. 수제맥주 개념은 미국에서 소규모 양조업자들의 창업이 활발하던 1960년대 후반에 처음 생겨났다. 소규모 양조업자들의 모임인 미국양조협회(ABA)는 수제맥주가 갖춰야 할 조건을 소규모(Small), 혁신(Innovation), 독립(Independent) 3가지로 구분했다. 국내 1호 수제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의 이원식 대표는 “수제맥주가 갖춰야 할 조건을 보면 대형 공장에서 최신 공법으로 값싸게 생산돼 대중적으로 널리 팔리는 맥주와 다르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소규모 맥주업체들이 맥주를 제조할 수 있게 된 것은 2002년부터다. 정부는 소비자가 다양한 맥주를 접할 수 있도록 주세법 시행령을 개정해 일정 규모를 갖추면 누구든 맥주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당시 전국적으로 130곳이 넘는 소규모 맥주업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맥주의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데다 제조장 외부 유통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2~3년이 지나지 않아 대부분 문을 닫았다.

효모 살아 있는 깊은 맛의 ‘에일’

하지만 지난 4월 법이 개정되면서 소규모 맥주업체에서 만든 맥주를 유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소규모 맥주업체의 양조업 허가 기준도 맥주를 만들어 보관하는 저장조 기준으로 5kℓ 이상 75kℓ 미만으로 완화됐다. 수제맥주가 국내에 첫선을 보인 이후 10년을 훌쩍 넘겨 이뤄진 일이다. 소규모 맥주업체들의 모임인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 차보윤 회장은 “한때 150곳에서 30곳까지 줄어든 소규모 맥주업체가 올해 4월 법 개정 이후 수제맥주 붐을 타고 현재는 50개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수제맥주의 인기 요인을 단순히 법 개정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40~50대 아저씨들까지 수제맥주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보다 천편일률적인 국산 맥주의 맛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 맥주시장은 OB맥주(카스)와 하이트진로(하이트) 두 대기업이 사실상 독과점을 형성해왔다. 이들이 내놓은 맥주는 모두 청량감이 높은 ‘라거 스타일’이다. 라거는 효모를 가라앉혀 2~10℃의 저온에서 발효시킨다. 탄산이 적당히 들어가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지만 묵직하면서도 향이 풍부한 맛은 없다.

반면 소규모 맥주업체는 라거 스타일의 맥주가 아닌 ‘에일 스타일’을 앞세워 맥주 맛의 다양화를 꾀했다. 에일은 효모를 띄워 실내 온도와 가까운 18~24℃에서 발효시킨다. 에일은 발효 과정에서 오렌지·배·딸기 같은 과일 향과 맛을 가미해 진한 풍미를 살린다. 대규모 자동화 공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맥아, 홉, 효모 등 원료를 다양화해 여러 종류의 맥주를 만들어낸다.

경기대학교와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설립한 맥주양조 교육기관 수수보리아카데미의 조효진 주임교수는 “국산 맥주는 맛이 싱거운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라거 일색이어서 선택의 폭이 좁은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수제맥주를 공급하는 소규모 맥주업체는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출시해 소비자가 각자 입맛에 맞는 제품을 골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국산 맥주는 라거 스타일 일변도여서 폭탄주에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고도 과점 체제에 안주해왔다.”

수제맥주는 스타일만 다양화한 게 아니다. 수제맥주가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유는 여과(필터링)를 하지 않아 효모가 살아 있는 진짜 생맥주이기 때문이다. 맥주 저장용 통인 케그 속에서 계속 발효가 진행되기 때문에 깊은 풍미를 즐길 수 있다. 부산 광안리에서 수제맥줏집을 운영하는 최수환(39)씨는 “유통기간이 6개월 이상인 일반 맥주나 수입 맥주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도록 필터링을 통해 맥주 속의 효모를 없애는 작업을 거친다”면서 “하지만 유통기간이 한달 남짓밖에 안 되는 수제맥주는 여과 작업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는 효모가 맥주의 풍미를 더욱 살려준다”고 말했다.

맥주시장의 지각변동은 지표로도 확인된다. 2013년 출고량 기준으로 맥주시장 규모는 약 4조1천억원이다. 이 가운데 OB맥주(53.6%)와 하이트맥주(42.8%)가 전체의 96.4%를 차지했다. 수입맥주가 3.3%, 수제맥주는 0.3%에 그쳤다. 그런데 2014년 상반기에는 수제맥주 비중이 0.8%로 급격히 커졌다. 1%를 넘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게 맥주업계 관계자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미국 전체 맥주 소비량(1억9600만배럴) 가운데 수제맥주의 비중이 7.8%에 이른다. ABA는 수제맥주의 미국 시장점유율이 2020년까지 20%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의 소규모 맥주업체는 2천곳이 넘는다. 맥주의 본고장 독일 역시 소규모 맥주업체가 1300곳에 이른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2013년 말 현재 247곳의 소규모 맥주업체가 1천종이 넘는 수제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취재 기간에 만난 수제맥주 관계자들은 “앞으로 한국 맥주시장 역시 해외 선진국과 같은 구조로 재편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최근에는 가정에서 직접 수제맥주를 만들어 마시는 ‘홈브루잉’(Home Brewing) 교육기관도 주목받고 있다. 맥주양조 교육기관 수수보리아카데미는 지난해 여름부터 맥주 만들기 강좌를 개설했다.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와 홉, 효모를 직접 구입해 현장에서 수제맥주를 만든다. 수수보리아카데미 이지아 실장은 “처음에는 3개월 과정의 강좌에 주류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20여명 정도가 참여했지만 올해부터는 매 기수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수강생이 30명 이상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취미활동으로 시작했다가 수제맥주 맛에 빠져 창업한 경우도 종종 있다. 지난 9월 부산 광안리에 수제맥주 전문 소매점 ‘아울앤푸시캣’을 연 배유주(32)·배나혁(31) 남매가 대표적이다. 누나 배유주씨는 수수보리아카데미에서 수제맥주 제조 기술을 배운 뒤 아예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대기업도 줄줄이 에일 계열 신제품 출시

에일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7년간 비즈니스 매니지먼트를 공부한 배나혁씨가 직접 미국·영국·벨기에·일본 등에서 130여종의 수제맥주를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이곳은 최근 광안리 일대에서 맥주 마니아들이 꼭 들르는 명소로 자리잡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배유주씨는 “국산 맥주에 만족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원하면서 수제맥주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수제맥주가 인기를 끌자 대기업들도 수제맥주 스타일의 에일 계열 신제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하이트가 지난해 9월 ‘퀸즈에일’을 내놓은 데 이어 OB맥주는 지난 4월부터 ‘에일스톤’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입맥주 판매에 주력해온 신세계그룹은 아예 직접 맥주 제조를 준비하고 있다. 계열사인 신세계푸드가 최근 열린 주주총회에서 맥주 제조업을 정관에 추가하고 올해 안에 서울 강남에 수제맥주 전문점을 연다는 계획이다.

최근에는 대형마트에서도 수제맥주를 접할 수 있다. 이마트는 지난 10월18일부터 미국산 수제맥주 18종을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국내 대형마트가 수제맥주를 판매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윤정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앞으로의 소비문화는 개성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수요자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며 “국내 수제맥주 시장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다양한 수제맥주가 시장에 쏟아져나오는 것은 그동안 과점시장이던 맥주업계의 판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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