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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주의 허를 찌르다
[경제사 산책]
[4호] 2010년 08월 01일 (일) 박종현 economyinsight@hani.co.kr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사회과학 분야 중 유일하게 노벨상이 수여되는 분과가 경제학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제학계에서는 노벨상이 최상급 경제학자와 그렇지 못한 경제학자를 가르는 잣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목록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가령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군나르 뮈르달이 공동 수상한 1974년의 경우를 보자. 하이에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옹호자로 케인스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뮈르달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낯설다. 대다수의 경제학자에게도 뮈르달은 경제학자라기보다는 사회학자에 가깝고 스웨덴인이란 ‘홈 어드밴티지’ 덕을 톡톡히 본 운 좋은 사람 정도로 치부된다. 하지만 1974년 당시만 해도 문제가 된 것은 뮈르달이 아니라 하이에크의 수상이었다. 하이에크는 당시만 해도 철 지난 보수주의 사상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고독한 ‘철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과학계’ 최고의 스타이자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상징이던 뮈르달의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반면, 철 지난 보수주의 사상을 고집한 고독한 ‘철학자’ 하이에크에 대해서는 구색과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

그런데 뮈르달이 성가를 높이던 시기는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서방 선진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30년 가까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이들의 경우 1914년 이전의 가장 높은 성장률이 1.4%에 불과한 반면, 황금시대에는 연평균 3.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더욱이 이 나라들은 황금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장과 정부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완전고용, 완만한 경기변동,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호응, 건강·주거·교육의 개선, 보편적 복지 혜택 등 양질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데, 당대의 시대정신을 체현한 전형적인 학자가 바로 군나르 뮈르달이었다. 그는 ‘정통파’ 케인스주의 경제학과는 상이한 이론적 전통에 속했지만, 경제학이 정책 담당자로 하여금 시민의 안녕과 복지에 봉사할 수 있게 실천적 지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케인스의 이상을 정책 현장에서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시장과 정부의 조화 강조 
그는 처음 경제학에 입문한 학창 시절부터 시장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경제학의 현실 설명력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이자율과 물가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크누트 빅셀의 이론을 새롭게 재구성하려 한 것이나 신고전학파의 경제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을 반영한다. 이후 미국의 인종 문제, 스웨덴의 복지국가 건설, 아시아의 경제 발전 등 더 실천적인 문제로까지 학자로서의 관심 영역이 확장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상아탑을 벗어나 국회의원, 상공부 장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상을 바꾸는데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군나르 뮈르달의 신화는,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에 투신한 끝에 1982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아내 알바 뮈르달과의 동지적 관계가 추가됨으로써 한층 완벽한 형태를 갖춘다. 황금시대가 정점을 치닫던 1960년대는 이상주의와 진보주의가 찬란히 빛나던 시기였다.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물질적 성공 대신 사회적 약자의 자유와 평등을 찾아나서던 진보의 시대와 공명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군나르 뮈르달이었다.
경제학자로서의 뮈르달을 대표하는 이론적 업적이 바로 ‘누적 과정’(Cumulative Process)이다. 원래 이 개념은 스웨덴 경제학의 시조인 빅셀이 은행권의 금리 인하가 물가의 가속적인 상승을 가져오게 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처음 도입한 것으로, 이후 뮈르달에 의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입증하는 주요 개념으로 정립됐다. 누적 과정이란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는 자동적인 자기 안정화 장치란 없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통상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는 어떤 외부적 충격이 발생하면 이 변화를 상쇄시켜줄 반대 방향으로의 변화가 가격 메커니즘 등을 통해 발생해 불균형은 조만간 안정적 균형으로 대체되게 마련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반면 뮈르달은 외부적 충격이 발생하면 이를 상쇄시켜줄 시스템 전체의 자동 안정화 장치가 작동하는 대신 경제 전반을 처음 충격이 가해졌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 한층 멀리 움직이는 추가적인 변화를 낳음으로써 불균형이 한층 누적되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고 보았다.
   
▲ 1960년대 경제학계의 슈퍼스타, 군나르 뮈르달. <경제이론과 저개발지역> (1957)


자유무역은 불균형 심화 유발 
오늘날에는 ‘자유무역과 자유시장 없이는 경제 발전도 없다’는 관념이 상식이 돼버렸지만,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선진국이나 중심부의 번영은 후진국이나 주변부의 저발전에 기반한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여기에는 뮈르달의 기여가 컸다. 뮈르달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1957년에 출간된 <경제이론과 저발전지역>에서였다. 신고전학파와 뮈르달이 동일한 사안에 대해 얼마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누적 과정의 함의가 무엇인지를 아주 단순한 사례를 통해 확인해보자. A지역과 B지역이 있다고 하자. 두 지역은 각각 경제활동을 벌이면서 서로 생산물을 거래하고 노동이나 자본도 이동한다. 어느 날 A지역의 한 기업이 기술 진보에 성공해 신제품을 만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신고전학파에 따르면 A지역 기업의 기술 진보는 두 지역 모두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A지역의 기업가와 노동자가 돈을 벌고 A와 B 두 지역의 소비자가 신제품의 혜택을 누리는 반면, B지역의 기업가와 노동자는 일시적으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곧 두 지역의 경제적 위상이 일시적으로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뉠 것이다. 하지만 A지역 사람들의 돈지갑이 두툼해짐에 따라 A지역 제품은 물론 B지역 제품의 수요도 추가적으로 늘릴 것이므로 B지역 기업가와 노동자의 사정도 조만간 호전될 것이다. 이는 한 지역(또는 부자)의 성공이 다른 지역(또는 빈곤층)의 성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므로, 자원의 일시적 불균등 배분은 억제되기보다는 적극 권장돼야 한다는 ‘적하효과’ 또는 ‘낙수효과’ (Trickle Down Effect)의 문제의식으로 연결된다.
뮈르달이 A지역(중심부)의 성공이 B지역(주변부) 제품의 수요 증대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그는 이를 ‘파급효과’라고 부른다)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B지역의 경우 충분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해 이러한 파급효과를 실제로 누릴 수 없다고 보았다. 파급효과란 교통통신망이 효율적이고 교육 시스템이 선진적이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치가 역동적으로 소통해 네트워크의 외부 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곳일수록 그 크기가 커진다. 경제발전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주변부로 갈수록 네트워크의 외부 경제를 제공할 인프라 또한 제대로 갖춰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음에 따라 파급효과의 크기 또한 작을 수밖에 없다.
뮈르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B지역의 향후 운명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신고전학파에서 경시한 부분, 곧 생산요소의 이동 문제를 명시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지역에 비해 A지역의 임금·이자·이윤 등이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가 B지역에서 A지역으로 빠져나가는데(뮈르달은 이를 ‘역류효과’라고 부른다), 이 역류효과(Backwash Effect)는 두 지역의 경제적 격차를 확대시키고 초기 조건의 차이를 가속화하며 불균형의 효과를 누적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B지역의 경우에는 노동과 자본이 유출됨에 따라 생산능력이 축소되고 소득창출 능력 또한 약화될 것이다. 소득 감소는 다시 지역 내에 네트워크 외부 경제에 필요한 인프라 확충을 어렵게 해 가뜩이나 부족한 파급효과를 한층 약화시키는 악순환 과정이 발생한다.

FTA 찬성론자에 대한 일침 
뮈르달의 이런 인식은 ‘순환적 인과’(Circular Causation)와 ‘양극화 발전’(Polarizing Development)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는 경기변동·경제학방법론·경제발전·국제무역·사회정책·빈곤·복지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그의 전체 연구를 관통하는 분석틀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순환적 인과’란 경제 변수 사이의 관계가 한쪽은 원인이고 다른 쪽은 결과로만 머무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과가 다시 ‘되먹임’(피드백) 과정을 통해 애초의 원인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 결과가 되는 쌍방향의 동태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변화가 악순환이든 선순환이든 순환적 인과를 동반한다면 사회·경제적 변화 과정은 누적될 수밖에 없다. 뮈르달의 통찰에 따르면, 수요·소득·투자·생산 등 서로 연관된 경제 변수가 시장을 매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그 힘은 지역 사이의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이를 한층 증폭시키게 된다. 이는 결국 자유방임 상태에서 두 경제적 공간이 상호관계를 맺을 경우, 한 지역의 발전은 다른 지역의 저발전, 곧 쇠퇴와 침체를 수반하게 마련이라는 ‘양극화 발전’ 또는 ‘불균등 발전’을 의미한다. 어떤 정책적 개입에 의해 시장의 힘을 통제하지 않는 한, 평균 이상의 수익을 제공하는 대부분의 경제적 활동과 과학·교육·문화 등의 활동은, 나머지 지역을 침체 상태로 빠뜨린 채로 특정 장소나 지역에 밀집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뮈르달의 이론은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수도 이전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정책을 정권의 명운을 건 대표적인 정책으로 내세운 참여정부의 정책 기조와 친화성이 높다. 물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이 부존자원이나 경제력, 그 밖의 정치·외교적 발언권 등에서 우리를 능가하는 상대와 자유교역을 확대하려는 시도의 경우에는 뮈르달의 누적 과정 이론과 충돌하는 측면이 크지만, 그 타당성에 대해서는 좀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다. 필자가 보기에 참여정부가 추구하려던 정책들의 기조는, 자원 이동과 관련한 유연성을 유지하되, 주변부 네트워크의 외부 경제 역량을 대폭 강화해 지역·계층·산업 간 동반성장과 균형발전을 모색하는 것으로, 뮈르달의 문제의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자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행정수도 이전이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소득재분배와 사회 서비스 제공 같은 정책적 개입은 파급효과가 역류효과를 압도할 것을 겨냥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뮈르달이 균형발전 전략을 펼치려는 정부에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일까? 우선 주변부를 향한 파급효과를 강화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적어도 개혁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 비용을 중심부 및 부유층이 부담하도록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이 점과 관련해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중심지조차 누적 과정 속에서는 혼잡 비용이 집적 이익을 압도함으로써 모두 패자가 될 수 있다는 경제 논리를 병행해 비용 분담의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나아가 저발전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는 정책의 타이밍과 우선순위가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고용·교육·의료 등에 영향을 미칠 정책들이 효과를 거두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며, 기존 제도나 규범이 새로운 정책의 효과를 억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새로운 정책적 개입이 자기완결적 선순환으로 이어지도록 하려면, 규모와 속도 면에서 충분한 반응을 유발할 수 있게 정책 수단을 세심하게 설계하는 것이 핵심 관건이 된다.

뮈르달의 부활을 기다리며 
뮈르달의 누적 과정 이론이나 신고전학파 비판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설득력이 크다. 그렇지만 오늘날 잊혀진 것은 하이에크가 아니라 뮈르달이며,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여전히 절대적인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방임 시장에 대한 믿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몇 해 전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이와 관련해 약간의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는 새로운 경제지리학을 통해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제적 상호관계를 이론화했다는 공로로 폴 크루그먼에게 노벨상을 수여했는데, 공간을 단위로 벌어지는 경제적 활동이 불균등한 발전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그의 결론은 뮈르달의 이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크루그먼의 경우 신고전학파의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뮈르달과의 차이도 적지 않지만, 향후 경제적 상황이나 시대정신의 향배에 따라 뮈르달의 노선을 계승하는 학파가 다시금 경제학의 새로운 주류로 등장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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