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를 조종하는 큰손들 세계 정치마저 좌지우지

외환·주식·파생상품 등 세계 금융을 움직이는 주역들에 대한 <슈피겔>의 심층 르포

“시장의 반응은 냉정하다.” 전세계 여기저기서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내놓을 때 흔히 듣는 이야기다. 지난해 12월9일에 열린 유럽 정상회담 뒤에도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장은 긍정적 반응을 보일까? 아니, 누가 이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독일의 세계적 주간지 <슈피겔>은 이 답을 찾기 위해 지난해 11월 9명의 기자로 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유럽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3주간 세계 금융시장의 주역 7명의 업무 일상을 밀착 취재했다. 그들의 밀착 취재는 괴물과도 같은 시장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용한 창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_편집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5일 엘리제궁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다. 두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유럽연합(EU) 조약의 개정 필요성을 밝혔다. 뉴시스 AP.

자본주의 세계를 배회하는 ‘시장’이라는 유령

‘유로존 몰락’에 베팅한 시장… 각국의 노력에도 ‘긍정 신호’ 안 보내

한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시장’이라는 유령이. 이 유령은 수십억유로를 삼키고,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가 정상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연 금융시장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리고 정치는 어떻게 그에 휩쓸리고 있는가.

미국 텍사스의 헤지펀드 매니저 카일 배스는 다른 이들이 시속 200km로 계속 새로운 나락을 향해 달려갈 때, 유일하게 올바른 방향을 알고 있던 시장의 ‘고스트 라이더’였다. 배스는 5년 전 전세계가 아직 부실 부동산 대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을 때, 최초로 의도적으로 다른 방향을 선택하고 몇억달러를 서브프라임 거품이 꺼질 것이라는 데 걸었던 사람이다. 2008년 중반, 유럽에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아직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겨질 때 그는 또다시 대세를 거슬러, 유럽의 거대 채무국의 몰락에 돈을 걸었고, 요 근래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다. 카일 배스는 투기꾼인가, 저주받을 시장의 악당인가? 아니면 천재일까?

그의 회사 ‘헤이먼캐피털파트너스’의 사무실은 댈러스시 다운타운 가장자리에 위치한 14층 건물에 높이 자리잡고 있다. 복도 끝에 있는 그의 사무실 창으로 내려다본 미국은 키치 스타일인 중국의 벼락부자 신흥도시처럼 보인다. 배스는 양복을 입는 타입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그는 카우보이 장화를 신고, 아이스크림 콘을 먹고 있었다. 사무실의 선반 위에는 조지 W. 부시와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좋은 시절은 지났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이든 사업이 다 잘되던 시절이 있었지요. 나 혼자만 잘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그건 별로 재미가 없어요.”
　
학자처럼 진지하고 성실하게 운영

근본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의 사업을 금융시장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진지하고 성실하게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배스의 일과는 주로 통계 수치를 조사하고, 판독하고, 이해하고, 수많은 숫자의 무더기에서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금융계 동료와 정치계, 언론이 내놓는 다양한 시장의 상태 평가는 대부분 무시한다.  배스는 “그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는 것을 보면 미칠 것 같다”고 말했다. “진실은 권력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일어서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저 밖에 놓인 부채의 산은 역사상 평화 시기에 쌓은 것 중 가장 거대합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경제적 산사태가 일어날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유럽과 전세계에 남겨진 유일한 탈출구는 무자비한 부채 삭감뿐이에요.”

배스는 그림이 포함된 서류철을 펼쳐 보였다. 이 보고서는 보통 그의 투자자들만 볼 수 있는 내부 기밀 문서다. 보고서의 메시지는 절망적이었다. 어떤 도표에는 한 국가의 은행이 보유한 자산가치와 해당 국가의 총수입 대 채무 총액의 비율을 국가별로 나열해놓고 있었다.

이것은 한 국가가 자국의 모든 은행을 구제해야 할 경우, 해당 국가에 부여되는 일종의 최종 결산으로 극단적 위기 상황의 시나리오다. 배스의 손가락이 도표에 표시된 일련의 푸른 기둥 위로 미끄러졌다. 아일랜드는 유사시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은행 자산의 총합과 국가 채무의 합이 국가 총수입의 40배로 나와 있었다. 일본도 35배 이상이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경우 스위스는 국가 수입의 17배, 미국은 16배, 영국은 14배, 스페인은 11배, 독일은 9배의 채무를 가지게 된다.

“아일랜드와 일본은 아주 많이 한계를 넘었습니다. 대책이 하나도 없어요. 도울 방법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의 회사 헤이먼캐피털은 지금 이 불균형 상태에서 비대칭적 비즈니스, 즉 적은 투자금으로 많은 수익을 얻을 방법을 찾고 있다.
　
투기자본 손가락질에 격앙돼 항변

“수년간 어리석은 방식으로 채무를 쌓아올린 국가의 몰락에 돈을 거는 것이 뭐가 비도덕적이란 말입니까?” 배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 텍사스 댈러스시의 작은 펀드매니저일 뿐인 내가 유럽이 조 단위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죄가 있다는 겁니까? 그건 말도 안 되며 웃기는 소리예요. 유럽 각국의 정부들은 스스로 엄청난 규모의 허튼짓을 했으면서 이제 와서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잘못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 실패한 겁니다.”

시장, 이보다 더 불분명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든 범인 혹은 최소한 책임자를 따져야 할 때는 언제나 시장이 언급되고 있다. 전세계의 모든 신문에, 전세계의 모든 언어로 이 말이 반복되고 있다. ‘시장(the markets, les marches, Die Markte)이 정상회담에 실망했다’ ‘시장은 희망한다’ ‘시장은 위협한다’ ‘시장은 처벌한다’. 이는 마치 온 지구를 휩쓸며 인류·국가·정부와 전투를 벌이는 괴물 같은 거대한 힘에 대한 헤드라인 같다.

한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그것은 시장이라는 유령이다. 집단이성의 표현이자 번영을 가져오는 장치로 수십 년간 각광받아온 것이 이제는 무서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대중은 공포와 의심과 의문에 가득 차 그것을 바라보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정부는 국민의 의문에 더 이상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국가가 단지 그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동일한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가능할까? 시장이 유럽을 대상으로 투기를 한다는 정치권의 비판이 옳은 것일까? 각국 정부는 왜 금융시장의 힘을 억제하는 데 실패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누가 세계의 주인인가, 누가 돈을 지배하는가?

지난해 11월, 9명의 <슈피겔> 리포터로 이루어진 팀이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3주간 금융시장의 주역 7명의 업무 일상을 밀착 취재했다. 이 기간은 지난해 12월9일 금요일에 열린 유럽 정상회담 전 3주간으로 정부가 무너지고, 분노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매우 드라마틱한 시기였다.

당시 브뤼셀에서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고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통일 유럽의 미래를 위해 타협점을 찾기 위해 또 한 번 정상회담, 즉 각국 수뇌의 회의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발표됐다.

한 여인이 지난해 11월21일 그리스 아테네의 주식 시황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유럽 정상들이 여러 차례 그리스 등 유럽 각국의 재정위기 해소 방안을 논의했지만,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뉴시스 AP.

하지만 정상회담은 있었지만 그곳에 타협점은 없었다. 당시 유로존 채무문제 해결을 위한 협약에는 유로화 사용 17개 유로존 국가와 10개 비유로존 국가 중 영국 등을 제외한 6개 국가가 체결에 참여했다. 이들은 재정 균형을 위해 부채 규모를 제한하고 동시에 이를 어길 경우 벌칙을 가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또 현 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자금 확충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협약은 각국의 재정 적자를 GDP의 3%, 국가 부채는 60% 이내로 제한하는 이른바 ‘황금룰’을 도입하고, 이를 어기면 유럽연합(EU)이 자동적으로 제재할 수 있게 된다. 이 협약은 올해 3월 초까지 유로존 17개국 중 9개국 이상이 비준할 경우 효력을 갖게 된다.

정치권이 합의라고 말하는 이 협약은 사실 EU의 분열이었다. 정치계는 정상회담에 대해 자화자찬을 했지만,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날 ‘시장’을 대상으로 그들이 어떻게 부채위기를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했다. 그 대신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180도 바뀐 정책이었다. 약 1년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과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가 프랑스 도빌의 바닷가를 산책하며 합의한 내용, 즉 국가 디폴트가 발생할 경우 민간 채권자를 보호하고 채무국을 자동 처벌하지 않는 것을 뼈대로 한 내용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제 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은행들에는 앞으로 국채의 부분 삭감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보장됐다. 이 정상회담의 승자는 은행들이었다.
　
유럽의 분열 확인한 정상회담

정상회담이 열리기까지 3주간 금융시장 주역들의 일과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혼란에 대한 불안을 체감하고, 혼잡한 시기에 시장의 거친 요동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상회담 3주 전에 시장이 가라앉기 시작해 2주 전까지 시장은 침체돼 있었다. 그러나 심장에 놓는 주사와 같은 각국 중앙은행의 개입이 환율을 갑자기 치솟게 했고, 곧 모든 것은 위기의 정상회의만을 향해 달려갔다.

기자들은 국채시장에서 보험회사를 위한 안전한 투자처를 찾고 있는 투자 관리자를 따라다니고, 최고경영자(CEO)가 정보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 거대한 주식펀드의 하루를 관찰하고,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서 매일 수십억달러를 움직이는 간부급 파생상품 딜러와, 중산층에게 달러화·엔화·프랑화를 공급하는 브레멘의 한 외환 딜러의 일과를 묘사한다.

<슈피겔> 기자들은 또 독일 연방준비은행의 경제 전문가들이 공포에 질려 굳어 있는 독일 은행들이 깨어나도록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을 보았고, 독일 금융감독청에서는 원장이 ‘그림자 은행’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지펀드 매니저 카일 배스는 결국 악역을 맡고 있다. 그는 국가 채무에서 거대한 수익을 얻고 있다.

이들과 같은 인사이더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지금 유럽을 변화시키는 베팅의 목격자가 된다. 시장은 유로존의 몰락에 베팅하고 있다.

그 뒤에 숨겨진 것은 계획도, 음모도, 특정한 의도조차도 아니다. 시장의 방향은 오히려 상황 분석과 금융시장의 주역들이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때로는 순간적으로 내리는 결정의 필요성에서 유도된 것이다. 이런 결정에 대해서, 그들의 조건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부분적으로 복잡한 도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것은 미래, 그리고 어쩌면 한 역사적 프로젝트의 갑작스러운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장이 어떻게 정치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글 / 우베 부제 Uwe Buse · 울리히 피히트너 Ullrich Fichtner · 하우케 구스 Hauke Goos · 랄프 호페 Ralf Hoppe · 크리스토프 파울리 Christoph Pauly · 코르트 슈닙벤 Cordt Schnibben · 토마스 슐츠 Thomas Schulz · 안네 자이트 Anne Seith · 알렉산더 스몰츠크 Alexander Smoltczyk 이상 <슈피겔> 기자
ⓒ Spiegel·번역 황수경 위원