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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벗어나자” 돌파구 찾는 북한
집중 기획 ● 북핵 위협 이후 ‘평양을 가다’- ② ‘우리식 경제관리’ 시행 1년
[41호] 2013년 09월 01일 (일) 볼프강 바우어 economyinsight@hani.co.kr
   
▲ 김정은 집권 이후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북한의 국영기업들이 종업원의 임금을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종의 자본주의적 실험이다. 평양의 한 실크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여성노동자의 모습.REUTERS

서방과 협력선 모색하고 국영기업 자율 임금인상 허용… 자본주의 방식 도입에 유연

내부 인사들조차 북한 경제가 중국에 너무 종속돼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 때문에 북한은 유럽 등 서방세계를 경제협력 파트너로 삼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부적으론 김정은이 통치권을 행사한 지난해부터 국영기업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우리식 경제관리’라는 실험을 단행했다. 자본주의적 방식을 도입하는 데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볼프강 바우어 Wolfgang Bauer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전날 한 식당에서 과음한 탓에 취재진은 예정된 일정을 30분이나 늦고 말았다. 오진명의 제안으로 북한이 새로 도입한 ‘우리식 경제관리 기법’을 시범적으로 운용 중인 한 공장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김철웅은 전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셨던 30도의 술을 가리켜 “한국의 미네랄워터”라고 했다.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때 모두 이 술이 나왔다. 운전기사는 맥주만 마신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정이 늦어지자 오진명은 혼잣말로 욕을 했다. ‘3월26일의 케이블공장’(평양326 전선공장을 일컫는 것으로 1968년 3월 김일성이 현장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3월26일 공장’으로 부른다. -편집자) 정문에 선임 엔지니어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임 엔지니어의 얼굴에는 일정이 늦어진 데 대한 초조함이 역력했다.

오진명은 가는 길에 방문할 기업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었다. 2012년 12월 이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북한의 국영기업들이 종업원의 임금을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존에 북한은 국가가 표준임금을 결정했고 기업은 그 이상을 지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기업이 재량껏 수익 일부를 노동자 임금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편집자)

이후 이 업체는 종업원들의 임금을 직접 결정했다. 이들이 받는 임금은 북한에서 최고 수준이다. 이 공장 노동자는 매달 최대 14만원, 즉 1천달러가량을 번다. 북한의 평균임금은 4천원(약 30달러) 수준이다. 이 공장을 따라 다른 기업도 종업원의 임금을 수백달러 수준으로 인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임금은 일종의 용돈으로 상징적 수준에 그쳤다. 북한 주민은 생활에 필요한 주택·식료품·의복 등 대부분의 물건을 배급받았다.

오진명은 오늘 방문하는 전선공장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다. 선임 엔지니어와 오진명이 소속된 외무부 산하 문화위원회는 이 공장 노동자들의 주택 건설을 위해 협력한 적이 있었다. 공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150만달러를 들여 25층짜리 빌딩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문화위원회는 외국인 투자자 유치 업무를 맡고 있다. 그래서 오진명은 취재진에게 전선공장을 보여주려던 것이다.

기업 노동자에게 성과 따라 임금 지급

선임 엔지니어는 우리에게 공장 안을 안내하고 구리 전선, 알루미늄 전선 그리고 광케이블을 보여주었다. 공장을 둘러본 뒤 선임 엔지니어는 회의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오진명은 공장 방문에 앞서 “너무 직접적으로 임금 인상에 대해 묻지 말라”고 취재진에게 귀띔했다. 선임 엔지니어가 아무 말이 없자 우리는 안내인들을 난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진명은 선임 엔지니어에게 “이 회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라”고 조언했다. 선임 엔지니어는 현재 북한 전역이 공사장으로 변하면서 전선 수요가 많다고 했다. “직원 수가 1500명입니다. 임금 인상 뒤 직원들의 사기는 더 올라갔습니다. 인간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옷을 벗어야 했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며 웃었다.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김씨 일가의 왕국에서 자본주의는 난산을 겪고 있다. 오진명은 전선공장 면담이 끝날 무렵 활기에 넘쳐 보였다. 그는 보여줄 게 있다며 우리를 전선공장 옆에 들어설 노동자용 고층건물 부지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짓다가 중단된 고층건물이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주거지 조성을 위해 고층건물을 짓던 중국인이 당 간부들에게 선물할 소형차 300대를 북한으로 가져왔는데, 그가 부패 혐의로 중국에서 체포됐다고 했다.

오진명은 기업가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다. 문화위원회는 평양에 독일 레스토랑을 개업할 계획이다. 오진명은 파트너로 독일 맥주회사 파울라너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철웅에게도 계획이 있다. 독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철웅은 자신의 해외투자 유치 계획에 대해 상사들의 결재도 받았다. 김철웅은 희토류 연구소의 위탁으로 독일에서 협력 파트너를 찾고 있다. 그는 취재진이 이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광산 엔지니어 사절단이 호텔로 취재진을 방문했다. 이들은 북한 경제가 중국에 너무 종속됐다고 하소연했다. 중국이 자신들에게 국제거래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지불하고 있다며 제값을 받기 위해 직접 유럽 고객을 접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취재진의 북한 방문이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고 말했다. 오진명의 문화위원회는 중국 공산당원들처럼 자체 회사를 통해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업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날 저녁 오진명은 여성 경찰관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녀는 사전에 질문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오진명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늦은 저녁 시간 호텔 바에서 만난 영국인 변호사 마이클 A. 헤이는 “북한에서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취재진에게 조언했다. 안내인들은 이미 잠자리에 든 상황이었다. 헤이 변호사는 취재진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투숙하고 있는 유일한 서방 외국인이다. 그는 23년 전부터 평양에서 살고 있으며 9년 전부터는 이 호텔의 스위트룸 313호에 묵고 있다. 그는 귓속말로 “자신도 무수히 많은 추방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고 했다. 북한 주민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헤이 변호사는 평양에 사는 동안 자신이 북한 사회에서 허용되는 ‘(말과 행동의) 범위’에 대한 감각이 발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는 도중 잠시 멈추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향성 마이크가 가까이에 설치돼 있다”고 그는 내 귀에 속삭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한 젊은 남성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취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번주에 세번 마주친 헤이 변호사는 그때마다 술에 절어 있었다. 그는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은 유일한 외국인 변호사로 업무가 많지 않았다. 그가 지금 맡고 있는 사건은 단 하나다. 그는 언젠가 북한이 중국처럼 합작회사 천국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날까지 여기에 있을 사람은 바로 나 마이클 헤이다!”

   
▲ 김정은이 지난 5월 휴대전화 공장을 방문한 모습이 8월11일 공개됐다. 북한을 방문한 국내외 인사들은 김정은 집권 이후 1년 동안 이뤄진 북한의 변화가 지난 10년의 변화를 앞지른다고 전했다.REUTERS

9년간 평양 호텔에 머무는 영국 변호사

베일에 싸인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마이클 헤이 자신도 베일에 싸인 인물이 되었다. 그에겐 수임 건도 거의 없다. 더구나 누가 자신에게 수임료를 지급하는지에 대해서 침묵했다. 그렇다고 그가 돈이 부족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여성이다. 자신은 진지한 관계를 원하며 이제 50살이 넘어서 그럴 때가 됐다고 했다. 그는 중개업체를 통해 40살가량의 필리핀 여성 2명을 소개받았으며 조만간 그들을 방문할 계획이다. 자신은 수도사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북한 여성과 외국인 남성의 결혼은 집단수용소에 감금될 만큼 엄한 처벌을 받는 일이다. 심지어 가벼운 연애도 벌을 받는다. 김철웅은 다음날 점심을 먹으며 “외국인이 북한에 와서 북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남한 사람처럼 북한 사람이 정체성을 잃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북한은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이지 않는 순수 인종으로 남아야 한다. 북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인이다.”

북한 정권의 선전용 잡지에는 ‘차일드 레이스’(Child Race·어린이 같이 순수한 민족이란 뜻)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차일드 레이스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서 아주 연약하다. 따라서 차일드 레이스에게는 이러한 모든 귀중한 특성을 농축할 수 있는 더 높은 자아를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의 도움이 있어야만 연약한 인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구권이 상존했던 냉전시기에도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고립되는 길을 걸었다. 외국인과의 결혼은 금지됐고 국제결혼 부부는 이혼해야 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는 스탈린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순수 인종’이란 개념을 과거 식민지 권력인 일본에서 받아들였다. 일본이 후지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만든 것처럼 김일성은 백두산을 북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믿음은 ‘젊은 황제 김정은’ 정권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북한 지도자로서 김정은의 존재를 단순히 두려움과 억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진명은 여경에게 질문지를 보냈다. 취재진과 안내인들은 22살의 여경이 지레 겁먹지 않을 만한 평범한 질문들로 제한했다. 예컨대 교통경찰이라는 직업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리고 오진명의 제안으로 어떤 외모의 남성이 배우자로서 이상형인지 등의 질문을 포함했다.

취재진은 버스를 타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병영국가의 지도층이 양성되는 곳으로 향했다. 만경대혁명학원만큼 북한 장군들의 실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버스가 만경대혁명학원 정문으로 들어서자 오진명은 이곳이 고아를 위한 기숙학원이라고 알려주었다. 오진명은 실상보다 훨씬 낮춰 표현하는 데 능숙하다. 만경대혁명학원은 군지도부를 양성하는 핵심 기관 중 하나로 북한판 육군사관학교다. 김정일은 한국전쟁 중 이곳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우리를 맞이한 김순택 장교는 “기자들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다”며 미소를 지었다. 서방 기자들이 이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때가 10년 전이었다고 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사찰처럼 생긴 흰색 건물 4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소년 900명이 수업을 받고 있다. 즉, 소년 900명의 부모들이 혁명을 위한 전투 중에 사망했다는 의미다. 소년들은 11살이 되면 이곳으로 오고 19살에 떠난다. 정문 위에 커다랗게 김일성이 썼다는 “아이들이여, 슬퍼하지 마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다.”

여기에 언급된 아버지는 그의 아들 김정일과 함께 육중한 동상이 돼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 5명은 두 지도자를 연모하듯 폭 11.5m, 높이 4m에 이르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김순택 장교는 1시간 동안 비어 있는 침실 등을 보여주었다. 침실에는 나무판처럼 딱딱한 매트리스가 깔린 2층 침대가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담요 2개와 침대시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옷장 2개엔 양치용 컵과 플라스틱 샌들이 보관돼 있었다. “아이들은 개인 물품을 어디에 보관하는가?”라는 질문에 장교는 “학교에 아이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곳에서 나란 존재는 없으며, 오로지 우리만이 있을 뿐이다. 슬퍼해서는 안 되는 소년들의 유일한 소지품은 장난감이나 곰인형이 아닌 몸에 착용하고 있는 유니폼이었다.

취재진은 교실 한곳을 5분간 봐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머리를 빡빡 깎은 12살 소년들이 수학 시간에 방정식을 배우는 중이었다. 음악 수업을 마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도에 서 있던 소년 7명이 취재진을 향해 군대식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가장 어린 소년들조차 계급장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반장은 두줄, 부반장은 한줄이었다.

장교로 양성될 소년들은 모두 8개의 교과목을 배운다. 그중 하나가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혁명 역사 공부’다. 몇몇 교실엔 실물 크기의 탱크 모델이 진열돼 있었다. 학생들은 대전차 로켓포와 유탄발사기 사용법을 배운다. 이 기숙학원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소년들이 실제로는 고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 아버지만 작업 중 또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9학년 과정 동안 어머니들의 학교 방문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김순택 장교는 설명했다. “어머니들이 학교를 방문해서 좋은 점이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도자 동지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을 방문한 김정은은 학생들이 연극 공연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한다. 김정은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아이들을 놀게 내버려두라”고 지시했다.

외국인 관찰자들은 노동당과 군부 간의 물밑 권력투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김정은은 특별한 이유 없이 국방부 장관 3명을 연달아 해임했다. 지난 5월에 해임된 마지막 국방부 장관은 6개월 단명에 그쳤다.

군부에서 당으로 권력 중심 이동

젊은 장군 김정은은 권력의 중심추를 노동당으로 옮기고 있는 듯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내총생산(GDP)의 25%를 군에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20만명에 이르는 북한 군부는 전세계 최대 규모다. 김정일은 ‘군사 우선!’(선군)이라는 슬로건을 폈다. 하지만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선군 정책과 결별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를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보인다.

북 노동당 문화위원회 유럽국장이자 외무부 고위급 인사인 류경일은 “북한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통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오진명이 자주 들르는 술집에서 류경일을 만났다. 뜨거운 석판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자 류경일은 옷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옷을 벗으라고 권했다. 취재진은 양복을 벗고 티셔츠와 속옷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오진명과 김철웅은 저녁을 먹은 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자고 했지만 류경일은 박수만 치겠다고 했다.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한 뒤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북한은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도 카다피의 전철을 밟는다면 북한은 스스로 바보라고 입증하는 셈이다.”

류경일은 중국 유학생 출신이다. 유화적인 류경일은 세련된 영어를 구사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 국가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류경일은 북한이 핵무기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군부를 위해 지출하는 돈을 민간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논리는 북한 국영언론이 2개월 전 처음 차용한 이후 꾸준히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북한 정권의 선전기구는 핵무기를 경기부양 프로그램으로 홍보하고 있다.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또 감시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잠식한다. 취재진과 안내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게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사진기자가 촬영이 금지된 군복을 착용한 군인들을 거리에서 찍으려 하자 오진명은 사진기자를 향해 “당신들도 규정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촬영 금지 대상은 군복을 착용한 군인들 말고도 승객으로 가득 찬 버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수백m에 이르는 대기 행렬, 소를 이용해 쟁기로 농경지를 경작하는 모습,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초상화가 빛에 반사돼 줄이 그려진 것도 포함됐다. 오진명은 긴장감이 팽팽해질 때면 “내가 당신들에게 이미 수천번 말했잖아!”라며 언성을 높였다. 이런 상황에선 취재진과 안내인들 간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처럼 오랜 침묵이 흘렀다.

여성 경찰관은 끝내 인터뷰를 거절했다. 오진명은 의무감에 다시 한번 인터뷰를 요청하겠다고 했지만 취재진의 북한 체류 날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취재진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북한에선 갑작스레 잠시 선전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동물원에서 한 할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쳤다. 두꺼운 유리 창문을 통해 물이 탁한 수족관의 물고기들을 보고 있을 때였다. 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흥분한 어투로 뭔가를 말했다. 김철웅은 그 할아버지를 재빨리 떼어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묻자 김철웅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렇게 전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했다.”

ⓒ Die Zeit 2013년 29호 Der Geliebte Führer befiehlt Luxus 번역 김태영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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