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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 이데올로기
[Editor's letter]
[2호] 2010년 06월 01일 (화) 한광덕 economyinsight@hani.co.kr

총괄 편집장 한광덕 kdhan@hani.co.kr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이번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출전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상위의 유럽 강호들이다. 스페인의 순서를 끝으로 돌리면 원조 ‘PIGS’가 된다.
발칸의 화약고, 아니 유럽의 화약고로 등장한 그리스의 2010년은 한국의 1997년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 대대적인 구조개혁이 수용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조치로도 시장의 신뢰를 되찾을 수 없다.” 당시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의 협박성 어록이다. 지금 그리스에도 재정 개혁이란 이름의 ‘전차’가 구제금융 보따리를 실은 채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독일은 그리스의 민족성까지 들먹이며, 근검절약의 대명사인 우리가 왜 설거지를 해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베짱이’가 흥청망청 낭비할수록 곳간이 불어났던 ‘개미’가 뒤늦게 화를 내는 셈이다. 그게 바로 유로화 덕분이었는데, 이젠 유로존을 떠나라는 ‘말 폭탄’을 퍼붓는다.
지난 창간호에서 커버스토리로 다룬 ‘유령과 싸우는 그리스 시민’ 기사는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한 편의 긴 서정시를 보는 듯한 진한 울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부 독자는 그 기사의 필자가 <슈피겔> 기자라는 점을 들어 ‘독일 이데올로기’를 교묘히 관철한 게 아니냐는 의견을 보내왔다. 마침 국내에서도 남유럽 위기를 빌미로 좌파 정권의 포퓰리즘을 준엄하게 꾸짖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서 스웨덴·노르웨이 등 북유럽 복지국가의 낮은 재정적자와 높은 조세부담에 대해선 침묵한다. 그래서 이번호에는 독일이 꿈꾸는 유럽 모델을 독일 매체인 <차이트>가 앞장서 통렬히 비판한 기사를 준비했다.
한국이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교훈은 2008년에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웠다.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그 비용을 키웠다. 그 불신의 리더십은 지금 천안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대가는 ‘PIIGS’(PIGS+아일랜드) 못지않게 조롱당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귀환이다.
천안함 정국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특별했던 1994년을 떠오르게 한다. 그해 3월 판문점에서 북쪽 대표가 내뱉은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 녹화 테이프가 방송사에 배포됐고, 대한민국은 즉시 북핵 폭풍 속으로 빨려갔다. “북진 통일” “과감한 응징” 발언이 신문을 도배했다. 6월16일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가 “미군 가족과 대사관 직원의 철수 계획을 공식 발표하겠다”고 청와대에 통보했다. 미국 민간인 8만 명 철수는 ‘말의 전쟁’이 ‘현실의 전쟁’이 됐음을 의미했다. “전쟁 불사”를 호언장담하던 YS의 태도가 갑자기 확 바뀌었다.
유럽합중국을 향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유로존의 안정이라는 공공재에 무임승차할 수는 없다. 남북통일로 가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한반도 평화라는 공공재에 무임승차할 수는 없다. 본지는 ‘누가 이익을 챙기고 누가 값을 지불하는가’라는 퀴 보노(Cui Bono)의 화두를 위기의 정치경제학이란 관점에서 끊임없이 제기할 것이다.
수십 년 만의 무더위가 찾아온 1994년 6월, 사람들은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팀을 응원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 얼마 전의 전쟁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16년이 지난 올 6월, 월드컵 B조에 함께 속한 한국과 그리스가 첫 경기를 치른다. 물론 G조의 북한도 선전할 것이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기 위해 확대재생산한 위기가 잦아들고 평화가 돋아날 그날의 그라운드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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