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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섬유산업 도약 불러온 페스트
경제와 역사 - 페스트와 함께 닥친 중세의 대공황
[34호] 2013년 02월 01일 (금) 장미셸 콩실 economyinsight@hani.co.kr

   
1411년 토겐부르크 성서에 그려진 페스트 환자. 1347∼1352년 유럽 대륙을 휩쓴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위키피디아 제공

1347~52년 페스트(대역병)가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이로 인해 3분의 1에서 절반가량의 인구가 사라진 것은 물론 사회가 해체되고 경제 불황이 심화됐다. 그뿐 아니다. 페스트로 인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피해가 발생하면서 토지 소유 관계가 변하고 산업구조가 바뀌는 등 경제 질서의 대변동이 이뤄졌다.

장미셸 콩실 Jean-Michel Consil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객원 칼럼니스트

"그해와 이듬해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전역은 물론 풍문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숱한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노인보다는 젊은이의 희생이 더 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는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주검을 매장하는 것뿐이었다."

장 드 베네트를 비롯한 당대 편년사가(연대기작가)들은 저마다 당시 유럽을 휩쓴 전염병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코 예사로운 병이 아님을 직감한 그들은 저마다 병에 대해 세밀한 기록을 남겼다. 덕분에 이들의 기록은 전염병의 모든 증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됐다.

하지만 당대 편년사가들의 날카로운 기록에도 불구하고 병의 정체를 둘러싼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증상이 비슷한 질병들을 비교한 의학 논문이 숱하게 쏟아졌지만 도무지 병명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중세 초기 이후 이 질병에 대한 기억은 인류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정확한 병명을 알아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이 병을 그저 '떼죽음'(Great Mortality) 혹은 '대역병'(Great Pestilence)이라고만 불렀다. 사실 역병(페스트)이란 단어 역시 모든 중병, 전염병, 재앙 등을 총칭하는 애매한 용어다.

페스트를 둘러싼 소문은 실제 전염병이 발병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확산됐다. 전염병은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이탈리아·프랑스·독일 등을 거쳐 북유럽·동유럽의 경로로 확산됐다. 하지만 처음 병이 발생한 진원지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저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혹은 카스피해 연안 지역이 최초 발병지일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추정할 뿐이다. 가령 최초의 생화학 무기가 사용된 예로 소개되는 한 전쟁 일화를 통해 1346년 흑해 연안 지역에서 페스트가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카파(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의 제노아 교역소를 포위한 몽골인들은 도시 안으로 페스트에 감염된 주검들을 투척했다.

인구 감소로 식량 남아돌고 임금은 상승

페스트가 돈다는 소문은 앞서 몇 가지 불길한 천체 현상이 관찰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가령 장 드 베네트는 "파리 하늘가에서 '별 하나가 불을 뿜으며 떨어지다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는 장면'이 관찰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페스트를 알리는 불길한 징조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몇몇 천체 현상을 신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태도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는지 방증하는 동시에 당대인의 종교적 믿음을 잘 대변해준다. 명문 소르본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근거로 행성 회합, 월·일식, 별똥별 등 몇 가지 천체 현상이 공기를 오염시키면서 전염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당시 희생자 규모를 파악할 만한 사료는 희귀한 편이다. 프랑스의 경우 장노엘 비라방이 지적한 2건의 사료가 전부다. 행정구역별로 주검 매장 요금을 적은 회계장부다. 그 가운데 부르고뉴 지브리와 리옹 생니지에서 장부 2개가 발견된 것이다. 이 사료를 근거로 당시 유럽에서 페스트로 인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페스트는 사망률만 높인 것이 아니었다. 상당 기간 출산율 역시 둔화시켰다. 가령 여러 연구 조사에 따르면, 영국은 16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1347년 수준의 인구 규모인 370만 명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스트는 가족이나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끊어놓기도 했다. 장 드 베네트는 "더 이상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자선이 실종되고, 희망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당대인들은 페스트의 발병 원인이나 전파 경로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애꿎은 희생양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무고한 유대인들이 잔인하게 학살됐다. 어떤 지역에서는 성직자, 귀족, 외국인, 부랑자, 순례자, 무슬림, 나병환자 등이 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무수한 이들이 전염병을 피하려 안간힘을 썼다. 가장 높은 전염 위험에 노출된 의사들은 환자 치료에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병에 옮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열악한 위생 환경에서 살아가는 빈곤층은 전염병을 피할 길이 없었다. 부유층에 견줘 더 많은 빈곤층이 빠른 속도로 전염병에 희생됐다. 가령 1348년 아비뇽에선 교황청(아비뇽은 1309년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해 그의 거주지로 결정되었으며, 1309년 3월9일부터 1377년 1월13일까지 로마 대신 교황청이 존재했다) 내 거주자의 사망률은 5분의 1에 불과한 반면 일반 민중의 사망률은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페스트가 유행한 기간에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을 묘사한 그림. 페스트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면서 유럽에는 대공황이 닥쳤다. 위키피디아 제공

페스트는 중세 유럽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경제에 관해서라면 도통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페스트로 인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피해가 발생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편년사가들은 페스트가 초래한 심각한 피해 중 하나로 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인력난으로 인해 임금이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피렌체의 벽돌공이든 파리의 목공이든 1351~60년 노동자의 임금은 1331~40년과 비교해 2배가량 치솟았다. 고임금 추세는 1450년께까지 이어졌다.

크고 작은 시골 마을- 프랑스에서는 버려진 시골 마을이 2천여 곳에 달했다- 에서는 주민들의 이탈로 인해 토지 이용 및 부의 재분배 방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덜 비옥한 땅은 버려지기 일쑤였고, 영주들은 대규모 경작지를 새롭게 재편했다. 때로는 살아남은 농민들에게서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도 불사했다. 대대적으로 토지소유권이 이전됐다.

농경지 축소로 양모산업 기반 확대

도시는 비교적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덕분에 군사(당시는 '백년전쟁'이 한창이었다)나 부랑자의 침입을 비교적 잘 막아냈다. 이 때문에 도시로 많은 농촌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이치로 본다면 도시 사망자의 집과 상점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농촌 인구의 유입으로 도시 인구가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한 덕에 부동산 가격이 안정됐다.

역설적으로 페스트 발병은 섬유산업 발전에 도약대가 됐다. 소모(Carding·양모의 짧은 섬유는 없애고 긴 섬유만 골라 가지런하게 하는 일) 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플랑드르, 스페인, 랑그도크 등은 새로운 섬유 생산지로 발전했다. 페스트 창궐로 인구가 급감한 것이 소모사 모직물 발전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곡식 재배에 사용할 토지를 양(스페인 메리노 양 등) 방목이나 염료식물(대청·목서초·꼭두서니 등) 재배를 위해 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가 유럽 경제의 전반에 미친 영향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힘들다. 가령 일드프랑스(파리 근교 수도권에 해당) 지역에서는 1410년까지, 그 외의 지역에서는 이후로도 한참 동안 곡물가 하락 추세가 계속됐다. 생산량이 감소하는 속도에 비해 먹여살려야 할 인구가 더 급격히 줄어든 덕분이었다. 물론 흉작기에는 예외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곡물가 하락을 순전히 페스트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경제 불황의 징표로 이해되던 곡물가 하락 움직임은 이미 1315년께 서유럽에서 시작됐다. 더욱이 당시는 또 다른 재앙이 유럽 사회를 덮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이, 그 외 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잉글랜드 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남부 등에서는 국지적인 전쟁이,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다.

'대규모 불황'의 규모나 기간도 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이탈리아와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인구 감소와 불황의 정도가 더 남쪽에 위치한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약하게 나타났다. 당연히 그 기간도 짧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베리아반도에 자리한 유럽 국가들이 15세기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8~15세기 무슬림 지배의 스페인 영토를 되찾기 위해 벌인 전쟁)을 완수하고, 1415년 유럽 최초로 세계화의 문을 활짝 열고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 등 눈부신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 Alternatives Economiques 2013년 1월호(제320호) Grand peste et grande dépression

번역 허보미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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