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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소치의 사람들, 체르케스인
경제와 역사 ● 겨울올림픽 개최지 소치의 슬픈 역사
[47호] 2014년 03월 01일 (토) 바르바라 레만 economyinsight@hani.co.kr
   
▲ 소치의 토착민인 체르케스 후손들이 지난 2월 요르단에서 과거 제정러시아가 자신들의 조상을 집단학살했던 사실을 알리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겨울올림픽이 열린 러시아 소치의 원주인은 체르케스인이었다. 이슬람교도인 이들은 1천년 동안 이곳에 거주했다. 그러나 150년 전 러시아가 캅카스 지역을 정복하면서 대량학살과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당시 체르케스인들의 최후 저항지가 소치였다. 러시아는 이런 역사를 부인한다. 체르케스인 후손들은 러시아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다. 체첸 반군도 그들 중 일부다.

바르바라 레만 Barbara Lehmann <차이트> 기자

지금으로부터 몇천년 전 날렵한 보트를 탄 그들은 화살처럼 흑해를 가로질러 이곳 해안 지역 주민과 해상 무역상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은 캅카스의 산속과 그 앞에 펼쳐진 대초원에서는 말을 키웠다. 당시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타타르인과 터키인,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우람한 이 말들을 탐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정원을 가꾸는 기술도 개발했다. 흑해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과수림들은 오늘날까지 그 기술로 재배되고 있다.

그들은 단순한 생활을 영위했다. 초가지붕을 얹은 흙집에서 군락을 이루며, 그리고 아무에게도 예속되는 일 없이. 심지어 그들은 제후들에게도 종속되지 않았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대대로 구전돼 내려오는 관습규범 ‘아디게 합세’(Adyge Habse)에 따라 이뤄졌다.

문자가 없었기에 그들의 삶은 외국 역사가들의 손에 의해 기록됐다. 당시 서캅카스에 살던 카바르다(Kabarda), 샤프수겐(Schapsugen), 우비첸(Ubychen)족에게 ‘체르케스’(Circassians)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바로 외국인 역사가들이었다. 이 용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건 13세기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디게족’이라고 불렀다.

동양과 서양, 두 세계가 겹치는 지역에 터전을 둔 게 이들 부족에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국가와 제국별로 서로 이해가 엇갈렸다. 서캅카스는 상황에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번갈아가며 ‘양다리’를 걸쳤다. 캅카스는 한편으론 중앙아시아의 방패이자 흑해와 카스피해를 보호하는 성채였지만, 동시에 정복을 위해 출정한 군대가 머무는 정거장이자 출발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전쟁의 목적은 새로운 주거지와 정복지, 그리고 시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 고트족과 훈족이 이 지역으로 왔다. 비잔틴족과 키예프의 루스족 군대도 왔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만제국은 체르케스를 제후국으로 삼았고, 그중 한 사람은 이슬람교의 정치적 지배자 ‘술탄’이 됐다. 제정 러시아의 이반 뇌제는 1561년 8월21일 크렘린에 있는 마리아 수태고지 성당에서 체르케스 공국의 공주와 결혼한다. 이 공주가 나중에 황후가 되는 마리아다.

러시아 제국, 제국주의 러시아는 19세기 동안 체르케스에는 재앙이었다.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전례 없이 참혹하고 치열했다. 러시아 군대는 산악에선 깊숙이 진군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평지에선 새로운 성을 쌓아갔다. 이런 식으로 체르케스인들을 둘러싼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불을 질러 반항하는 정착촌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축사에서 가축을 몰아내거나 가축 목을 잘랐다. 모든 지역에서 ‘인종 청소’가 벌어졌다.

“흑해에서 잡은 생선조차 안 먹는다”

그러나 캅카스는 1859년까지 정복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는 단지 북쪽 지역인 체첸과 다게스탄까지만 접수할 수 있었다. 서캅카스와 체르케스 두곳은 여전히 저항을 계속했다. 1861년이 되자 러시아는 다시 정복에 나섰다. 러시아는 이곳 주민들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정해진 땅으로 이주해 러시아의 지배를 받든가, 아니면 고향을 등지고 터키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쿠반 카자크 군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체르케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다. 소치 계곡에 집결한 아바드체첸(Abadzechen)족, 샤프수겐족, 우비첸족은 의회의 일종인 메즐리스(Mejlis)를 구성했다. 그들은 15명의 멤버로 구성된 정부도 세웠다. 동시에 자기들이 건설한 이 신생국가를 위해 최초의 정치·행정 개혁안도 마련했다. 나라의 몰락을 막아보려는 최후의 저항이자 필사적인 시도였다.

1861년 9월에는 체르케스 사절단이 타만 반도와 파르스강 상류에서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더 2세를 두차례 만났다. 두번째 만남에서 체르케스 대표단은 러시아 쪽에 일종의 ‘항복문서’를 건넸다. 자신들이 이 땅에 머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신 러시아의 통치권을 인정하겠다는 뜻도 담았다. 체르케스 정부는 한편에선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다. 콘스탄티노플, 파리, 런던으로 대사를 파견해 각국 정부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 몇몇 체르케스 후손들이 과거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숨진 조상을 추모하는 유적비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지로 흩어졌다. REUTERS

차르의 군대는 쉬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은 소치에서 참호를 팠다. 그들은 그곳에서 1864년 5월7일부터 11일까지 닷새를 버텼다. 마침내 러시아 군대의 총과 대포가 불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조국을 지키던 체르케스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1864년 5월21일 차르의 형인 미하일 로마노프 대공은 ‘크바데’(Kbaade), 오늘날의 ‘크라스나야 폴랴나’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뒤이어 전 주민이 소치에서 추방됐다. 이는 흑해를 건너야 하는 ‘대탈출’이었다. 수십만명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기자인 만프레드 크뷔를링은 최근 출판한 그의 책 <잊혀진 민족학살, 소치와 체르케시아 국민의 비극>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체르케스인들은 이때부터 그들의 조상이 죽어나간 흑해에서 잡은 생선을 먹기 거부했다.”

체르케스인들은 현재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300만~7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들 가운데 러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겨우 70만명이다. 카바르디노발카르, 카라차예보체르케스카야, 그리고 아디게야 공화국에 흩어져 있다. 체르케스인들은 자신의 뿌리를 알아내기 위해 박물관을 찾거나 인터넷 검색을 해야 하는 처지다.

크라스나야 폴랴나는 ‘아름다운 들판’ 또는 ‘붉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거기엔 지금 대형 호텔, 봅슬레이 코스, 그리고 스키 리프트와 점프대 같은 것들이 들어섰다. 150년 전 체르케스인들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이 장소가 최근 겨울 스포츠의 메카로 급부상했다. 이곳 건축업자들은 올림픽이 끝나면 그동안 잠들어 있던 이곳이 스위스 관광휴양지 장크트모리츠같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집단학살 철저히 외면하는 러시아

소치에선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던 원주민 우비첸족을 기리는 박물관이나 추모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위대한 애국전쟁’에서 소비에트 군대가 히틀러 군대를 무찔렀다는 내용의 전쟁기념비만 서 있을 뿐이다. 한때 체르케스 의회가 열렸던 소치(우비첸 언어로는 ‘ 취’다), 그래서 체르케스인들이 자신들의 마지막 수도로 여기는 이 도시의 공식 웹사이트엔 민족학살에 대한 기록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소치에는 우비첸족이 한명도 살지 않는다.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체첸 전쟁을 일으켰고 소치 지방에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4년간 올림픽에 대한 연설을 할 때 체르케스인에 대해 단 한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이 지역의 원주민을 때에 따라 그리스인이라거나 아르메니아인 또는 카자크인이라고 달리 불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쪽에는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연방보안국(FSB) 전문가들과 군대는 올림픽 기간 내내 육상과 해상은 물론 하늘을 차단해 이 작은 도시를 스포츠의 요새로 만들었다. 다른 한편에선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와 그의 젊은 캅카스 전투 요원들이 숲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체첸인 우마로프는 무장그룹 ‘캅카스 왕국’(Caucasus Emirate)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다. 그가 러시아 정보부의 자수 권유를 거부한 뒤, 2005년 당시 74살이던 그의 아버지가 납치됐고 얼마 뒤 변사체로 발견됐다. 우마로프는 지하드의 깃발 아래 캅카스 전쟁과 강제 이주민의 후손을 결집시키고 있다.

그는 “우리 조상의 뼈 위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자들을 전부 암살하겠다고 위협했다. 볼고그라드의 폭탄 테러는 앞으로 닥칠 일들의 맛보기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푸틴과 우마로프, 이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개인적인 싸움으로 얽혀 있는 이들은 자신이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많이 닮았다.

체르케스인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의견이 분열돼 있다. 러시아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이번 올림픽이 사람들에게 소치에 살았던 원주민을 추억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외교적 언사를 내놓는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이와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소치 반대파는 주로 쫓겨난 강제 이주자들의 후손이다. 반소치그룹의 운동가들은 150년 전 소치에서 일어났던 민족학살을 국제법상의 대량학살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 Die Zeit 2014년 3호 Tod in Sotschi
번역 장현숙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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